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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수 시인 / 뒤집개
물방울 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물결무늬칼로 오이를 오리고 감자도 자르는 동안 벌레들이 창틀을 점거한다
죽은 벌레 살아있는 벌레 죽어가는 벌레들 거점이 되려면 점거부터 해야 하는 걸까
생각이 많은 여자는 텃밭에서 훑어온 부추로 전을 부치면서도 생각에 매달린다
설거지를 끝낸 여자는 샤워를 하고 스스로 걸어가 못에 매달린다 바닥까지가 너무 짧아 마음껏 몸을 펼 수가 없다
여자가 살아 있는 줄 아무도 모른다 여자가 살금살금 닳아가는 줄은 누구나 안다
나무로 만들어진 여자는 불쏘시개가 되어 아궁이를 쑤셔대는 꿈을 밤마다 뒤집는다
이희수 시인 / 마지막이라는 말
눈물이 묻어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버스 마지막 배 마지막 만남 더는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함께 하던 시간에서 뚝 떨어져 홀로 걷는다는 것이다 울어도 '울지마' 말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넘어졌을 때 그대가 넘어졌을 때 내밀어주던 따스한 손이 없다는 것이다 가슴속으로 뜨거운 눈물이 스멀스멀 샘솟는 것이다 그대를 저만치 두고 막차를 타는 그때처럼 내내 안쓰러운 것이다 마로니에 잎사귀 떨어지던 혜화동 그 찻집 여간해선 잊히지 않는 것이다
이희수 시인 / 애도 거대한 알이 깨지고 흰자처럼 달이 흘러나왔다 어둠이 왔다 여자는 폐건전지를 투명하고 긴 통에 모은다 위험한 유리 기둥이 나타난다 고요로 쌓은 돌무덤과 따로 함께였다가 함께 혼자인 구석이 생겨난다 주석이 본문보다 더 긴 하루이다 분리 수거를 마친 여자는 댓글을 읽는다 잘근잘근 씹으며 누군가를 죽이는 잔뜩 벌린 입이 있다 냉장고 문 손잡이를 잡고 여자는 가만히 얼어붙는다 쥐도 새도 모르게 누군가 죽어가는 꾸욱 다문 입이 있다 거대한 얼음이 냉장고에서 걸어나와 빙수 기계에 올라앉는다 뼛가루가 수북해질 때까지 돌리고 돌려도 끝끝내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갔을까 여자는 새발뜨기를 한다 새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발자국을 찍고 시접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닫힌다 옷감은 희고 발자국은 푸르다 끝단이 닫히고 쌀무더기에 새발자국이 찍힌다 바느질을 끝낸 여자는 부러진 손톱을 금 간 식탁 유리에 올려놓는다 추억을 새기듯 꽃물을 들여도 길어난 시간은 잘려 나간다 손톱을 깎는 동안 곰팡이가 빵을 먹어버린다 좋은 빵인 줄 알게 된 순간 버려야 할 빵이 된다 좋은 사람일지 모른다는 예감은 둘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난 뒤에야 찾아온다 여자는 식탁 유리를 갈기로 한다 차가운 유리 기둥 안에 장기를 기증한 시신이
들어 있다 제대로 버리는 일이 남았다
ㅡ2025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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