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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 시인 / 사과를 먹는 사과씨들
어떤 의미에서 사과는2층에서 언니들이 던진 종이다 사과를 씻으면 단어는 뭉개진다 이 언니가 저 언니와 섞이고 문장이 젖는다 종이는 썩지 못한 것들의 시 아니,씨 언니들의 방에서 뒹굴던 사과씨 귤씨 비타민C는 내가 버린 종이였다 젖은 종이를 펼치면 사랑한다는 말이 이 집에서 저 집으로 건너가 있다 계단이 계단으로 접히다 썩은, 집들이 언니들의 씨와 나의 시 사이에서 어두워진다 어두워진다 어두워진다 더 어두워진 다음에 언니들을 깎아낸다 사과씨에 닿기 위해 시를 쓰면 사과는 씨에서 멀어지고 사랑한다는 말은 집에 가까워졌다 집을 뭉치면 금형공장 프레스로 누르면 더 단단한 씨가 되겠지만 사과씨 귤씨 바다라는 Sea는 다른 장르의 종이 혜은 씨 수미 씨는 얼마나 멀어졌을까 사과를 씻으면 농약보다 먼저 사과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상상인> 신춘문예 당선작
혜원 시인 / 상냥한 인사 자세를 교정하다 새의 온도를 짐작했습니다 짐작만 했어요 뜨거운 온도로 쏟아지며 태어나던 날부터 세상을 짐작하는 것이 습관이어서 어깨에는 깃털처럼 자라는 겨울이 있습니다 깃털을 뽑으면 함박눈이 쏟아집니다 눈은 발아래 쌓입니다 눈을 밟으면 새가 펑 펑 울었습니다 새는 그렇게 웁니다 짐작으로 한 발을 반쯤 들어 올린 새가 절반만 존재하는 공간 속에서 처음으로 새를 만났고 새가 날개를 펴는 순간은 자주 목격했지만 공중에서 날개를 펴는 동작이 발레의 짐작이라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습니다 다리를 반쯤 들어 올려도 새처럼 아무리 다리를 찢어도 날지는 못 했습니다 나는 상냥하고 못돼먹었으니까 동베파도브레-정령의 신발 한 짝을 훔쳐 신고 글리사드-찢은 새를 밟고 발을 버린 무용수처럼 날아올라-그랑제떼 숨이 멎었습니다 짐작만으로 신발 한 짝에 어깨 한쪽을 집어넣을 수 있다면 다른 발을 들어 올려 빛을 끌어당긴다면 불가능한 자세를 새의 창문이라고 한다면 아침마다 당신의 창문을 들여다보며 당신이 나를 내다보는 것이라고 짐작하겠습니다
혜원 시인 / 체리가 굴러다니는 지구 둥근 것은 왜 기울어질까 태양과 체리와 방울토마토는 슬픔 없이 기울어진다 지구와 체리는 부딪친다 크랙이 생겼다 방울토마토는 싱거워서 크랙 사이로 체리즙을 흘려 넣는다 그런 식으로 지구에 연애라는 감정이 발생했다 그러니까 연애는 워싱턴 체리 같아 이국적인 말로 세련된 욕을 구사하지만 연애의 안쪽은 백 년 내내 우기였지 백 년 동안 비를 맞아 태양은 지구보다 작아지고 백 년 동안 비를 맞아 지구는 체리보다 작아졌다 빗물은 어디에 고여야 하나 비는 싱거워져서 지구를 적시지 못하고 백 년 동안 과육 속에서만 내린다 태양은 방울토마토처럼 창백해진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일억 년 후에 하얗게 될 방울토마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일억 년 동안 친절했던 체리에 대해 사랑은 체리나무 같지 친절을 조금 기울이면 가지 끝은 붉게 맛이 들었다 그 맛을 잊을 수 없었다 지구를 토마토와 함께 두면 지구에 먼저 금이 갔다
혜원 시인 / 오페라 - 겨울악장
나는 아주 오래된 호두나무 아래 서있어요 라임 빛깔 호두껍질이 갈라지며 서막을 알리자 나뭇잎들은 저희끼리 부대끼며 차이코프스키를 연주해요 클라라가 보이네요 그녀는 호두 바구니 옆에서 울며 잠이 들었어요 발자국 소리가 들려요 쉿, 그녀가 깰지도 몰라요 나는 호두나무 아래 서있어요, 아주 오래된 은빛 다람쥐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생쥐복장을 했지만 다람쥐가 틀림없어요 그들이 바구니에서 호두를 꺼내 창 아래로 던져요 한 알, 두 알, 개들의 새끼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인형처럼 나는 서있어요, 아주 오래된 호두나무 아래 죽은 꽃들의 왈츠가 시작되고 클라라는 춤을 추고 있어요 드레스 끝자락이 살짝 들릴 때마다 골드 같은 호두가 떨어져 내렸어요 나는 아주 오래된 호두나무 아래 서 있고 아주 오래된 호두나무는 내 발아래 있어요 춤을 추며 클라라는 자꾸 이상한 말을 해요 지난겨울에 호두나무들이 모두 사라졌대요 호두나무는 내 발아래 있는데 풍경을 지우며 다람쥐들이 줄지어 겨울 속으로 들어가고 겨울의 끝에는 빛나는 거울 아주 오래된 호두나무 위로 다람쥐들이 올라가면 커튼처럼 거울이 내려와요 겨울이 시작됩니다 -2023 월간모던포엠 11월호
혜원 시인 / 기체를 끌어안는 방식
당신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덮밥을 즐겨 먹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밥 위에 얹어 먹기도 하고 가끔은 당신이 싫어하는 것을 얹기도 해요 가장 좋아하는 메뉴는 멍게덮밥이고요 달콤하면서 쌉싸름한 알맹이는 씹을 때마다 당신을 주황색으로 떠올리게 해요 멍게 오렌지 꽈리는 버리세요 주황색만 생각하세요 첫 키스는 꽈리 같았죠 꽈리를 불면 질량이 0이었던 한 점에서 시작해 순식간에 팽창하는 인플레이션 10⁻³⁶이나 10⁻³⁴초 만에 멍게는 멍게로부터 멀어지죠 멍게를 훔쳤다는 말은 아니에요 이론물리학과 식품영양학은 버리세요 그러면 식탁은 물질이 아니라 신비로운 대기현상이 됩니다 신비롭다는 것은 대기가 폭풍의 기류를 품고 있다는 의미 대적점이라는 목성의 주황색 반점 사실 멍게는 거기서 나왔죠 노을이라는 단어를 생각했다면 대화를 이어갈 수 없죠 그러니 주황색은 잊어요 덮밥만 생각해요 폭풍의 대기를 뚫고 착륙하듯 나는 숟가락으로 퍼먹기도 하고 젓가락으로 꿰뚫기도 해요 가장 선호하는 방법은 재료의 숨통을 끊어놓는 거죠 죽은 별에서 새 별이 탄생하듯 재료의 완전한 죽음으로 밥은 완성되니까요 덮밥은 죽음 위에 죽음을 얹는 한 끼니까요 첫 키스로부터 멀어지고 있을 당신과 당신 사이 암모니아로 이루어진 행성을 찾다 보면 입은 기체로 들끓고요 사실 꽈리는 거기서 나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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