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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영 시인 / 시작하는 사람
이곳의 침묵은 축축해서 오랫동안 곰팡이 피었다 멋진 풍경이야 이사 온 사람이 한동안 호수를 바라본다 어깨 맞대고 있는 가시나무들 품느라 붉어지는 호수
안개꽃으로 피어오르는 잉어들 가시나무뿌리 헤집고 알을 낳고 있다 호수를 저수지라고 부를 때 지키지 못할 약속처럼 조금 더 어두워지는 십이월 저녁이고 비가 내린다
바가 오네 빗줄기 속에서 빗줄기 하나를 내 것이라고 정한다 아무도 거기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오래된 결탁 그곳에선 아무도 빠져나간 적이 없다
내 것이 다른 것과 섞여 저물도록 일렁인다 빗줄기 하나가 흩날리다 공중에 그대로 있다 축축해진 빛과 어둠의 실을 손끝에 쥐고 그물을 짠다 시작인 어둠과 끝인 빛의 그물*
손톱이 닳아지도록 그물 짜느라 여름이 가고 겨울은 오는데 이제 정한 바 있는 내 것들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곳으로 비를 불러오는 것이다 구멍마다 빠져나가는 어둠
지키지 못할 약속들이 아직도 지상에 닿지 않은 채 그곳에서 여전히 그물을 짜고 있다
* 최정례 시집 제목
권오영 시인 / 궁리
이상한 새가 며칠째 눈 위에 앉아 있다
산 그림자를 쪼아 먹는 새는 끄덕끄덕 바닥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베란다 유리로 내다보는 산은 새를 품기 위해 그 자리에 오래 있어 줘야 할 것처럼 보인다
사흘째 눈 내리던 날 골똘히 앉아 자신의 깃털을 뽑는 새에게 궁리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나는 너를 여기서 바라고 있을 거야 궁리를 생각하고 그 생각을 지키기 위해 궁리와 여기 사이에 거리를 두었다 거리를 두는 동안 거리감을 느낀 궁리도 여기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궁리가 번역되지 않은 문장으로 읽혔지만 끄덕끄덕 푸드득 콕콕만으로도 의미를 알 수 있었고 그런대로 소리와 몸짓만으로도 내용이 이해되었다
읽혀지는 방식이 서툴렀을 때의 궁리는 내가 아는 새들이 아니었으므로 이상했고 신비로웠고 날마다 궁금해졌다 누군가가 이상한 새를 품기 전 품어 버린 궁리가 여전히 끄덕이고 있다
품는다는 것은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바라보는 일이라는 것을 지금에야 알았다
궁리는 그 자리에 나는 여기서 궁리를 생각한다
권오영 시인 / 조령고개
혼자만의 부귀와 명예보다 식솔들의 꿈과 희망을 괴나리봇짐에 가득 담아 넘나들던 고갯길 금의환향의 기쁨소리는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데 발걸음 떨어지지 않는 낙방귀향길 어깨에 짊어진 봇짐은 바위보다 무겁구나. 사나이들의 눈물과 회한이 조령골짜기 곳곳이니 시린 겨울바람보다 더 아프게 가슴을 때리는구나. 무거운 돌과 큰나무와 함께 그들의 애환도 자라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피부로 느껴지는 것이 우리에게 하고픈 말이 있는가 싶다.
