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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기록 시인 / 나를 잃다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2.
이기록 시인 / 나를 잃다

이기록 시인 / 나를 잃다

 

 

전설은 시작되었지 말을 오물거리며 입을 잃어버렸지

입을 잃어버리고 나갈 때부터 관들만 남겨둔 채

밤새 삶아온 달걀들은 껍질만 남게 되었지 삶은 육식의 시간

허기는 달궈놓은 오후 안에서도 멈출 줄 모르니

굴러다니는 무덤이었을 뿐이야

 

자, 집중하시라, 이제 곧 기다리던 마지막이 다가올지니

곧 나를 잃어버릴 테니

사라지는 것은 무조건 정오에만 있는 일이야 금방 올 일이지

돌아오지 않는 일들이라고 어디서부터 알려야하지

자라지 않는 것은 나만은 아니었다고

사진들만 무심히 남아 있었고 시선들은 검게 처리되었어

여기 없는 너를 위해서도 옳은 결정이었어

 

헛되게 뜬 태양은 문제가 아닐지도

심해진 검문에 마스크를 쓰고 숨어들었어

허공을 향해 흔드는 손가락들이 문제일 뿐

연설이 사라진 시대에 부드러운 향기가 연일 이상한 풍경으로 다가왔으니

누가 미리 말해주지 않아서 가능하다면

간혹 밤톨에서도 싹이 올라오는 일이라도 가능하다면

나의 시는 일회용 컵 안에 놓여 시음되겠지

감미로운 가시가 입 안에 박혀서 잊을 만하면 되돌아왔어

오늘 밤처럼 깊게 날아올랐지

 

 


 

 

이기록 시인 / 단단한 멍

 

 

살아남은 사내가 문을 연다

 

알몸으로 부르는 빈 구멍들은

숨바꼭질을 하는지 굳은 유령의 옷을 입고

멈추지 않는 비린 장례식에

녹아내리는 피부를 덮었다

퍼붓는 소금기를 남기고 분열하는

 

식지 않는 불안을 지불하며 비틀거린다

더 깊이 부패하기 전

땅은 등 굽은 문자를 남긴다

목소리를 벗기며

더는 말 할 수 없는 장면

 

불면의 촉수가 냉정한 가슴을 동여맨다

타는 몸을 잉태하지 말고

사라진 태양을 안고 잠들 수 있게

오지 않은 절망이 사라지기를

 

우린 단단한 꽃멍이 든다

 

-시집 <소란> 책읽는저녁

 

 


 

 

이기록 시인 / 그러니 한번 말해보자

 

 

 그러니 한번 말해보도록 하자

 

 그래, 나는 이미 없는 사람과 살아간다 이미 없는 사람과 연애를 하니 고민스럽다 누워있는 밤에 헐떡일 때쯤 매번 손가락을 잘라 바닥에 뿌려둔다 너는 이미 없는 얼굴을 가지고 내 뒤를 따른다 모서리가 긁힌 탁자에서는 너를 읽을 수 있을까 나는 잃어버린 말을 찾는 중이다

 

 이번 질문은 네게 하는 것이다 너는 난해한 운명을 맞이하는 중이며 남은 것은 벌레 먹은 사과 같은 애가 타는 껍질뿐이이 껍질만 벗어두는 너를 이틀 전부터 얼기 시작한 침묵을 이야기한다 두려웠던 말들도 그저 말이 되는 밤 너는 지나갈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다 비스듬한 사랑니를 잘게 부수며 혀만 얼어붙은 유보된 사랑

 

 잠에서 빠져나온 영혼은 열어둔 창문으로 행진을 준비 중이니 사라진 벽과 웃자란 나무의 결만 흔들도록 하자

 

 그러니 한번 말해 보시오

 나는 맛있었니

 

 


 

 

이기록 시인 / 이명耳鳴

 

 

 오늘의 요리는 준비되었어요 패스트푸드 빨리 오세요 나를 요리조리 먹어보세요 죽어있는 시계가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이네요 설거지를 하고 요리를 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을 섞지 마세요 당신과 나를 섞을수록 저만치 앉아서 썩어버려요

 

 바스러지는 침묵들은 살려달라고 하네요 당신의 진원을 알 수 없어서 모든 건 비밀에 붙여지고 화면에서는 똑같은 말들이 반복되지요 당신이 풀었던 것은 말이 아니라 독약이었나 봐요 사과를 들고 사진 찍던 아이에게도 내성이 생겼어요 상처는 금방 치유되지요 키스는 필요없어요

 

 당신의 심장을 들고 가만히 눌러봅니다 가볍게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것이 당신의 마음인가요 세포 하나하나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있던 당신이 구겨진 다리를 절벅거리고 있어요 이틀 전 아니 오래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폭우가 유리처럼 녹아내리고 있네요 유통기한은 언제까지 인가요 내게 부족한 건 슬픔이었나 봐요

 

 달달하게 시럽을 넣어주세요 건기乾期를 넘기기에는 상큼한 당신이 버겁거든요 비는 내릴 곳에만 내려요 난 비가 오지 않는 곳에 서 있지요 빗길 조심하세요 당신을 묻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 여전히 시계는 초침도 없이 달리고 있어요 살아있든 죽어있든

 

 


 

 

이기록 시인 / 남아 있긴 한 건지

 

 

 오늘은 당신의 입이 잘 어울리는데요 당신의 모자가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네요.

