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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다혜 시인 / 시의 경제학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2.
정다혜 시인 / 시의 경제학

정다혜 시인 / 시의 경제학

 

 

시 한 편 순산하려고 온몸 비틀다가

깜박 잊어 삶던 빨래를 까맣게 태워버렸네요

남편의 속옷 세 벌과 수건 다섯 장을

내 시 한 편과 바꿔버렸네요

어떤 시인은 시 한 편으로 문학상을 받고

어떤 시인은 꽤 많은 원고료를 받았다는데

나는 시 써서 벌기는커녕

어림잡아 오만 원 이상을 날려버렸네요

태워버린 것은 빨래뿐만이 아니라

빨래 삶는 대야까지 새까맣게 태워 버려

그걸 닦을 생각에 머릿속이 더 새까맣게 타네요

원고료는 잡지구독으로 대체되는

시인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시의 경제는 언제나 마이너스

오늘은 빨래를 태워버렸지만

다음엔 무얼 태워버릴지

속은 속대로 타는데요

혹시 이 시 수록해주고 원고료 대신

남편 속옷 세 벌과 수건 다섯 장 보내줄

착한 사마리언 어디 없나요

 

-시집 『마지막 출근』 (문학의전당, 2014)

 

 


 

 

정다혜 시인 / 때론, 가끔

술 끔찍이 좋아해서

술친구 밖에 없던 아버지

끝내 술병 나 돌아 가셨지

누구도 아는 이 없는

그 사실이 창피해서

입밖에 내 본적 없는 그 이름

목마르게 그리울 때 있어

가끔

뜨거운 술 한잔에 목축이며

가슴 데피는 날도 있지

마음 다쳤을 때

술만큼 좋은 약 없고

기쁨 최고일 때

그것 만 큼 좋은 문화없어

기분따라 즐기다가도

어느 순간 목구멍 메여오는

슬픈 한뭉치

주정뱅이 못난 아버지라도

곁에 아니 계신 것이 한이 되어

때론

눈물 담은 술 한 잔에

마른 가슴 적시는 날도 있지

 

 


 

 

정다혜 시인 / 우리사랑 이렇게 소통하기로 해요

좋으면서 싫은 척

싫으면서 좋은 척

겉 마음 따로 속마음 따로

아름답게 포장되어

해석하고 분석해야 하는

그런 마음, 그런 언어 말고

보여지는 그대로

알수 있도록

느껴질 수 있도록

표현하기로 해요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아프면 아프다

속상하면 속상하다

화나면 화난다

말하기로 해요

눈치없는 사랑 되지않게

속 몰라주는

철없는 사랑되지 않게

급할 거 없는 사랑이지만

먼 길을 가다

돌고 돌아 되돌아오는

실수투성이 상처투성이 사랑

되지않게

 

너무 많은 의미부여로

해석이 필요한 언어말고

보여지는 그대로

알면 안다

모르면 모른다

정확하게 말하기로해요

같은 곳 바라보며

다른 생각을 말해도

겪어보지 않으면

알수 없는 상황이라도

 

이해안된다 화내지 말고

이해하는 척

웃는 얼굴뒤로

슬픔 감추지도 말고

아~ 그렇구나

아~ 그랬구나

아~ 그럴수도 있겠구나

이해 될수 있도록 말하기로 해요

그렇게 조금씩 깊어지는

우리사랑

이렇게 소통하기로 해요

 

 


 

 

정다혜 시인 / 외눈

 

 

간호사는 의식 없는 내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 한쪽 들어내겠다는

수술동의서에 도장 찍었다

그건 동의가 아닌 최후의 통보

나는 여자답게 거부해 보지 못하고

절망의 비명 한번 질러보지 못하고

서른다섯에 눈 하나 잃었다

그렇게 빠져나간 생의 빈자리

신경조차 차단된 죽음의 빈자리에

보지 못하는 새 눈 들어섰지만

그 눈에는 더 이상 풍경 담을 수 없었다

기쁨도 슬픔도 모르는 의안

아무것도 채울 수 없는 깜깜한 고요 속에

다행히 눈물샘은 마르지 않아

바다 같은 눈물 출렁출렁 퍼내 쓰고도

눈물은 아직 강물처럼 남아 펑펑 흐른다

외눈의 절망은 두 눈으로 보는 세상

한 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

외눈의 축복은 두 눈으로 보는 세상

한 눈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

지구가 한 눈으로 우주를 다 보듯이

나는 외눈으로 나의 우주를 보았다, 어느새

나의 외눈 늙은 노안의 행성 되어버렸지만

자전하는 눈의 뒤편으로 녹는 눈을 보고

공전하는 눈의 앞으로 펼쳐지는

축복의 봄을 고스란히 바라보고 있다

신록 한 잎 놓치지 않고

꽃잎 한 장 지나치지 않고

오는 봄을 온전하게 외눈에 담고 있다

 

 


 

 

정다혜 시인 / 오래된 주전자

 

 

새로 산 유리 주전자 새까맣게 타 버렸다

버리려다 잊어버린 낡은 주전자 기억하고

불 위에 올렸다, 찌그러진 몸통, 구부러진 입

흔적만 남은 꽃무늬 몸통 속에서 물이 끓는다

잊어버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인가

잊어버리는 것보다 기억 하는 일이 더 힘든 일

첫 편지, 첫 키스, 첫 사랑, 첫 눈물, 첫 이별처럼

내가 기억하는 것은 상처로 남았는데

우연히 책갈피 속에서 찾은 꽃잎 한 장,

잊어버린 옛 친구의 사진,

서랍 속에서 툭 떨어지는 보내지 못한 편지

잊어버린 것들은 잊어버린 시간과 함께 온다

오래된 주전자가 쉬쉬쉬 소리 내며 끓는다

내가 떠나보낸 시간도, 나를 버린 시간도

모두 잊어버린 오래된 주전자다

눈 나리는 밤 돌아서 올 때 펑펑 울던 그 사람처럼

오래된 주전자 펄펄 끓고 있다

 

 


 

정다혜 시인

1955년 대전에서 출생. 2005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시집 『그 길 위에 네가 있었다』 『스피노자의 안경』. 한국시인협회 회원. 충남시인협회 회원. 민족작가회의 울산지회 회원. 서정시마을 회장. 문해문학 동인. 독서 논술사로 활동중. 열린시학 신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