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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연희 시인 / 속살에 대한 명상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1.
조연희 시인 / 속살에 대한 명상

조연희 시인 / 속살에 대한 명상

 

 

바퀴벌레만 보면 그 적응력에 상처 내고 싶어

3억8천만 년 전에 출몰해

지독히 장수해온 종족이라기에

더욱 박멸을 결심하고 인정사정없이 뭉개보지만

간단히 갈색 분비물만 사정해버릴 뿐

그 모습을 고스란히 견디고 있는

저 망할 놈에게는 보드라운 속살이란 게 없나봐.

그러다 그만 그 생각을 하고 말았네.

속,살,에,대,해,서

 

세상 모든 것들은 어쩌면 속살을 보여준 만큼

노출면적만큼 상처받는 건지도 몰라.

그래서 속살이 없는 곤충이란 놈

수억 수만 년 동안 종족보존에 성공했나봐.

원유 웅덩이에서 화산천에서

심지어 다른 종족의 살 속을 뚫고서라도

악착같이 살아내는 놈들이라니

이 지상에 십억의 열 배쯤 된다는 곤충

인류 전체 무게의 열두 배나 된다는 곤충

지구가 멸망해도 잿더미에서 검은 더듬이를 흔들며

유유히 한 세기를 탈피해버릴 곤충들

속살이 많은 공룡이란 놈

바보처럼 몸피만 커다래서

한꺼번에 상처받고 일찌감치 모습을 감췄네

 

애벌레에서 번데기로,성충으로 진화할수록

말랑말랑한 속살은 퇴화돼 버린다는 걸

저 곤충들은 알고 있을까.

나이를 먹을수록 이유 없이 비만해져 가는

내 속살의 비밀을.

 

-시집 『야매 미장원에서』 중에서

 

 


 

 

조연희 시인 / 가변도로

 

 

새벽빛은 달콤하지 않다

빙판위에 비틀대는 도시 속에

축복인지 형벌인지

가름할 여유도 없이

달리고 있다

 

별들이 내리는 어둠은 달콤하다

세상은 돌아도, 나는 쉴 수 있다

누워도 앉아도 별반 다를 건 없지만

두 다리를 뻗고

신발은 벗었으면 좋겠다

 

얼마나 가야하는지

아는 이 아무도 없고

내가 만든 가변도로에서

숨을 가다듬고

질주 할, 그날을 위해

 

지금 나는 가변도로에 서 있다

 

 


 

 

조연희 시인 / 골목은 기억이다

 

 

신호체계로 묶여 있던 길들이 풀어지면서

골목은 시작된다.

대로에서 꿈틀꿈틀 빠져나온 샛길이

밥 냄새 따라 흘러 다니고

분리수거 되지 않은 추억이

툭툭 발을 걸어오기도 하는 곳

저녁마다 따뜻한 불빛으로 대문이 솟아오른다

꼬리가 긴 사람들이

구불구불 제 하루를 끌고 올 때도

골목은 오른쪽이나 왼쪽

어두운 모퉁이를 숨기고 있다

 

담벼락마다 노상방뇨의 청춘들

너덜너덜한 벽보 위에

시시껍절한 사연들을 덧바르는 게 삶이라고

긴 담이 위로워

집들은 골목을 만드는 거라고

 

이정표 하나 없는 낡은 골목은

꼬부랑 번지수여서

갈림목에서 자주 기억이 엉키기도 하지만

나는 오늘도 그 길을 찾아간다

 

골목 끝에 그대

막다른 그리움이 있어서

 

-시집 <야매 미장원에서>

 

 


 

 

조연희 시인 / 고도리

 

 

창밖에서는 쏴아 흑싸리 흔드는 소리가 들리고

그럴 때마다 얘, 누가 온 것 같아.

엄마는 2월 매화 열 끗 한 장을 집어들었다.

오빠가 집을 나간 건 기러기가 대이동을 하던 계절이었다.

팔월 공산의 세 마리 새처럼

그렇게 지붕을 넘어간 가족들.

 

나는 칠월 홍돼지처럼 날마다 무기력하게 누워 있었다.

정말 형편없는 패야.

철마다 매화 벚꽃 난초 모란 국화가 피어나는

카키색 군용 담요는 한때 우리의 정원.

우리 가족 다섯, 고도리처럼 다시 모여

함께 만두를 빚을 수 있을까.

그러나 삶은 뒤집어야만 볼 수 있는 패였다.

엄마가 찾는 패는 없는 게 아닐까.

언니는 왜 섣달 비쭉정이 같은 사내를 꼭 쥐고 있는 것일까.

 

얘, 누가 온 것 같아.

엄마는 끝나지도 않은 화투를 접으며 말했다.

열끗 중 한 개의 패가 내 아버지였지만

아직도 난 내 패를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조연희 시인 / 착한 목자와 삵꾼

 

 

1.착한 목자는 말 그대로 착하다.

삯꾼은 쫓겨나지 않으려고 착한 척한다.

 

2.착한 목자는 양들을 하나하나 잘 안다.

삯꾼은 양들이 다 똑같다고 생각한다.

 

3.착한 목자는 양들에게 관심이 많다.

