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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훈 시인 / 순간의 평화
잔뜩 부푼 풍선이 아이의 손에 들려온다 육이오 전쟁을 치른 퇴역한 비행기들이 전시되어 있는 공원을 평화롭게 넘실거린다 아이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은 어미뿐이다 아이의 아비는 보이지 않는다 넘실거리던 아이의 풍선이 비행기 날개에 걸려 흔적도 없이 터져 산산이 흩어진다 아이는 운다 공원에 봄꽃이 만발해 있지만 비둘기 떼가 아이의 주변에서 맴돌고 있지만 어미가 아이를 달래고 있지만 아이는 운다 비행기를 몰고 전쟁을 치르느라 아이 곁을 떠났던 아비 풍선을 만들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저 서러운 아이의 울음을 당장 그치게 할 수 있는 그 부푼 풍선을,
정세훈 시인 / 엄동설한
달동네 단칸 셋방 독거 할머니
달랑, 한장 남은 금이 간 연탄 부서질세라 조심조심 노끈으로 동여매시네
정세훈 시인 / 저런 게 하나 있음으로 해서
저런 게 하나 있음으로 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거지
아무 쓸모 없는 듯 강폭 한가운데에 버티고 선 작은 돌섬 하나
있음으로 해서,
에돌아가는 새로운 물결 하나 생겨난 거지
정세훈 시인 / 황소
황소에게는 우람한 몸과 힘이 센 뿔과 강건한 뒷다리와 그리고 성이 나면 무섭게 부라릴 줄 아는 눈과 그 무엇보다도 힘을 아무 곳에나 함부로 쓰지 않는 유순한 마음이 있다.
덩칫값을 하느라 웬만한 힘든 일에는 성내는 법이 없다. 해서, 일을 당하기가 일쑤다.
힘이란 덩치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 덩치란 것도 때를 맞추어 적절히 먹기도 해야 지탱해가는 것인데 시도 때도 없이 우매한 채찍은 일만을 재촉해온다.
배고픈 데엔 장사가 없어 배고프면 일단 눈이 뒤집히는 것이고 눈이 뒤집히다 보면 보이는 게 없고 보이는 게 없다 보면 도살을 당할 때 당하더라도
인심이길 거부한 채찍을 몸으로 밀어버리고 뿔로 받아버리고 뒷다리로 걷어차버리고 눈을 부라리고 마는 것이 이 나라 토종 황소다.
정세훈 시인 / 나를 시인이라 부르지마
나를 시인이라 부르지마 글 쓰는 사람이라 부르지마 그냥 노동자라 불러줘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 어릴 때 공돌이가 된 노동자라 불러줘
시인은 노래하지만 나는 노래하지 않아 이야기를 할 뿐이야
가난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한 여인의 남편으로서 두 자식의 아비로서
비빌 언덕이 없고 배움이 없고 빽이 없는 노동자가
이 한세상을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는지 그저 이야기할 뿐이야
나를 시인이라 부르지마 열심히 노동을 팔아 살아가는 노동자라 불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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