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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솜 시인 / 수감되다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0.
김솜 시인 / 수감되다

김솜 시인 / 수감되다

 

 

이사온지 이틀

베란다에 나섰다가 문이 잠겼다

 

새집은 아직 새 주인을 기억하지 못하고

나를 베란다에 가두었다

1초 만에 덜컥

 

유리창 너머 렌지 위에는 곰솥이 끓는데

식탁 위 휴대폰이 내게로 손을 내미는데

얇은 유리문 한장이 성벽이다

 

노란별을 자책으로 읽는 밤

어둠이 전신주 아래 고양이를 덥석 물고

 

정숙자의 시 "1초 모으기"를 읽다가

층층이 쌓인 어둠 속 1초는 어떤 모습인가

 

으스스한기가 밀려오고

나는 줄곧 1초씩 밀어냈다

 

곰솥이 졸고

맞은편 건물에서 잠을 깬 비둘기들

각자 1초씩 물고 푸드득 날아간다

 

 


 

 

김솜 시인 / 유성

 

 

택시는 유성처럼 지나갔다

유성으로 갔던가

우레빗속에 젖은 스물 무렵의 네가 먼저 길을 잡았다

 

뒤를 보지 않는 활강은 무게를 버려야 가능하다

무엇에게도 마음을 두지 않은 듯 차들은

빗속을 줄줄이 날아갔다

 

새로 들어선 건물들 뒤로 그늘처럼 자란 방,

알전구가 노이로제에 걸린 듯 눈을 뜬다

고백은 저 혼자 들끓었다

빈 방은 나에 대한 너의 추궁으로 가득차고

방향이 다른 나는 지금 여기만을 사수했다

 

불에 덴 것처럼 내가 나를 뜯어낸 적이 있었다

우리는 몸 어디에 우레를 품었던 것일까

알에서 막 깬 병아리 같은 기분도 스쳤다

 

주의보나 경보는 없었다

비밀은 잘 새고 비는 들이치려한다

 

되는 일 없이 안 되는 일만 쫒던 너는 무모했고

금방 나온 커피처럼 뜨거웠다

내용보다 형식에 눈이 갔다

 

고통은 젊고 싱싱했다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풀려나온 기억은 옷을 같이 입었다

앵커가 전하는 취업대란 뉴스를 듣는

어떤 밤에는

스물 무렵의 행성이 반짝인다

 

-계간 『시인정신』 2023년 겨울호 발표

 

 


 

 

김솜 시인 / 정말이라는 동물

 

정체성은 그날의 날씨에 따라 바뀌는 걸까

핵 오염수 방류를

결사반대하던 사람들이 결사적으로 찬성한다

이 말과 저 말은 말은 같지만 날씨가 다른 말

날씨는 정말일까

태도가 정말일까

 

군 생활 일 년 남짓 남은 아들 걱정에

ㅡ일 년 금방이야

일 년은 정말 가까운 내일일까

 

34년을 함께 산 부부가

입 맞추던 입으로 욕하다 이별의 절차를 밟는다

완전한 행복은 얼마나 비극적인지

안다와 모른다가 다르지 않은 게 정말일까

 

감정도 때맞춰 물을 줘야 하는 화분 같은 것

후회가 넘치게 물을 주면 정말이 살아날까

 

건설은 어렵고 허물기는 얼마나 더 어려운지

들여놨다 내놓는 건 화분만이 아니다

 

우린 정말 끝까지 같이 가는 거야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자리에서 넌 그렇게 말했지

어떻게 갑자기 정말이 사라진 거니?

 

마음대로 들어왔다 나가는 정말

정말은 뱀과 쥐새끼와 여우를 교배시킨 짐승이라고 한다

정말일까?

계간 『시인정신』 2023년 겨울호 발표

 

 


 

 

김솜 시인 / B씨에 관한 사담

 

그는 취기 오른 자전거에 실려 담벼락과 정면충돌 했다는데

하필이면 추운 겨울밤이어서

하필 사람 뜸한 뒷골목이어서

병원은 너무 늦게 그에게 달려온 것이다

하필이 여러 번 겹치니

모든 불행이 하필 때문인 것 같았다

하필에 목이 꺾인 자전거처럼

그의 의지는 몇 걸음 가다 멈추고

자기 몸 안에 꼼짝없이 갇힌 것이다

이렇게 될 줄을 하필은 알았을까

하필이 어떻게 고개를 들었는지

꼬리조차 잡히지 않는다

눈동자 속으로 별빛이 쏟아져 들어올 때

길고양이 울음소리를 따라온 학생이 병원을 불렀다는데

하필 그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고양이라니,

가까운 기척들이 하필에 부서진 어둠을 수습한다

처음 만난 낯선 세계에서

그는 새로운 호흡법을 익혀야 한다

계간 『리토피아』2023년 여름호 발표

 

 


 

 

김솜 시인 / 자두

 

