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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덕기 시인 / 획일성에 대하여
네모난 아파트 공간에서 생활하고 네모난 스마트 폰으로 세상소식을 접하고 네모난 책상 앞에 앉아 네모난 컴퓨터로 세상과 소통한다
똑같은 얘기들이 떠도는 단톡방에서 사연을 읽고 똑같은 포장음식을 사다 식사를 해결하고
유행하는 얼굴 모습으로 성형하고 유행하는 화장과 머리모양을 하고 유행하는 옷을 입고 유행하는 줄인 단어로 암호처럼 말하며
지루하고 단조로움을 퍼트리며 거리를 걸어간다
개성은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다른 사람 흉내 내는 무뇌형 로봇들이 길거리를 활보하며 걸어간다
-애지 사화집 <멸치, 고래를 꿈꾸다>에서
임덕기 시인 / 비둘기의 맨발
버스정거장 어디선가 훌쩍 날아온 잿빛 비둘기 한 마리
꽁꽁 언 발로 얼음 위를 걷는다 발이 빨갛다, 맨발이다
땅에 떨어진 과자부스러기 눈을 두리번거리며 부리로 콕 쪼더니 찬바람에 부스스한 날개 움츠리고 걷는다
해질녘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시린 발을 동동거리며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저 작은 몸 하날 버티는 꽃잎처럼 여린 비둘기의 맨발 모두들 자기일인 양 말없이 내려다본다
임덕기 시인 / 시인들의 기도
시인들이 내뱉은 말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허투로 던진 가벼운 말은 허공에 날아다니다 부딪혀 생채기를 만든다
장마철 질척해진 습기로 해묵은 상처가 덧나면 마당에 바지랑대를 높게 세워 볕 좋은 날 빨랫줄에 펼쳐놓는다
더께 진 아픔은 하얗게 바래지고 눅눅한 물기는 서서히 말라든다
불빛에 모여드는 하루살이 떼처럼 찰나를 영겁의 시간으로 여기며 허둥지둥 살다 떠나는 이들을 위해 시인들이 기도하게 하소서
웅얼거림으로 표출한 나지막한 기도는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온기가 되어 책 속에 오래도록 저장된다
-《시와 종교> 2023년
임덕기 시인 / 소리 잠을 베고 누우니 초침소리가 살아나 꿈틀거린다 낮이 시동을 끄는 순간 어둠 속에서만 그들은 생기가 돈다 쉴 새 없이 피가 돌고 맥박이 뛰는 소리 재깍, 재깍, 재깍··· 그들에게 허기란 없다 집어삼킬 수 있는 시간은 마냥 태어난다 어느 틈에 벽걸이 시계와 자명종과 손아귀에 들어온 손목시계 가족을 이뤄 삼각 꼭짓점에 앉아있다 시간에게 소멸은 없다 화음을 맞추며 그들은 오늘도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시집 『꼰드랍다』 2014. 지혜
임덕기 시인 / 태생적 밤벌레
꽃타래 속에 알을 슬어놓고 어두운 성곽 안에 가둬놓고 혹독한 확률게임에 생존을 맡긴 채
때를 기다려 밖으로 나오라는 말만 남긴 채 어미는 떠나갔다
매듭진 시간이 끝날 무렵 자양분이 되어줄 속살을 파먹고 웅크리고 자다가 껍데기만 남긴 채
세상 밖으로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예식장에서 환하게 웃는 젊은 커플 그들 속에 들앉아 있는 태생적 밤벌레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느라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허둥거린다
어긋난 발로 문턱에 걸려 넘어지기 전까지 기름진 약속과 만찬의 시간은 유효하다 달그림자 지고 탐색전이 끝날 무렵이면
자기도 모르게 울타리 밖으로 걸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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