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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진주 시인 / 고요한 모래 소리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0.
강진주 시인 / 고요한 모래 소리

강진주 시인 / 고요한 모래 소리

 

 

봄을 기다려 본 적도,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도, 낙엽을

밟아 보았다는 사람도 없다

 

죽은 할머니가 불러준 자장가 소리가 들리면 비가 올까

고작 일 년에 두세 번이라도

 

쉽게 만지거나 볼 수 없는 둠백*이 연주 되고 나면 비가

내릴지도 모른다는 풍문이 돌기도 했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주술

 

어미 낙타는 새끼에게 젖을 물리고 사막의 중심까지 발

을 밀어 넣는다

 

뒤돌아보면 걸어온 발자국마저 사라져버리는 사막

 

양들이 초원을 찾아 떠나기만 하는 곳, 모래의 나라에

봄은 없다

 

시간의 암호를 풀 듯 저녁노을이 지면 구슬프고 애잔

한 아잔**의 시간만 있을 뿐, 알라후 아크바르

 

매화꽃이 만개했다는 고국의 밤을 아득하게 듣는다

 

* 전통 타악기

** 이슬람교에서 기도 시간을 알리는 소리

 

-시집 『이 도시가 착해 보여요』 2022년 상상인

 

 


 

 

강진주 시인 / 소녀상 앞에서

 

 

그녀의 맨발 앞에 섰습니다

 

땋아내린 댕기 머리에 작은 보따리를 움켜쥐고

슬픔을 잊은 슬픔 앞에서

우두커니, 소녀가 되어 봅니다

 

까마귀 다녀간 시간이

검은 무늬로 드러나는 뼛속

 

괜찮을 거라고

쓸쓸하지 않을 거라고

꽃다발 두 개가 같은 무늬로 놓입니다

 

상처 위에 핀 꽃이라서

소녀를 비추는 햇살은 무력하기만 한데요

속도 모르고 비추는 달빛이

따뜻하게 감싸주면 좋겠는데요

 

부디 우뚝, 서시라

우리 언니, 내 동생이

애인이고픈 소녀상 앞에서

표정도 없는 사람을 읽어갑니다

 

그저 뒤돌아볼 뿐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데

침묵 같은 밤만 또 까맣게 등을 켭니다

 

-시집 『이 도시가 착해 보여요』에서

 

 


 

 

강진주 시인 / 밑줄 친 문장에 뜬 별

 

 

참으로 무례한 빛이었습니다

 

나쁜 기억을 떠올리고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여 주세요

잠시 넋을 놓고 별을 바라보세요

 

아무도 생각나지 않을 무렵

일그러진 내 얼굴 하나가 가여워지는데

 

멍하니 바라보다 그만, 용서하고 말았습니다

 

밑줄 아래 숨어서 환한 달을 바라보는 건

내 소관이 아니라고 치부해버렸습니다

 

별들이 세상에 왔더라도

잴 수도 없는 눈물의 테두리는 이미 붉어서

 

젖은 옷은 시나브로 마르고

나는 그냥 밑줄 친 문장이 좋아

웃음을 살라 먹기로 했습니다

 

시간을 펴는 방식으로도 차마 다 볼 수 없다면

 

눈꼬리를 올리고 표정을 감추면

비틀거리는 내가 후드득 피어나겠지요

 

 


 

 

강진주 시인 / 예지몽

 

 

일기예보보다 예감이 앞서갈 때

먹구름은 드리우고

사흘 밤낮 비가 내린다

 

수문은 불어난 물에 눈금을 지우고

비 오는 동안 이가 아팠다

 

말이 새고 입안이 얼얼했고

혀끝이 통증의 자리에 닿았다

 

의사는 입술을 다물면 누구도 모르는 동굴이라고 했다

 

한 번 뿌리가 흔들린 이빨은

자신의 처지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무방비 상태로 맞이한 이별이 욱신거린다

심하게 흔들리던 당신이라는 뿌리

 

이젠 진짜 뽑아내야 할까

 

어차피 도래할 어떤 일에 대해선

예지몽이 구태여 알려주지 않는다고 한다

 

몸이 먼저 알아차리면 이별하기도 전에 심하게 아프니까

 

새어 나간 말의 뿌리를 혀로 감추고 의사 앞에 앉았다

 

서랍 속의 비밀처럼 누군가 내 속을 열고 들여다볼 때

뿌리는 끝까지 들키지 말아야 했을까

 

꿈속에선 어금니 두 개가 몽땅 빠지는 데도 난 헤헤헤 웃고 있었다

 

 


 

 

강진주 시인 / 깔

 

 

암호를 풀어 주세요

 

깔이 품고 있는 것은 소녀들의 웃음소리와

샤먼의 두건을 쓰고 있는 색(色)

 

산란하듯 번지는 맛깔에 대하여

모른 척한다면 당신은 깔의 아웃사이더겠죠

 

깔하고 발음을 하면 비밀을 담고 있는 붉은 입술이 보여요

 

순식간에 노을이 번지고요

동백꽃이 뚝뚝 떨어져요

 

그런데 젖갈과 맛갈을 젖깔과 맛깔로 발음하면

다정다감이 우러나요

 

당신이 말장난이라고 생각한다면 난 깔깔깔 웃을 거예요

 

입이 쭉 벌리고 모든 잡념을 쏟아내어 보세요

 

당신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서로 부둥켜안으면 깔은 완성되죠

 

깔은 본색이거나

싱싱한 부록이니까

왜 끈끈한 애인을 깔따구라고 하는지 알게 되겠죠

 

