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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환 시인 / 우체통이 있는 거리
정류장 옆 우체통에 한 사내가 두툼한 편지를 넣는다 저물어가는 아파트 입구 버스를 기다리며 우체통을 바라본다 자주 서성였고 지나치던 길이지만 넟설게 우체통에 기대 서본다 차가운 기다림이 손바닥에 번진다 그렇게 홀로 무엇을 견딘다는 것이 먼 기억처럼 가슴을 저민다 우체통의 붉은 입술을 건드려본다 한없는 망설임의 젊은 날들이 한꺼번에 우체통에 기대 서본다 지나간 말들이 흘러가고 흘러온다
고창환 시인 / 고목(枯木)
한 번도 걸은 적 없지만 그는 모든 삶을 경험했다 축축한 어둠을 덮으며 길들은 그의 내부로 밀려왔다 그는 낱낱이 기억한다 세상의 뿌리마다 잊혀진 죽음들이 달라붙어 있다
얼마나 많은 길을 숨기고 있는지 스쳐가는 새들은 모르리 사나운 바람이 몰려가고 갈라진 살갗이 낯선 신음을 흘릴 때 내부에서 울리는 둥글고 단단한 소리들 상처만이 마음에 길을 만든다
그는 낱낱이 기억한다 추억은 어둠 속에서 선명해진다 비워낸 자리마다 누군가의 발자국이 쌓여가고 그때마다 새들은 둥지를 허문다 한 번도 걸은 적 없지만 그는 모든 길들을 품고 있다
고창환 시인 / 낡은 의자의 추억
지금은 삐걱거리는 뼈대를 추스리기도 힘겹지만 누군들 한때의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적이 없을까 척추 사이로 흐르는 기름때 같은 세월 속에선 풀린 나사를 아무리 조여도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나는 감히 그리움이라 말할 수 있다 사람이 떠난 자리엔 한무더기의 기억만이 잡풀처럼거칠다 두드린다고 어긋난 세월을 맞출 수 있는가 분주했던 바퀴들이 구르기를 멈추듯 휴식은 언제나 삶의 끝에서 온다 나른한 햇살이 졸린 듯 꾸벅거리는 창가에선 모든 것이 정맥처럼 비쳐 보이고 지나간 시간들도 맑은 강물처럼 주위를 흘러간다 이젠 아무도 떠나보내지 않으리 사람이 떠난자리엔 낡은기억만 자랄 뿐이다 그대가 조이고 두드리는 세월이 미끈거리며 손끝을 빠져나갈지라도 우리가 함께 늙은 것은 평화롭다
고창환 시인 / 夜景
산기슭에 매달린 십자가의 수를 헤아린다 빽빽한 불빛 사이 붉은 십자가들 모종의 신념처럼 그것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우성치는 저 불빛들
고창환 시인 / 늦여름의 길목
김씨는 두 마리 토끼를 기른다 비좁은 토끼장에 매일 풀을 넣으며 그는 무슨 알토란 같은 꿈을 다지는 걸까 오토바이 소리 요란한 최씨 아저씨는 호박을 기른다 누런 호박이 익으면 오토바이 뒷자리에 호박을 싣고 퇴근한다 부서지고 깨진 것들을 고치거나 하루 종일 인쇄기를 돌리는 것이 그들의 일이지만 가끔 술추렴에 붉어진 세월이 발자국처럼 패어 있다 그들에게선 옻닭이나 말벌 같은 말들이 불쑥불쑥 묻어난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들풀 같은 추억은 어떻게 숨쉬는 걸까 막혀버린 우물처럼 이미 지나가버린 빛 바랜 한 시절은 어떻게 싹을 틔우는가 싸움닭 같은 벼슬을 세우지 않고 어떻게 이 도시를 견뎌낼 수 있단 말인가 가는 비 흩뿌리는 늦여름의 길목, 김씨는 용접 불꽃을 튀기며 떨어진 철문을 고친다 따지 않은 호박이 난간에 걸려 있다 토끼장 속 토끼를 가만 들여다본다 붉고 순한 눈동자가 빤히 마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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