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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전영미 시인 / 데칼코마니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2.
전영미 시인 / 데칼코마니

전영미 시인 / 데칼코마니

 

 

네가 내가 된다고 해도 끝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나도 그게 뭔지 몰라 나에게 다가간다

 

디딜 수 없는 빈 곳으로

표시되지 않은 방향으로 나를 내민다

나에게 가까워지려고

 

도화지에 물감을 발라 반으로 접어 눌러도

찍히지 않는 부분이 있다

옮겨지지 않는 내가 있다

 

가끔은 나도 모르는 내가 묻어 있을 때도 있다

읽을 수 없는 자국이 선명하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으로도 말해지지 않는다*

채워지지 않는 것들로 채운다

 

* 페터 한트케, 『관객 모독』

 

ㅡ계간 《시인시대》(2023, 가을호)

 

 


 

 

전영미 시인 / 마임

 

당신이 빈 것을 들고 내밀며

꽃이라면 그건 꽃인 거다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닌 거고

뿌리가 상하지 않게 화분에 잘 옮겨 심으라고 해

조심조심 흙을 덮는다

없는 화분과 삽을 들고서

꼭 치자꽃 향이 나는 느낌이 들어

웃음을 만들어 보인다

정말 진짜 같아

진짜 같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진짜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은 빈 것을 머리 위로 펼치고는

비가 온다고 한다

갑자기 우산 없는 사람이 되어

홀로 젖어 가는 기분이 든다

정말 진짜 같아

당신은 마지막으로 허공에 네모를 그린다

꽃과 화분, 우산이었던 것들을 쓸어 담고는

빈손을 펼쳐 보인다

길거리 공연이 끝나자 사람들은 가던 길을 간다

방금 전까지 있던 것들을 그대로 두고

 

 


 

 

전영미 시인 / 논픽션-다큐

 

아이들이 양 발목뼈로 공기놀이를 한다

살짝 떠올랐다가

차례로

떨어지는 혼백들

작은 손들이 쥐었다 놓을 때마다

흩어지고 굴러가는 영혼들

서로에게 받힌 뼈들이 이상하게 하얗다

죽은 뒤 다친 자리는 손 쓸 수 없고

차례를 바꿔

또다시 굴러왔다 흩어지는 영혼들

손등에 올라선 양들이

흔들리지 않으려고 발목에 힘준다

사라진 것들도 계속 버텨야 하고

여자아이 손 밖으로 빠져나간 뼈들

죽어서도 질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놀이가 끝나자 아이들은 제 뼈를 챙겨 일어난다

 

 


 

 

전영미 시인 / 배웅

 

 

당신은 집을 나선다

 

빈 새장을 열어 주고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고

아무것도 심지 않은 화분에 물을 주고는

깊은 밤 속으로

 

길가 버드나무가 잠깐 흔들린다

 

당신은

뒷골목을 지나 공원을 돌아 호숫가까지 걸아간다

 

슬픔아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 수 있지?

 

당신은 호수에 잠긴 수초를 오래 바라본다

물에는 앉을 데가 없다

 

당신의 귀가는

어제보다 더 늦을 것이다

 

 


 

 

전영미 시인 / 다시, 말레나

 

망가진 목소리로 탱고를 부르는 말레나*

말라 버린 장미를 다시 피우려 하네

갈라진 소리는 날아오르지 못하고

바닥을 긁거나 낮게 깔린 어둠 위로 떨어지네

빛에 치인 장미 이파리는 바스라지네

검은 가시 끝을 세운 채

두꺼운 어둠이 부드러워질 때까지

마른 꽃잎의 냄새가 연하게 퍼질 때까지

노래는 멈추지 않네

부서진 목소리를 한 번 더 으스러뜨리네

말레나가 탱고가 될 때까지

오래전에 죽은 말레나를 되찾을 때까지

어둠을 할퀴고 슬픔은 벌어지네

마른 꽃잎을 찢고 태어나는 검붉은 여인

또다시, 말레나

* Anibal Troilo의 노래 <Malena>

 

-2022 아르코문학창작기금(발표지원) 선정작 중에서

 

 


 

전영미 시인

1978년 경북 대구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문예창작과 및 同 대학원 졸업. 2015년《시인동네》를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