권오영 시인 / 서해
진흙 벌의 연대를 보는 시선이 바위에 흔적을 남긴다 물은 천 년 후 커튼 뒤에서 연체동물과 갑각류의 장식을 새겨 출력할 자세다 추위에 얼면서 바다 너머로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본다 사람이라곤 찾아 볼 수 없다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일기장에 년. 월. 일 대신 지금, 여기, 서해라고 기록할 참이다 별이 베개 밑으로 파고든다 별의 은유는 물컹이거나 딱딱한 이미지로 바닥에 붙어있다거나 흐물거리며 기고 있는 것으로 기록된다 거꾸로 써 내려가는 일기에 꺽이지 않는 바람과 나선형의 푸른 하늘, 흐트러진 머리카락, 어둠침침한 빈 방들이 연속적으로 기록된다 아침 페이지에 지난 해, 그늘이 추운 하루, 아무것도 찾으려 애쓰지 않은 어느 날, 이라고 적는다 이쯤에서 다리를 뻗거나 어깨를 감싸 안는 당신의 팔 둘레에서 기침으로 솟구치는 밤이 온다 등을 보이는 겨울 바다는 아무도 말할 상대라곤 없는 입술을 가지고 중얼거리리라 안녕히주무십시오
꿈은 자주 깨졌으므로 기억은 뾰족하다 그리고 기억은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가르친다 들여보내라 추위는 너를 길러주고 손가락들을 녹이기 위해 손가락 사이에 펜을 끼워넣는 법을 가르쳐 줄 테니 겨울새들이 진흙 벌에 발자국을 찍는 법을 가르쳐 줄 테니 물의 젊음을 전송할 테니 기록하라
페이지와 무관한 일기는 계속된다
권오영 시인 / 아직 지하다
사람들 계단 밑으로 흘러들어 간다
흐르는 지하도 팬티와 브래지어만 입은 마네킹 뚫어져라 쳐다본다 발목 잘린 마네킹 앞 지나간다 상점마다 미끌거리는 유리 무럭무럭 자라는 다리들 울창한 모래 사은품 행사장앞 오천 원에 준다는 요술 텐트들 삼 초 만에 펴지는 지붕들 버섯처럼 솟는다
맴맴 나타나는 모퉁이들 지갑과 벨트와 가방이 햄버거와 김밥이 오뎅과 떡볶이가 군침 도는 것들 허기져 핸드폰과 목걸이와 반지와 꽃과 애인이 애인과 손을 맞잡고 오가는 데 대낮처럼 환한 지하 출구를 못 찾는 쥐처럼 들락거렸다
화서역 방면으로 나왔는가 하면 오산 방면 출구를 찾아 나오면 애경백화점 회전문 오래도록 그 속에서 맴돌다 얼굴 내밀 때마다 정수리를 꽝 꽝 들어가 들어가 내리치는데 거품처럼 그것 빨리 사라졌다
계단 밑 저 아래 콸콸 만능의 심장들 흘러간다
권오영 시인 / 얼음치마
벌써 녹기 시작하네 그녀
그의 손으로 백만 번 조각된 얼굴 입술 사이로 사각사각 공기를 갉아먹는 이빨 금세 자라지
그녀를 그리다 지우고 지우다가 다시 그려대는 힘줄 구불구불한 손이 흰 드레스를 입히고 백합꽃 한 아름식 안겨주지
딱딱한 그녀 단단한 그녀 미끄러운 그녀 차가운 그녀 점점 짧아지는 키에 맞춰 관을 찌곤 하지
줄어드는 그녀 일주일 동안 잠만 자는 그녀 녹았다가 흐르다가 스며들다가 꽝꽝 얼음이 되고 마네
후들거리는 손에 끌과 정을 들고 얼음 얼굴 얼음 가슴을 만들다 제 손들 찍고 마는 알코올중독 조각가
툭툭 불거진 그의 혀로간 속으로 초점 없는 눈동자 속으로 흘러드는 그녀는 수천 개 얼음 조각
입자마자 사라지는 치마를 매일 뒤집어 입는 그녀
문을 열 때마다 얼룩만 남아 있지
권오영 시인 / 계속되는 단추
핸드폰 속으로 물이 흐른다 물소리를 내는 여자가 흐느낀다 핸드폰을 귀에 댄 채 24시편의점 처마 밑에서 있다 그녀의 계곡으로부터 흘러온 물은 고여 있다가 한꺼번에 쏟아져 콸콸 흐른다 오른쪽 얼굴이뜨거워진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비밀이 유유히 흐른다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알 수 없는 질문으로 오른손이 축축하다 그녀의 물줄기에 대해 오랜 세월 영원히 열어 보인 물의 귀에 대고 말한다 자신의 그림자를 끌고
그러니까 내가 대답을 하고 그녀가 대답을 하는 사이에 있던 질문들은 잘못 끼워진 단추를 들여다보고 추적해보는 궤적의 방향 같은것이다 이제 반성하는 습관을 버리면 된다는 거기와 여기가 철철 흐르고 있다 또다시 울리는 그녀의 진동 한 손에는 우산 한손에는 핸드폰을 쥔 채 나는 물줄기를 따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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