자두가 시작됐어

자두가 돌아왔어

자두가 말은 못하지만 표정만은 확실해

이름만 들어도 자두를 한 입 깨문 것 같아

시큼해 상큼해 흥건해 달콤해

입안에 단어들이 고인다

자두가게 아저씨는 그래서 친절하고

자두 파는 아줌마는 무조건 예쁘다

주고받고

만질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단정한 인사

내가 키우는 강아지도 자두

시고 달고 상큼하지 않아도 자두

우유 먹은 자두도 자주 깨물고 싶어

익은 자두는 우유 먹는 자두와 무관하고 비슷해

자두는 자꾸 물어도 시고 달고 짖는다

어려워 쑥스러워 선뜻하지 못한 속엣말

불쑥 내민 잘 익은 한 입

바람의 맛과 구름의 맛과 그리움의 맛이

한꺼번에 찾아왔어

이상하고 상한 세상을 향해 한번 더

꼬리치자

-계간 『한국미소문학리토피아』 2023년 가을호 발표

 

 


 

 

김솜 시인 / 스카이 댄서

 

전진도 후진도 없어요

어떤 바람이 나를 이렇게 키운 걸까요

 

나는 솟구칠 수 있지만

발에 묶인 족쇄를 풀 수 없어요

 

식당 안에도 바람이 불어요

적자 적자 적자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주인은 접자를 선언하고 무릎까지 접네요

 

입맛의 변덕은 언덕을 오를 때처럼 숨차고

별점테러와 악성 리뷰가 주문을 막아요

불안한 먹구름이 목구멍을 메워 종일 쿨럭거리네요

 

언제쯤 막다른 바람 자고

내 바람이 기를 펼까 궁리 중이죠

 

바람이 바람을 불어넣고 바람을 속이는 세계,

그래도 난 신나게 춤을 춰야 해요

언제나 맛있는 표정을 지어야 해요

 

나처럼 바람을 포기하고 바람을 조율하면

슬픔도 춤이 될 수 있는데

난데없는 비바람이 닥쳐도

강약에 몸을 내맡길 수 있는데

보이지 않는 바람은 지칠 줄 모르나 봐요

바람 빠진 말들이 바닥에 끝 없이 추락을 해요

 

-문학공원 시 동인지 『물병에 담긴 바다』 에 수록

 


 

 

김솜 시인 / 인과성

 

 

​나는 비를 맞는다

날씨는 비의 매듭을 묶어두었다가 느닷없이 푼다

 

어떤 기계는 나의 반려가 된다

데시벨이 높은 분쇄기, 전기밥솥, 랩탑, 그리고 티비

고양이를 선호하지만 강아지와 함께 할 수 없는 이유들은 많다

 

수족관의 베타가 플레어링을 멈추고 가라앉아있다

붉은 지느러미의 잔영이 물속에서 너울거린다

너울거리는 것 같다

 

백신을 맞은 엄마가

접종 열흘만에 고인이 되었다

"인과성 없다"

 

나 데리러 와...데리러 와...

엄마의 마지막 말은 죽지 않는다

 

우연들을 줄 세우면 필연이 될까

 

수술 날짜를 잡아 놓은 뒤로 물건을 자꾸 흘린다

가슴을 열고 부분의 죽음을 들어내야 한다

칼을 겪어내야 하는 몸, 또다시 믿어야 한다

인과성에 반대한다

 

성형수술 한다고 생각해, 너는 좋아진 너를 만날 거야

당신이 꺼낸 말은 인과성이 없다

 

놓친 기미들이 있다

예를 들어, 베타는 환수가 더 필요했을 것이다

물고기는 잘못이 없다

 

구름이 얼룩으로 앉은 창문을 닦는다

여기를 떠도는 기후를 따라

사월은 왔다 간다

 

 


 

 

김솜 시인 / Ctrl+c, Ctrl+v

 

 

평범하다

눈물이 희박한 상태로

하루가, 일 년이 어쩌면 평생이 평범함에 매몰될 것 같다

지루하다

웃을 일이 별로인 상태로

나와 상관없는 불협화음이 주는 불편은 밥 한 끼 더 먹는 일처럼 무의미하다

승패는 링 위에 있고 나는 박수나 쳐주는 구경꾼

뉴스를 듣는다

뉴스가 전하는 행운이나 극단의 참사는 그저 관객 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식탁 앞에 앉아 무력과 무감을 씹는다

뇌에 구름이 잔뜩 끼어 굼뜬 몸

무명씨로 무명씨 아닌 사람들을 따라 하다 잃어버린 건 나,

보잘것없음을 뒤집으면 무엇이 쏟아질까

저기까지 가면 뭐가 있을까

별일을 기대하며 별별 생각을 섬기다가

고(故) 아무개가 되기 전에 뭔가가

되고 싶다

될래

될까

되게 하자

될 것 같다

되어간다

돼가는 중인가

될 거라 믿자

되도록 하자

될 수 있을까

되는 방향으로 가자

되려는 태도가 불안이다

되돌리기엔 멀리 왔다

될 때를 기다리자

될 때까지 기를 쓰자

되도록 해를 보자

되자 앞에서

한발

한발

되다는 그런데 어디에 있을까

여전히 질문만 되풀이 중이다

 


 

김솜 시인

충북 옥천에서 출생. 서울 거주. 본명: 김옥희. 배재대학교 유아교육과, 방송통신대학교 영어 영문학과 졸업. 고려대 평생교육원 시 창작과정 수료. 2022년 《열린시학》 신인작품상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