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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기 시인 / 울음 나무
울음으로 꽉 찬 나무는 산 겨울 땡땡 얼어 폭설 세차게 치고 고드름 속 헤집으려 해도 안을 열지 않는다
한 올 실로 직조된 저마다의 슬픔은 서릿발 이파리를 내었다 거두고 꽃을 피웠다 꺼트린 모닥불처럼 금세 추워진다
추우면 스스로의 비하와 열등감이 밀려든다 아무 소용 없는 감정에 의하여 단단한 외피를 만들어 안의 상처 난 옹이를 숨기고 둥근 나이테를 만든다
잘 나고 이쁜 것들은 이렇게 많은지
힘껏 문 울음을 한 보따리 풀어놓고 싶다 봄이 올 때까지 천천히 자기 울음을 녹인다
심우기 시인 / 신성한 숲
나무가 되느니 커다란 숲이 되겠어 사라진 당신이 돌아와 머물도 록 함께 떠났던 나뭇잎은 언젠가 돌아와 다시 피어나겠지 비록 늙어 알아볼 수 없어도 눈멀고 귀먹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느낄 거야 혼자만의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게 다시 나에게로 묻는 질문과 대답 속에 숲은 자라 더 무성해지겠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뻗어나간 이름 모를 길을 따라가다 막다른 길이 되기보다 작은 연못 하나 품은 숲이 되겠어
심우기 시인 / 호박잎 그늘을 사랑하네
커다란 호박잎 그늘을 사랑한 것이 개미만은 아니었네 가난한 시인도 호박잎 그늘을 사랑하네 먼 산과 바다로 갈 형편이 못 되는 시인은 마을 텃밭 울타리에 올라온 호박덩굴을 개여울 지나는 줄기 끝 호박잎 그늘을 사랑하네 돌쩌귀에 걸친 해거름을 발끝으로 툭툭 치며 놀다 등 뒤를 미는 노을에 마지못해 웃으며 앞길을 비춰주는 낮달에 이끌려 나오네 가난한 시인에게 당연 가난할 수밖에 없는 아내와 떡잎 같은 아이들 있는 집으로 돌아가네 호박잎은 무럭무럭 커가고 그늘은 그늘을 사랑할 줄 아네
심우기 시인 / 아름다운 독毒
최후의 독毒은 나 자신을 위해 남겨둔다
악은 악으로써 없앤다 독은 독으로써 죽인다
눈을 부라리며 악을 쓰며 빠져든다 낮술에 벌건 사람처럼 꽃술에 취한 벌들이 온다
베인 상처는 끈적하다 강한 자도 아름다운 자도 일단 빠지면 헤어날 수 없는 매트릭스 하얀 액즙이 방울져 떨어진다
시야를 몽롱하게 하는 붉은 꽃 이파리 속 노란 꽃술 연체의 뼈와 근육으로 흐느적 녹인다
태양을 삼킨 양귀비 열기가 높으면 높을수록 짙어지는 붉은 화장 삼키면 죽음도 멈추게 하는 독毒
벌어진 상처를 꿰매는 액즙이 피를 삼켜 고통을 묽게 한다
내 몸엔 저런 즙이 흘러나오겠지
한때 독毒이기도 하고 약藥이기도 한
삼킬 것인가 뱉을 것인가 아름다운 독毒
심우기 시인 / 홍방울새와 개똥지빠귀가 무슨 말을 나눌까
보리수 다 떨어지고 이파리 짙어지면 이파리 사이 숨어있던 홍방울새와 개똥지빠귀가 서로 안부를 묻지
너는 마음 어디까지 닿아 내려 보았냐고 정박하지 못한 영혼을 입에 물고 아무도 닿을 수 없는 깊은 바다에 던져 버렸다고
