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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윤제림 시인 / 사랑을 놓치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2.
윤제림 시인 / 사랑을 놓치다

윤제림 시인 / 사랑을 놓치다

- 청산옥에서

 

 

내 한때 곳집 앞 도라지꽃으로

피었다 진 적이 있었는데,

그대는 번번이 먼길을 빙 돌아다녀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내 사랑!

쇠북 소리 들리는 보은군 내속리면

어느 마을이었습니다.

또 한 생애엔,

낙타를 타고 장사를 나갔는데, 세상에!

그대가 옆방에 든 줄도

모르고 잤습니다

명사산 달빛 곱던,

돈황여관에서의 일이었습니다.

 

 


 

 

윤제림 시인 / 가(家)

 

 

잡만한 도량이 또 있으랴

세상 먼저 티끌 모다 끌고 들어온

저녁, 식구들이 쉬는 동안

제일 많은 때를 묻혀온 나는

걸레를 빨자

낯짝을 씻어도 좋도록 희게

밥상을 훔쳐도 좋도록 말갛게

 

엎디거라, 온몸을 밀자

되도록 거룩한 맘으로

닦자, 또

닦자

 

설움도 죽이고, 분통도 삭이지만

대개는 반성의 뜻!

꿇어 엎뎌 온몸을 밀자

눈물을 몰래 떨구며.

 

 


 

 

윤제림 시인 / 세 가지 경기의 미래에 대한 상상

 

 

 올림픽 경기 중에 마라톤만큼 단조로운 경기도 없다. 신문 한 장을 다 읽도록 드라마 한 편이 끝나도록 같은 장면이다. 땀 얼룩의 일그러진 얼굴과 뜨거운 대지를 두드리는 나이키 운동화 아니면 검은 맨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이 경기의 미래를 의심 하지 않는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시 쓰기만큼 쓸쓸한 종목도 드물다. 시의 객석은 선수가족과 동창생들 몇이서 깃발을 흔드는 고교축구 대회장 스탠드를 닮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경기의 미래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섹스를 보라. 마라톤만큼 시쓰기만큼 단순하고 오래된 경기지만, 아무도 이 경기의 미래를 의심하지 않는다.

 

 외로우나 뜨겁기 때문이다.

 

 


 

 

윤제림 시인 / 가정식 백반

 

 

아침 됩니다 한밭식당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는,

낯 검은 사내들,

모자를 벗으니

머리에서 김이 난다

구두를 벗으니

발에서 김이 난다

 

아버지 한 사람이

부엌 쪽에 대고 소리친다,

밥 좀 많이 퍼요.

 

 


 

 

윤제림 시인 / 어떤 신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의견

 

 

 종이로 만든 관(棺)이 나온다지요. 반갑고 고마운 일입니다. 죽은 친구를 들고 산으로 올라가봐서 아는데요, 목관은 생각보다 무겁더군요. 값을 물어봐서 아는데요, 보기보다 비싸더군요. 종이로 만들면 가벼워서 좋을 것입니다. 가난한 상주들에게 좋을 것입니다.

 걱정스러운 것은 지질(紙)인데요. 제발, 종이컵이나 라면용기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만들어 주세요. 태우면 곱게곱게 하늘로 오르고, 묻으면 고분고분 흙이 되게요. 물에 지면 꽃잎 같고, 바람에 날리면 눈송이 같게요. 적어도 이 '사람 의 그릇'만은 일회용품 규제 대상에 포함되지 않게요.

 

 


 

윤제림 시인

1959년 충북 제천 출생. 인천에서 성장. 동국대 국문과 졸업. 1987년 《문예중앙》에 「뿌리 깊은 별들을 위하여」외 9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삼천리호 자전거』 『미미의 집』 『황천반점』 『사랑을 놓치다』 『그는 걸어서 온다』 『새의 얼굴』. 서울예술대학교 교수로 재직중. 21세기 전망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