 

 흔들리는 실내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난처한 일이다. 빨대를 입에 물고 들어 올리는 것은 목소리뿐인데 간직할만한 것이 남아 있는 손들은 계속 흐느적거리기만 한다. 신음소리를 흘리자 바라보는 잎들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입술을 내민다. 더 이상 간절한 것은 없어진 것이다. 간간이 올라오는 손목들은 지나간 추위를 기억하고 가방을 들고 일어서는 몸들에 예의를 지킨다. 서로의 길이 흩어지자 그녀는 웃고 있다. 네 무게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또 한 사람 사라져 간다. 더 이상은 남아있지 않은 시간으로 진화해 간다. 혹 비가 내리더라도 이곳에서는 알 일이 없다. 단지 가지에서 뻗어 나온 눈들만 울고 있을 뿐이다. 눈물을 만지고 있다. 의자 위에 앉는 일은 불편해서 계단을 모르는 중에도 요의는 사라지질 않는다. 새로 유입된 공기는 두리번거리길 멈추지 않고 있다. 추적추적 바람이 내리는 중이다. 난 물이 되고 싶었다. 돌아가는 일들은 낯 익은 일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 적 없는 마음을 가졌다. 자리는 며칠 전부터 변한 적이 없었다.

 네가 남아 있긴 한건가

 

 


 

 

이기록 시인 / 잊다

 

 

밀린 꿈들을 꺼내 햇볕에 말려둡니다

빈집은 요란하진 않아

눅눅했던 계절을 차곡차곡 쌓아두지요

목덜미는 자주 부풀어

자주빛 모란 안에 들어가

온몸을 밤새 쏟아냅니다

겹친 얼굴을 오래 앓자

흐릿한 사람이었다는 위안이 옵니다

헐거워진 편지들을 뒤적이는데

사납던 혀들은 어디까지 갔는지

비워둔 이름만 찌르고

고개를 숙인 채 모여들지요

그제야

오래도록 금이 갑니다 늘 아름다웠어요

 

- 문예지〈사이펀〉 2018 여름호

 

 


 

 

이기록 시인 / 노랑

 

어제로부터 바랜 연락이 온다

 

상여 행렬로 이어진 점들은 태생부터 부패했었다

배를 덜 채웠는데 꽃들이 피었고 그가 말없이

떠났다 중얼거리지만 귀는 구름 위로 날아갔다

주문한 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온한 병들이 뿌리를 내렸다 깊은 심지를 묻고

바람에 중독되었다 당분간 이름은 사라졌다

한껏 구미를 당기기 위해 독한

기침을 해댔다 멈추지 않는 아랫배는

이름을 부를 때마다 노랗게 변심했다

그림자에 짐승들이 매달렸고

 

밤이 길어질수록 불면은 깊었다

비가 내릴 때 조용히 방안에 걸어 들어가 발효되었다

이빨 자국이 남은 주말은 살이 오르지 않았다

듬성듬성 귀가 자라기 시작한다

 

유충들이 입을 벌리고

소문으로 엉킨 껍질을 벗긴다

침 삼키며 부드럽게 냄새를 몰고

허공으로 피어난다 휜 적막에서

눅눅한 봄이 익어간다

가라앉았던 속도만큼 되돌아온다

 

 


 

 

이기록 시인 / 테이크아웃

 

 

 알몸으로 기댄 당신이 들어올 순서지만 말을 걸어도 난 웃을 수 없어요 기억하는 법은 바위에 새겨지고 끝내 가지고 나가지 못한 걸 당신은 알고 계신가요 오늘은 당신이 필요한데 잠시 쉬었다 가세요 삶은 간편하게 포장되네요

 

 당신이라고 우겨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인데요 투명한 밤을 갈 동안만 얼굴을 바라보아요 달의 주기만큼 멍든 항아리 하나가 나뒹구네요 풀린 실을 감을 수가 없어서 발에 매듭을 맺어요 새벽에는 살얼음이 얼더군요 소리칠 때마다 빈집을 건너가네요

 

 단 한번 마주친 고독은 바람이 불 때마다 가파를까요 말하려는 것은 누락된 번호처럼 나부끼지만 사랑은 포효가 되어 걸어가지요 내게 들린 건 매번 다른 당신이지요 솜털처럼 나는 자꾸 길을 잃어버려요

 

 그림자들의 뒤를 찾아다니며 잡을 수 없는 결을 어루만져요 시간이 말랐다면 눈물을 흘릴 거예요 난 당신이 아니니까요 이빨을 드러낸 불빛들은 도망치기 바쁘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나봐요 당신은 뜨거웠으니 입술을 물 듯 안을 거에요

 

 


 

 

이기록 시인 / 출렁이는 사막

 

 

고백처럼 날 것의 유목 생활을 시작합니다

만찬을 기다리며 고개 숙이고 당신의 심장 소리를 들었지만

새기지 않은 문신만 탁자 위에 남았답니다

두 발로 선 적 없는 매일매일

기억하는 일에 그만큼의 잔이 필요한 것은

꼬리를 잃어버린 어제 때문입니다

코가 간질간질한 밤엔

당신의 목덜미를 쓰다듬을 수 있을까요

철거된 그림자가 웅크린 채 깨어나고 있어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건조한 이름들이 천장에서 떨어지자 눈을 들기 시작하지요

뻗어가는 시간을 주워들면 사라진 말은 습하지만

마른 것은 손가락이에요 손가락을 깨물면 부두교의 주문처럼

다시 살아날 겁니다

간절한 당신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나 봐요

먼 곳을 돌아왔나 봐요

만질수록 가시 박힌 손에서는 피가 납니다

마른 가슴만 차오르는 날들입니다

감당할 만큼만 버거운 중력이 찌르는가 봐요

머무르던 폭풍만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분명 이곳은 출렁이는 사막입니다

깊숙하게 새벽을 달아놓아요

 

-시집 <소란> 책읽는 저녁 2020.

 

 


 

이기록 시인

1975년생. 제24회 <시와사상> 신인상 당선. 시집 『소란』. <작가와사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