삯꾼은 양고기에 관심이 많다.

 

4.착한 목자는 이리가 오면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삯꾼은 이리가 오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5.착한 목자는 우리 밖에 있는 가엾은 양들에게도 관심이많다.

삯꾼은 지금 있는 양들도 많다고 생각한다.

 

6.착한 목자는 양 냄새가 난다.

삯꾼은 돈 냄새가 난다.

 

7.착한 목자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

삯꾼은 잡아먹기 좋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

 

8.착한 목자는 어린 양을 어깨에 메고 험한 길을 앞장선다.

삯꾼은 양털 목도리를 어깨에 두르고 지팡이만 휘두른다.

 

9.착한 목자는 매일 매일 양들을 걱정한다.

삯꾼은 매일 매일 쉬는 날을 걱정한다.

 

10.착한 목자는 양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기도한다.

삯꾼은 양들이 얌전하고 말 잘 듣기를 기도한다.

 

 


 

 

조연희 시인 / 샛강

 

 

강의 허리가 굽은 것은

오랜 세월 보이지 않는 길을 돌아온 탓이다.

산비탈 숨어있던 길이

신작로로 흘러나와 최단 거리를 꿈꿀 때도

강은 여울목에서 또 한 번 제 속도를 꺾었다.

물살을 잡아당기는 이끼들

어쩌면 강물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기억들이 흘러가는 것이어서

강의 어귀엔 그토록 많은 갈대나 부들

모래알들이 서성대는 것일까.

강물 위로 직선의 포장도로가 달려가도

그리운 것들의 옆구리엔 삼각주가 있다고

강은 몸을 틀어 제 생의 굽이를

만들어 보였다.

한 번씩 몸을 비틀 때마다

쉼표 같은 물방울들이 무수히

태어났다.

저 강은 알고 있을까.

밤마다 내가 한 줄기 샛강이 되어

탯줄 끊듯 허리 꺾는 이유를.

 

-시집 『야매 미장원에서』 중에서

 

 


 

 

조연희 시인 / 야매 미장원에서

 

 

유난히 머리가 빨리 자라던 그해 여름

간판도 없는 미장원에 갔다.

예약도 없이 갔다.

낡은 마루에서는 덜걱덜걱 꽃들이 피고

봉충다리 의자에선 햇빛이 삐거덕삐거덕 졸고

 

거울도 없는 미장원에 갔다.

당신은 늘 그렇게 ‘야매’로 왔으므로

무면허 미용사는 이빨 빠진 가위로

내 덧없는 그리움의 길이를 가늠했다.

근심처럼 손톱과 발톱이 자라고

더러 잘못 자른 머리로 목덜미가 더 길어지기도 했다.

 

나팔꽃 씨방 같은 미장원에 갔다.

 

파마약 냄새가 넝쿨인 양 머리 위에서 구불거리고

골방에선 서둘러 까만 씨앗이 되는 꽃들.

 

당신은 속성으로 붉어지는 노을이었다.

 

-시집 『야매 미장원에서』 중에서

 

 


 

 

조연희 시인 / 샛강

 

 

강의 허리가 굽은 것은

오랜 세월 보이지 않는 길을 돌아온 탓이다.

산비탈 숨어 있던 길이

신작로로 흘러나와 최단거리를 꿈꿀 때도

강은 여울목에서 또 한 번 제 속도를 꺾었다.

물살을 잡아당기는 이끼들

어쩌면 강물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기억들이 흘러가는 것이어서

강의 어귀엔 그토록 많은 갈대나 부들

모래알들이 서성대는 것일까.

강물 위로 직선의 포장도로가 달려가도

그리운 것들의 옆구리엔 삼각주가 있다고

강은 몸을 틀어 제 생의 굽이를 만들어 보였다.

한 번씩 몸을 비틀 때마다

쉼표 같은 물방울들이 무수히 태어났다.

저 강은 알고 있을까.

밤마다 내가 한줄기 샛강이 되어

탯줄 끊듯 허리 꺾는 이유를

 

 


 

 

조연희 시인 /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도화동 뒷골목 허름한 시계방에는

살바도르 달리의 휘어진 시간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다.

아침10시부터 백발이 성성한 주인은

확대경으로 일그러진 시간을 들여다본다.

멈춘 시침과 분침 사이에 웅덩이가 있다.

기억은 말단비대증 환자여서

6개월 전에 주문해 놓은 짜장면 위로

시간의 날파리들이 날아다니고

3년 전에 죽은 시동생이 군화 끈을 매고 있다.

눈치 없는 개나리는 아무 때나 꽃술을 열고

텅 빈 괘종시계에선 뻐꾸기 대신 증조할아버지가

아가야,아가야…자꾸 모가지를 내민다.

할아버지 전 도플갱어인걸요.

살비듬 같은 햇빛이 날리는 거리

한 때 내 머리카락이며 손톱이었던 것들이

둔갑을 서두르며 문지방을 넘어가는

 

이상한 너무도 이상한

 

 


 

조연희 시인

1966년 경기도 가평에서 출생. 1989년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2010 《시산맥》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야매 미장원에서>. 현재 영상기획 및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빅시스템즈 기획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