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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목 시인 / 고향 열차
그저 주머니에 담배 한 갑이면 좋다. 가고 오는 왕복 기찻삯에다 출출하면 사먹을 한 그릇 국수값이면 족하다. 거칠 것 없이 가난한 몸을 싣고 겨우내 웃자란 볼그라니 생각들일랑 봄바람에 훌훌 털어 떠날 일이다.
창쪽 자리면 더욱 좋다. 달려드는 산이며 물이며 들길 따라 오므라든 숨구멍을 마음껏 벌름대련다. 따스한 햇살에 졸음이라도 내려 차창을 베개 삼아 꾸버꾸벅한들 누구하나 뭐랄 사람도 없잖나.
고개 들어 휙 하니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가 낯익은 말투, 옷차림, 얼굴 표정들. 덥석 손이라도 잡아끌고 싶어진다. 고향으로 가는 열차 안에는 벌써 고향 마을 흙냄새며 고향 사람 살냄새가 흐드러진 들꽃처럼 피어오른다.
윤중목 시인 / 부럼
음력 정월 대보름날 아침 부스스 잠에서 깬 나에게 아내가 호두 두 알 쥐어주며 내 더위 가져가라! 훠이훠이 외치라 하네.
그깟 것 더위 따위 뭔 대수라고 나에게 가져갈 건 따로 있는데. 온몸 상피에 오글오글 들붙어있는 이놈의 찰거머리 가난이나 가져가지.
호두껍데기 창밖으로 휘익 내던지며 내 가난 가져가라! 내 가난 좀 가져가라! 꺼이꺼이 외치고 또 외쳤네.
윤중목 시인 / 아스팔트도 자연이다
아내가 문득 연애 시절을 돌이켜 내가 했다던 말끝을 꼬집고 나선다. 글쎄. 아스팔트도 자연이랬다고, 그런 비상식적 궤변이 어디 있냐고, 비상식이든 숫제 아주 몰상식이든 허나 내 육골의 성분이 그러한 것을. 유년과 소년과 청년 시절 모두를 도시의 아스팔트 새까만 타마구 속에 어느덧 중년인지 장년인지 까지도 고스란히 파종해 심어버린 나에겐 그 거북이 등딱지 같은 아스팔트가 사시사철 내 밑동이 뿌리박고 흡수한 무기질 토양이요 거름이자 양분인 것을. 수수십 년 그 위를 찍고 지나간 사방팔방 신발 자국과 타이어 자국이 내 발육과 성장과 이제는 노화까지의 전 과정 다큐멘터리 생태화석인 것을. 그래서 아스팔트도 자연이다. 때론 비극적으로, 때론 희극적으로 그래서 내겐 아스팔트도 자연이다.
윤중목 시인 / 침묵
침묵에도 소리가 있다. 풀밭 미끄러지는 바람소리처럼 쉭쉭 고막을 마찰하는 소리가 있다. 귀를 막아도 눈을 가려도 넝쿨처럼 기어붙는 소리가 있다. 침묵하게 만든 자들의 거기 불안한 가슴팍에 마침내 비수로 꽂히는 소리가 있다.
침묵에도 소리가 있다. 소리보다 더 곤두선 소리가 있다.
윤중목 시인 /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때 묻은 허물 한 겹 벗어 한 살 한 살 또 그렇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차마도 이루지 못한 꿈이기에 초조하게 긴 밤 뒤척이며 뼈마디 삭히는 것이 아니요 세월이 무지러진 가슴을 쓸어 잔잔하게 돌아점을 배우는 것이라고 험한 세상 끌어안은 속내 깊은 산처럼 묵묵하게 돌아점을 배우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그 돌아서는 뒷 모습에 한 뼘 더 길어진 더 그러운 그림자 드리우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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