그러니 발랄해진 깔을 안고 밤새도록 춤을 출 거예요

 

당신을 향한 창문이 모두 열려 있으니까

 

 


 

 

강진주 시인 / 스탬프

 

 

표정 없는 여자가 커피를 내린다

단순한 기록이

반복되는 이곳은

12시 45분에 늘 줄을 선다

나의 명랑은

날씨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데

검은 앞치마를 두른 여자는

동요 없이 흰 손만 바삐 움직인다

 

목이 마른 나는 청자카페 메뉴판 앞에서

예의 바르게 음료를 고른다

그러다 청자 담배를 피우던 엄마를 떠 올린다

 

천 원어치 콩나물을 사면서

덤을 얻으려던 엄마가

난 창피했는데

스탬프가 열 번 찍힌 카드를 기꺼이 점원에게 내민다

 

덤처럼

여분처럼

회사에 붙어있는 계약직인 나

점심시간이 끝나기 5분 전인 나

달달한 카푸치노가 필요한데

덤 커피는 아메리카노만 제공된다

 

아무리 힘들어도

엄마라는 직책을

그만둘 수 없었던 엄마는

무료 스탬프도 없이

어떻게 50년을 견뎠을까

 

씁쓸한 기분이 목을 타고 끈적하게 내려간다

 

 


 

 

강진주 시인 / 허기라는 짐승

 

 

허기를 따라가다 보면

똬리를 튼 자장면 한 그릇이

내 앞에 있다

 

불어터진 기억의 가닥

잘 섞이지 않는다

툭툭 끊어진다

 

그릇은 쉽게 불러내서

만날 수 있는 애인 같은 표정을 내민다

 

무언가를 까맣게 품어야만 이해될 수 있는 장면

무작정 무릎부터 꿇었던 내 모습

 

허기가 가신 후 뒤늦게 후회가 되곤 했다

 

짜증날 땐 짜장면 우울할 땐 울면

흔한 콧노래만으로

해결할 수만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수치심을 동반한 젊은 날의 허기

이별 앞을 떠나지 못했던 서성임

 

허겁지겁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처럼

나를 되새김질하곤 했다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나에게

어떤 배고픔이었을까

 

나와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허기라는 짐승이 자꾸 커져만 가는데…

 

-계간 『열린시학』 2023년 가을호 등단시

 

 


 

 

강진주 시인 / 회전의 역설

 

 

 회전문은 돌지 않아요

 

 돌고 있다는 착각은 통과할 수 없는 통과의례처럼 보여질 뿐, 안도는 속임수로 가슴을 쓸어내래고. 회전문 너머에 있는 사람들이 웃어요. 팔짱을 끼고 커피를 마시면서 여유롭게 회전을 배반하죠.

 휠체어 바퀴가 멈춰 서죠. 숨을 수도, 어쩌면 은닉의 자세로 사라지길 바랄 수도 있지만, 오늘은 회전문을 통과해야 해요. 아이는 터널에 갇힌 듯 앞으로도 뒤로도 나갈 수가 없어요. 망연은 여기저기에서 솟아오르고 휠체어는 돌지만 돌지 않은 회전문 앞에서 눈을 감아요.

 돌지만 돌지 않는 곳에 서 있는 것은 절벽

 한 바퀴 구를 때, 적벽에서 떨어져 내리는 폭포의 비명이 들려요. 한 번의 어긋남, 휠체어는 틈에 끼여 오금이 저려요

 앞으로도 뒤로도 길이라고는 보이지 않아요.

 돌고 도는 이발소 간판처럼 어지러워요.

 회전이 멈추고 휠체어는 문을 넘어요. 아이는 다시 이 문 앞에 서야 할 시간을 떠올려요. 다른 문은 없나요. 고장 난 문들은 쉽게 열리지 않고

 회전문은 돌아도 돌지 않아요.

 

-계간 『시와소금』 2023년 겨울호 발표.

 

 


 

 

강진주 시인 / 불면의 데시벨

 

 

 벨을 세 번 누르는 여자의 눈에는 붉은 독이 가득했다

 사십에 혼자된 여자는 밤만 되면 잠들지 못한다고 했고, 나는 수면제를 타서 마신다고 했다

 아이들은 몇이나 되죠?

 여자는 의심의 눈초리로 현관에 놓여 있는 신발을 세고, 나는 두꺼운 슬리퍼를 신고 까치발을 들고 다닌다고 했다.

 충혈 된 눈빛으로 레이저를 쏘는 여자

 내가 귀를 자를까요, 밤새도록 귀를 잘라도 귀가 생겨나요. 불협화음으로 귀가 생겨나요

 독을 세운 음성이 파문으로 번진다

 그녀는 층층이 쌓아놓은 스트레스를 쏟아놓고 울고 나는 아래층에서 뾰족하게 돋아난 귀를 잘라놓고 운다

 불면의 두 울음이 크나큰 데시벨로 방을 울린다

 나는 그녀의 데시벨 안으로 들어가 울음을 다독인다

 

 위층의 트라우마가 무너져 내린다

 

-계간 『시와소금』 2023년 겨울호 발표.

 

 


 

강진주 시인

전남 광주 광산 출생. 2011년 <문학예술>을 통해 등단. 2023년 《열린시학》 신인작품상.  동서문학상. 신전문학상. 안정복문학상. 제8회 항공문학상. 시집 『이 도시가 착해 보여요』. <시꽃피다> 특별회원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