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형철 시인 / 차나 한 잔
그 이름도 곱고 고운 장미아파트 동 이름도 순 조선말로 가동과 나동 사이 그러니까 한 백 미터쯤 되는 거리에서 서로 담뱃불을 돋운 것에 약간 미안해하며 고개 돌린 사람에게 굳이 우정이랄 것은 없지만 그래도 그냥 지나치기는 거시기하여 첫 여자에게처럼 속으로 말을 건넨다 언제 시간 되시면 차나 한 잔 안 되실지
서로의 결심 부족과 결단력 부재는 잠시 냅두고
강형철 시인 / 야트막한 사랑
사랑 하나 갖고 싶었네 언덕 위의 사랑 아니라 태산준령 고매한 사랑 아니라 갸우듬한 어깨 서로의 키를 재며 경계도 없이 이웃하며 사는 사람들 웃음으로 넉넉한
사랑 하나 갖고 싶었네 매섭게 몰아치는 눈보라의 사랑 아니라 개운하게 쏟아지는 장대비 사랑 아니라 야트막한 산등성 여린 풀잎을 적시며 내리는 이슬비 온 마음을 휘감되 아무것도 휘감은 적 없는
사랑 하나 갖고 싶었네 가슴이 뛸 만큼 다 뛰어서 망둥이 한 마리 등허리도 넘기 힘들어 개펄로 에돌아 서해 긴 포구를 젖어드는 밀물 마침내 한 바다를 이루는
사랑 하나 갖고 싶었네 이제 마를 대로 마른 뼈 그 옆에 갸우뚱 고개를 들고 선 참나리 꿀 좀 핥을까 기웃대는 일벌 한 옴큼 얻은 꿀로 얼굴 한번 훔치고 하늘로 날아가는
강형철 시인 / 금화터널을 지나며
매연이 눌어붙은 타일이 새까맣다 너는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 그 곁에 보 고 싶 다 썼고 나는 정차된 좌석버스 창 너머로 네 눈빛을 보고 있다 손가락이 까매질수록 환해지던 너의 마음 사랑은 숯검댕일 때에야 환해지는가 스쳐지나온 교회 앞 죽은 나무 몸통을 넘어 분수처럼 펼쳐지는 능소화 환한 자리
강형철 시인 / 훔쳐온 돌
테렐지였던가 하여튼 몽골의 한 관광지에서 간밤에 잡았다는 노루를 구워 먹었지 조그만 불구덩이를 파고 가져간 장작을 숯불을 만들어 징기스칸 보드카에 맘껏 먹고 마셨지 취하더군 정말 취했어 그렇지만 사실 나는 늘 그렇듯이 그 사람들에게 반한 게 아니라 그 술에 취한 게 아니라 해 지기 전 그 개울가에 반해 있었어 더 정확히 말하면 그 개울가에서 주운 돌멩이에 반했었어 나는 그 돌들을 주머니에 몰래 숨겨두었지 술에 취해 어둠 속에 별이 떴을 때도 나는 조끼 안주머니에 넣어둔 돌을 매만지고 있었어 탁 트인 초원 어쩌구저쩌구 했지만 나는 그것보다 숲이 있고 물이 흐르는 해의 실체가 강림한 개울가에서 해의 실체를 만지작거린 그, 참으로 오랜만의 소풍이 즐거웠던 거야 그때 빛나던 돌이 정말로 좋았던 거야! 짜잔, 나는 일하는 사무실로 가져와 그 돌을 전시해두었지 흐뭇했어 몽골이 바로 내 옆에 진열되어 있으니 그런데 누가 훔쳐갔느냐고? 그렇지 않으면 그 돌에 금이라도 박혔냐고? 아냐, 그럼 왜 시까지 쓰냐고 그게 아니고 그러니까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났는데 그 돌들은 돌처럼 꿈쩍도 안 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냥 평범한 돌일 따름이라는 것이지 그냥 대학로나 종로에서 볼 수 있는, 돌들도 사람처럼 지가 어울려 빛나는 자리를 떠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어서 훔쳐온 돌만 남는 것 같아서
강형철 시인 / 나쁜 바람은 진실을 드러낸다
20여년 만에 만난 친구가 나를 보며 깔깔거린다 머리털 다 얻다 뒷냐고
샴푸관계로 어떻게 허다봉게 그리됐다고 약간 미안한 듯 얼버무린다
예전엔 그런 말이 대수롭지 않았는데 이제는 속이 뜨끔거린다 머리 빠진 모습이 인화된 사진을 본 뒤부터다
남들에게 못할 짓 많이 했다 흉한 것 참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물론 그 뒤론 화장실에서 거울을 두 개나 들고 어떻게 위장이 안될까 좌측의 머리를 심하게 우측으로 빗질도 한다
그런데 그놈의 바람이 그냥 놔둬야 말이지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고창환 시인 / 우체통이 있는 거리 외 4편 (0) | 2025.09.19 |
|---|---|
| 권천학 시인 / 사소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 외 4편 (0) | 2025.09.19 |
| 김순옥 시인 / 밤夜의 만다라 외 4편 (0) | 2025.09.19 |
| 차유오 시인 / 투명한 몸 외 4편 (0) | 2025.09.19 |
| 송은영 시인 / 마음의 리모컨 외 6편 (0) | 2025.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