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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동균 시인 / 마돈나의 밤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2.
서동균 시인 / 마돈나의 밤

서동균 시인 / 마돈나의 밤

 

 

'Like a virgin!**

첫 소절이 화살촉처럼 소년을 관통한다

카세트테이프가 돌아가는

마돈나의 밤이

아마존 탐사대의 낯선 발걸음으로

사춘기를 버린다

 

툭툭 어둠을 쳐내는

정글도 같은 선율

열대우림을 헤쳐 나가는 불안이

디지니아 엑셀사 거목 아래

캄캄하게 뭉친다

 

24층 높이의 아파트 122개 동이

회색 숲을 이룬다

동과 동 사이에서 자라는 소나무

동글거나 뾰족한 가지는

위장한 아마존나무보아의 혀

 

수증기를 모아 비를 만든 숲처럼

분절된 그림자가

조각난 어둠을 잇는다

 

'fake love*를 듣는 남자

이어폰 줄이

허우적허우적 하얀 허물을 벗는다

 

* Like a virgin!' : 미국 팝가수 마돈나의 노래 제목

* 'fake love' : 한국 아이돌 그룹 BTS의 노래 제목

 

-《한국동서문학》 2019. 겨울호

 

 


 

 

서동균 시인 / 겨울 아침

 

 

기온이 뚝 떨어졌다

차 유리창엔 밤새 내린 눈이 쌓이다

제 체온에 녹아 꽁꽁 얼어 버렸다

알몸을 숨기려 눈을 수북이 받은 몸짓이

은근슬쩍 몸을 더듬는 와이퍼를 꽉 잡는다

 

눈치코치 없는 일이 벌어지는 아침

 

입김이 그대로 얼어 버린 날엔

어쩌면 좀 더 밀어 주기를

내심 기다렸는지 모른다

물을 흠뻑 뒤집어쓴 똥개가

부르르 떨며 물기를 털어 내듯

휭하니 불어 대는 바람이 눈을 쓸어내린다

포천댁 엉덩이를 만지던 손가락처럼

그가 톺아본 한밤의 흔적이

유리창에 자지러지게 남아 있다

 

무화과 껍질처럼 빨갛게 들킨 얼굴

혹한을 달구는 겨울 아침!

 

-첫 번째 낭송 앨범 I <가면 축제>에서

 

 


 

 

서동균 시인 / 재활용 수거차

 

 

한강로를 달리는 재활용 수거차에

염소의 흰 수염처럼 고드름이 자란다

골목을 굴러다니다 모여든 폐품들

쩌렁쩌렁한 양철 냄비가

찌그러진 확성기 소리를 뱉어 낸다

우당탕퉁탕 부서진 플라스틱 바가지며

흠씬 두들겨 맞아

쩌억 갈라진 나무 빨래판이며

어제는 촘촘했던 무가지(無價紙) 활자들이

산통을 깨고

딸랑딸랑 매달려 간다

과속방지턱을 지날 때마다

뚝뚝 부러지는 고드름

 

페인트가 벗겨진 트럭 한 대

햇귀를 밀어내며 발정하고 있다

 

-첫 번째 낭송 앨범 I <가면 축제>에서

 

 


 

 

서동균 시인 / 돌꽃

 

 

덕성여고와 풍문여고가 있는

감고당길을 걷다보면

조선희가 생각난다

깻잎머리를 하고 학교를 다녔을 법도 한데

본 적이 없다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지나가다 보면

삼삼오오 수다를 떨며

교문을 나오는 여고생들이 보인다

하루하루 정신없이 보내는 집사람에게도

이런 때가 있었겠지 하는 마음에

한 번 더 보게 된다

 

애 셋 키우는 그녀가

추리닝을 입고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던

여고시절을 같이 걷고 싶다

 

햇살이 돌꽃으로 담장에 밑든다

 

 


 

 

서동균 시인 / 낯선 혹은 익숙한

 

 

거리를 걷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익숙함이 강렬한 경계에 내려

무작정 걷는 거야

왠지 여자가 다가오면

어깨에 부쩍 힘이 들어가고

한동안 없었던 생물학적 충동에 대한

은근한 기대 아니면 기억

그녀가 있는 거리만큼 쏟아내지

마조히즘이나 사디즘에 대한

잔존하지 않는 향수는

낯설지도 익숙하지도 않지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행인과 심하게 부딪히는 것이

대열을 이탈한 개미처럼 잊히는

상상인지 모르지

철공소 담벼락에 버려진 철판에

밤이 빨갛게 찢어지고

문득 스치는 망각의 사이가

낯선 혹은 익숙한

 

-시집 <뉴로얄사우나> 파란출판

 

 


 

 

서동균 시인 / 봄

 

 

쉿!

 

봐봐. 움직이잖아

꿈틀꿈틀

개똥쑥 같은 그늘에서

초록 햇살을 품고 가는 애벌레야

 

 


 

 

서동균 시인 / 감자

 

 

왼쪽 팔뚝에 감자가 자란다

 

일곱 살 때 춘천에서

연탄 화덕에 감자를 구워 먹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덴 상처

 

땅속으로 들썩 파고드는

황갈색 땅강아지처럼

피부에 깊숙이 들어갔다가

조랭이 떡국 같은 물집을

몇 개 터트리더니

별 모양 감자꽃으로 피었다

 

날이 궂으면

땅강아지가 터앝에서

흙을 헤치고 올라 오듯

포슬포슬한 감자알이 꿈틀거린다

 

-시집 <뉴로얄사우나>에서

 

 


 

 

서동균 시인 / 환청

 

 

맞은편 숙소 테라스에

플라스틱 의자 두 개가 놓여 있다

바람 한 점 없는데

바람이 되려는 의자가 움직인다

등을 떠미는 반대편 관성

타일 바닥에 놓인 무게를 밀어낸다

자는 시간과 깨어 있는 시간의 구분이

모호해진 한 평의 공간

퍼붓는 장맛비에 흔적이 끌려간다

딱딱한 상실을 경험한 자들이

마주하고 섞인다

하얗게 혹은 캄캄하게 들리는 비명이

짙푸르게 깔리고

이름 잃은 별이 더 높아진다

 

-첫 번째 낭송 앨범 I 가면 축제

 

 


 

서동균 시인

1970년 서울에서 출생. 성균관대학교 경영대학원 졸업. 2011년 계간 《시안》 가을호에 〈옥탑방 빨랫줄〉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현재 한국금융연수원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