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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영 시인 / 갑사의 가을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1.
손영 시인 / 갑사의 가을

손영 시인 / 갑사의 가을

 

 

이곳으로 몰려든 가을이 다투어 익어간다

햇살에 익어가는 나뭇잎들

얼굴이 더 선명해졌다

현란함에 질린 산그늘

제 할 일도 잊은 채 한쪽에서 주춤거린다

색 고운 가을이 포개어진 산자락으로

바람은 쉼 없이 들락거린다

몇 개의 마침표를 매단 감나무

까치 몇 마리 꼭대기에서 맛을 읽는다

 

春마곡

秋갑사 이름표를 흔들며

단풍나무 환호가 산 아래까지 쫓아왔다

가을을 삼킨 계룡산이

울컥, 비명을 지른다

 

 


 

 

손영 시인 / 목소리

 

 

지루한 우기

장마에 지친 물비린내가 도로까지 흘러나온다

젖은 잎사귀들 어깨가 한껏 접혔다

폭우가 내리는 밤

잠 속까지 빗소리가 들락거린다

비의 감정과 목소리 톤을 결정짓는 강수량과 착지점

굵은 목소리로 마을 어귀부터 흔들던 소나기

지면의 탄성을 고르느라 분주하다

 

공손한 풀잎들 비를 받아들이고

양철지붕은 되받아친다

길가에 늘어선 포플러가 움찔, 목을 움츠린다

 

상대방의 말에 결정되는 내 목소리

건너오는 퉁명함에

예전의 나긋한 목소리를 잃고

아이에게 철판 두드리는 소리를 내질렀다

 

 


 

 

손영 시인 / 그 봄을 찾습니다

 

 

창문에 턱을 괴고 봄볕에 졸고 있는 고양이

문지방 건너오는 갸르릉대는 소리

나무수국 연초록 새순 내미는 소리

분홍 벚꽃잎 바람에 떨리는 소리

목련 꽃망울 벙글어지는 소리

 

그때 나는 연초록이었어요

한창 물 오른 봄

목련꽃으로 벙그러지고 있었지요

분홍 물감 듬뿍 찍은 붓 들고

막 채색을 시작하려는 때였어요

 

4월의 때 이른 더위

봄꽃은 짧게 얼굴을 내밀더니

신혼 단칸방에 사는 딸네 집에 온 친정엄마처럼

보따리 보따리 봄을 부려 놓고

그렇게 분홍은 서둘러 가버렸습니다

 

나뭇잎은 초록으로 무성해져가고

놓쳐버린 막차를 기다리던 때처럼 망연했던

영원히 여름 뒤란으로 사라져버린 그 해의 봄

잃어버린 그 봄을 수배합니다

 

 


 

 

손영 시인 / 해바라기밭

 

 

계절의 패잔병들 고개를 푹 숙였다

 

출렁이던 황금 갑옷은 빛을 잃고

칙칙한 몰골로 끝없이 늘어선 중대

바래고 해진 추레한 군복 걸치고

빈 들녘에 줄지어 서 있다

 

태양이 겨냥한 과녁은 저 해바라기

폭탄처럼 쏟아지던 햇살의 투하에도 묵묵히

전선을 지키듯 자리를 지켰다

태양을 따라가며 흔들던 노란 깃발

햇살의 탄알이 여문 씨앗들로 박혀있다

 

늦가을 들판

눈을 감은 채 해바라기 밭에 묶인 포로들

목을 버려야만 그 자리에서 벗어 날 수 있을까

모두 고개를 떨구고 입을 닫았다

 

뚝뚝 포로들의 목을 따는 해바라기밭 주인

포획한 모가지를 차에 싣고 유유히 사라진다

 

-시집 <공손한 풀잎들> 2015

 

 


 

 

손영 시인 / 제품 사용설명서

 

 

벼르고 벼르던 명품 카메라를 구입했어요

꼼꼼하게 사용설명서를 읽어 본 다음

머릿속에 기억을 저장하고 셔터를 눌러 보았어요

단계별 작동으로 안심하듯 풍경을 복사해 주네요

 

예고 없는 폭우는 사용설명서가 없나 봐요

건물을 흔들고 나무 둥치를 뽑아도 어찌 할 도리가 없어요

어느 날 만난 사랑도 충동구매를 해버렸지요

설명서를 읽지 않고 서로를 구입하여

오랫동안 작동법을 망각하고 살았어요

가끔 소통이 안 될 때 한쪽 어깰 툭툭 쳐주면

깜빡 전원이 들어와

밥도 짓고 청소도 하고 구겨진 마음을 펴 주었어요

오늘도 낡은 기계로 변함없이 궤도를 도느라

삐거덕거리는 소음이 거슬려요 방치된 건 아닌가요

깊은 고장에 수리점을 들락거려도

어떤 슬픔이 바닥에 고였는지

확인도 수정도 없어 자꾸만 탈이 납니다

 

오래전 그때 딸려 온 제품설명서

이제라도 꼼꼼히 탐독하고 싶어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아요

 

 


 

손영 시인

경남 진해 출생. 마산교육대학 졸업. 『시인정신』으로 등단. 부천 신인상 수상. 부천 예술 공로상 수상. 2014년 인천문화재단 문화예술지원금 수혜, 시집 『공손한 풀잎들』. 현재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