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중식 시인 / 자유종 아래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2.
김중식 시인 / 자유종 아래

김중식 시인 / 자유종 아래

 

 

가죽나무 타고 넘어 들어갔던 서대문형무소

왜식 목조건물 사형장은 나의 놀이터였지

도르래에서 밧줄을 끌어내려 목에 걸었지

축하해, 젊음의 교수형을 집행하는 화환花環

목의 때와 살갗과 육즙으로 엮은 비린 동아줄

미친 시대가 하필 우리의 전성기였으므로

돌아버리지 않아서 더 돌아버릴 것 같았던

속으로 화상火像 입은 청춘이었으므로

유언이래야 "할 말 없다"는 것이었지, 개로

태어나더라도 늙은 개로 태어나고 싶었지

짖지 않는 개로 태어나고 싶었지, 덜컹

발판을 열면 다리가 뜨고 혀가 나오겠지

죽을죄는 없고 죽일 벌만 있을 뿐, 발아래

컴컴한 식욕을 날름거리는 콘크리트 지하실

나는 뛰어들었지, 귀 막고 입 다물며

나는 뛰어들었지, 다시는 젊지 말자고

 

 


 

 

김중식 시인 / 스키드 마크

 

 

이번 삶은 늦었어.

급제동하는 순간

당신이 옳았다

 

당신은 늦었다

낮술에 취하든 졸았든 그이를 생각했든

뱃가죽으로

아스팔트를 움켜쥔 채

두 획

혈서를 쓴 거다

빗길에서도 한 호흡에 폐를 채우는 타이어 타는 냄새

 

외눈박이 가로등이 ㄱ자로 허리 굽혀

하직 인사를 하지

길이 아닌 것도 아닌데

앞만 보고 죽어라 달린 것도 아닌데

자꾸 미끄러지는 삶

이번 생은 늦었다

당신이 옳았다

 

 


 

 

김중식 시인 / 아직도 신파적인 일들이

 

 

한 여인의 첫인상이 한 사내의 생을 낙인찍었다

서로 비껴가는 지하철 창문

그 이후로 한 여인은 한 사내의 전세계가 되었다

우리가 순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한 사내의 전세계는 순식간에 생겼다

세계는 한없이 길고 어두웠으나

잠깐씩 빛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웃을 때는 입이 찢어지고

울 때는 눈이 퉁퉁 붓던 한 사내

그러나 우리가 순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한 사내의 전세계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표정의 억양이 문드러지고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밤과 낮의 구별이 없어졌다

 

과연 일부러

도대체 일부러 한 여인이 한 사내의 세계를 무너뜨렸겠는가

자기도 어쩔수 없이, 혹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그런 말을 믿는다면

우리는 아무도 미워할 수 없으리

한 사내는 한 여인을 용서하였으니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는 죽음을 직시하게 되는가

 

이제 한 사내는 한 여인의 창가에 있다

닫힌 세계는 그 스스로 열어보이기 전까지는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다

한 사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웅얼웅얼거리며 혼자서

한 여인과의 모든 대화를 끝냈다

깜짝 놀라 공기총 방아쇠를 당겼다

한 여인의 첫인상이.

 

-시집 『황금빛 모서리』에서

 

 


 

 

김중식 시인 / 지구온난화

 

 

소나기에 실려 온 올챙이며 치어들이

공터 웅덩이에서 놀고 있는데;

놀던 데가 아니네?

물이 쫄아들면서

두부 속으로 파고든 미꾸라지처럼

여기는 진흙 사우나네?

 

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서로가 서로를 혹사하는 삶이

더(러)워지는 느낌

 

길이 놓여도 멀리 가지는 말라고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경고를 먹고도 근신하지 않은 내 책임이지만,

 

작은 별의 한 뼘 텃밭에 씨 뿌리는 것은

풀이나 꽃, 눈이나 비처럼

여린 것들이

대륙을 씻어낼 때가 있기 때문

 

바람 한 줄기가

손등으로 지구의 이마를 식혀주는 것처럼

한 지붕 아래 살지 않아도

한 하늘 아래 그저 건강하기를

열받지 말고

 

- 시집 <울지도 못했다>

 

 


 

 

김중식 시인 / 가까이 가려면 천 개의 강을 건너야 한다

 

 

나는 놀란다

대학 선배에게 전화번호만 일러주었는데

매주 노동자신문이 배달되고 있다

아니 이럴 수가

신문 읽는 데 십 분밖에 안 걸릴 수가

책 소개란에서 [조직노선 3]을 보았을 때도

아니 그럴 수가

그런 책이 삼까지 나오다니

노동자신문이 일년 넘게 버티고 있다니

하기는, 내가 없어도 달은 뜰 것이다

나는 그만큼 멀리 있고

가까이 가려면 천 개의 강을 건너야 한다

강 건너, 건너 건너에서 손짓하는 선배에게

미안하지만

면죄부를 사는 기분으로 구독료를 보내면서

선배가 원하는 내가 아니라 구독료가 아닐까 하는 의심

그렇구나

나는 첫번째 강가에서 손만 씻고 돌아온 셈이다.

 

 


 

김중식 시인

1967년 인천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1990년 《문학사상》에 「아직도 신파적인 일들이」 등 몇 편의 작품이 추천되어 시단에 등단. 현재 『경향신문』에서 근무하고 있다. 시집 『황금빛 모서리』 『울지도 못했다』가 있음. 산문집 『이란-페르시아 바람의 길을 걷다』,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