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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혜 시인 / 시의 경제학
시 한 편 순산하려고 온몸 비틀다가 깜박 잊어 삶던 빨래를 까맣게 태워버렸네요 남편의 속옷 세 벌과 수건 다섯 장을 내 시 한 편과 바꿔버렸네요 어떤 시인은 시 한 편으로 문학상을 받고 어떤 시인은 꽤 많은 원고료를 받았다는데 나는 시 써서 벌기는커녕 어림잡아 오만 원 이상을 날려버렸네요 태워버린 것은 빨래뿐만이 아니라 빨래 삶는 대야까지 새까맣게 태워 버려 그걸 닦을 생각에 머릿속이 더 새까맣게 타네요 원고료는 잡지구독으로 대체되는 시인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시의 경제는 언제나 마이너스 오늘은 빨래를 태워버렸지만 다음엔 무얼 태워버릴지 속은 속대로 타는데요 혹시 이 시 수록해주고 원고료 대신 남편 속옷 세 벌과 수건 다섯 장 보내줄 착한 사마리언 어디 없나요
-시집 『마지막 출근』 (문학의전당, 2014)
정다혜 시인 / 때론, 가끔 술 끔찍이 좋아해서 술친구 밖에 없던 아버지 끝내 술병 나 돌아 가셨지 누구도 아는 이 없는 그 사실이 창피해서 입밖에 내 본적 없는 그 이름 목마르게 그리울 때 있어 가끔 뜨거운 술 한잔에 목축이며 가슴 데피는 날도 있지 마음 다쳤을 때 술만큼 좋은 약 없고 기쁨 최고일 때 그것 만 큼 좋은 문화없어 기분따라 즐기다가도 어느 순간 목구멍 메여오는 슬픈 한뭉치 주정뱅이 못난 아버지라도 곁에 아니 계신 것이 한이 되어 때론 눈물 담은 술 한 잔에 마른 가슴 적시는 날도 있지
정다혜 시인 / 우리사랑 이렇게 소통하기로 해요 좋으면서 싫은 척 싫으면서 좋은 척 겉 마음 따로 속마음 따로 아름답게 포장되어 해석하고 분석해야 하는 그런 마음, 그런 언어 말고 보여지는 그대로 알수 있도록 느껴질 수 있도록 표현하기로 해요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아프면 아프다 속상하면 속상하다 화나면 화난다 말하기로 해요 눈치없는 사랑 되지않게 속 몰라주는 철없는 사랑되지 않게 급할 거 없는 사랑이지만 먼 길을 가다 돌고 돌아 되돌아오는 실수투성이 상처투성이 사랑 되지않게
너무 많은 의미부여로 해석이 필요한 언어말고 보여지는 그대로 알면 안다 모르면 모른다 정확하게 말하기로해요 같은 곳 바라보며 다른 생각을 말해도 겪어보지 않으면 알수 없는 상황이라도
이해안된다 화내지 말고 이해하는 척 웃는 얼굴뒤로 슬픔 감추지도 말고 아~ 그렇구나 아~ 그랬구나 아~ 그럴수도 있겠구나 이해 될수 있도록 말하기로 해요 그렇게 조금씩 깊어지는 우리사랑 이렇게 소통하기로 해요
정다혜 시인 / 외눈
간호사는 의식 없는 내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 한쪽 들어내겠다는 수술동의서에 도장 찍었다 그건 동의가 아닌 최후의 통보 나는 여자답게 거부해 보지 못하고 절망의 비명 한번 질러보지 못하고 서른다섯에 눈 하나 잃었다 그렇게 빠져나간 생의 빈자리 신경조차 차단된 죽음의 빈자리에 보지 못하는 새 눈 들어섰지만 그 눈에는 더 이상 풍경 담을 수 없었다 기쁨도 슬픔도 모르는 의안 아무것도 채울 수 없는 깜깜한 고요 속에 다행히 눈물샘은 마르지 않아 바다 같은 눈물 출렁출렁 퍼내 쓰고도 눈물은 아직 강물처럼 남아 펑펑 흐른다 외눈의 절망은 두 눈으로 보는 세상 한 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 외눈의 축복은 두 눈으로 보는 세상 한 눈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 지구가 한 눈으로 우주를 다 보듯이 나는 외눈으로 나의 우주를 보았다, 어느새 나의 외눈 늙은 노안의 행성 되어버렸지만 자전하는 눈의 뒤편으로 녹는 눈을 보고 공전하는 눈의 앞으로 펼쳐지는 축복의 봄을 고스란히 바라보고 있다 신록 한 잎 놓치지 않고 꽃잎 한 장 지나치지 않고 오는 봄을 온전하게 외눈에 담고 있다
정다혜 시인 / 오래된 주전자
새로 산 유리 주전자 새까맣게 타 버렸다 버리려다 잊어버린 낡은 주전자 기억하고 불 위에 올렸다, 찌그러진 몸통, 구부러진 입 흔적만 남은 꽃무늬 몸통 속에서 물이 끓는다 잊어버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인가 잊어버리는 것보다 기억 하는 일이 더 힘든 일 첫 편지, 첫 키스, 첫 사랑, 첫 눈물, 첫 이별처럼 내가 기억하는 것은 상처로 남았는데 우연히 책갈피 속에서 찾은 꽃잎 한 장, 잊어버린 옛 친구의 사진, 서랍 속에서 툭 떨어지는 보내지 못한 편지 잊어버린 것들은 잊어버린 시간과 함께 온다 오래된 주전자가 쉬쉬쉬 소리 내며 끓는다 내가 떠나보낸 시간도, 나를 버린 시간도 모두 잊어버린 오래된 주전자다 눈 나리는 밤 돌아서 올 때 펑펑 울던 그 사람처럼 오래된 주전자 펄펄 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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