그렇게 한철 여름은 폭염으로 가고 말라비튼 나뭇가지만 바스락대는 숲 속에 길을 잃고 눈먼 새 되어 공중의 하늘을 거꾸로 날다 보면 나는 너의 웃음을 듣고 너는 나의 울음을 듣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동기들과 부화하지 못해 둥지에서 떨어져 죽은 슬픈 이야기가 바닥의 세상에선 소문처럼 떠돈다지
나귀와 노새의 만남처럼 그렇게 아무렴 우리의 밀담 같을까 아무도 너와 나의 노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야
심우기 시인 / 잎들
전봇대가 울고 있다 대낮 아무도 없는 벌판에 서서
검은 나무 전봇대에 앉은 쇠딱따구리하늘로 날지 않는 까닭은 불가역과 불통의 모르스부호 한바탕 소동 일으키기 위해나무 이파리를 흰 종이 위에 두고 두드린다 이면에 배어나는 빛깔푸르거나 누렇거나 붉은가장자리를 두드릴 때 옅은 슬픔이 묻어나고잎맥과 잎맥 사이응축되었던 눈물샘 터진다
두드린 귓속에서 바퀴가 굴러 나오고 읽어 내지 못한 말소리가 배어 나온다
검은 종이에찍힌 흰 자국은 까마귀의 밀어 어쩌다 놓친 돌덩이가자기 발등을 찍어 핏빛 어린 발자취를 지상에 남기려나
전봇대가 싹을 틔우고 죽음을뒤엎고 잎들이 비집고 나온다면 펼쳐보면 울긋불긋한 해독하려 애써도 소용없는 전봇대의 저 울음처럼
심우기 시인 / 콩나물
흰 행주를 걷으면
물음표로 가득한 얼굴들이 빼곡하다
호기심을 문 얼굴 새로움으로 빛나는 얼굴들선생님이 몇 번을 말하지만 너에겐 모두가 처음아무 것도 몰라요왜 그래야 하는지당연은 뭐고 불법은 뭐죠거룩한 성직자가 엄숙히 선포해도
신은 무엇이고 귀신은 무언지요죽음은 무어고 왜 살지요행복한가요
꿈은 뭔가요 묻지 마세요 그런 것도 몰라요하루가 즐거우면 좋아요배 부르면 쭉쭉 자라고
미지로 가득한 세상
저는요 맹물만으로도 살 수 있어요
심우기 시인 / 아름다운 독毒
최후의 독毒은 나 자신을 위해 남겨둔다
악은 악으로써 없앤다 독은 독으로써 죽인다
눈을 부라리며 악을 쓰며 빠져든다 낮술에 벌건 사람처럼 꽃술에 취한 벌들이 온다
베인 상처는 끈적하다 강한 자도 아름다운 자도 일단 빠지면 헤어날 수 없는 매트릭스 하얀 액즙이 방울져 떨어진다
시야를 몽롱하게 하는 붉은 꽃 이파리 속 노란 꽃술 연체의 뼈와 근육으로 흐느적 녹인다
태양을 삼킨 양귀비 열기가 높으면 높을수록 짙어지는 붉은 화장 삼키면 죽음도 멈추게 하는 독毒
벌어진 상처를 꿰매는 액즙이 피를 삼켜 고통을 묽게 한다
내 몸엔 저런 즙이 흘러나오겠지
한때 독毒이기도 하고 약藥이기도 한
삼킬 것인가 뱉을 것인가 아름다운 독毒
심우기 시인 / 새들의 저녁
저물녘의 새들이 노을을 쪼고 있다 강이 흘려보낸 생을 고개 숙여 반추한다 산들은 침묵의 불 밝히고 다 뜯긴 노을은 산 너머로 가라앉는다 시간의 바퀴에 휘감긴 물뱀 몸이 찢겨도 그의 본성을 잃지 않는다 죽어도 한번 문 것을 놓지 않는다 새들은 날며 먹지 않는다 저녁을 태우는 솔가지 연기가 시끄럽던 새소리를 재운다 서서히 길을 지우는 정적 어둠이 새 귀를 막는다 느리게 움직이는 눈동자 환영처럼 출몰하는 빛 역류의 강을 따라 침식하는 이포 둑 일렁이는 침전물 새들이 낮게 난다 세상에 부유하는 것들을 물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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