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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옥주 시인 / 아끈다랑쉬오름 아래
살아온 모든 흔적이 소담한 언덕으로 이렇게 오롯이 차오르면 좋겠네 바람이 능선을 타고 몰려드는 오름의 알맹이는 오래된 침묵 어느 생의 내가 잠든 무덤이었나 여러 생의 꿈과 기억이 뒤섞여 흘러다니는 내부에 지상의 시간을 가만히 짚어가다 솟아오르는 애벌레의 다시 태어나려는 기다림이 아득하다
한 번의 봄으로는 꽃나무 하나 사랑하기에도 모자라다
달빛 촘촘한 밤 오름 억새 가득 바람을 풀어 부풀어 오름 수천 가닥 비에 젖어 오름
한 번의 생으로는 너를 알 수 없으니 오목눈이 사슴벌레 으름난초로 겹겹의 생을 거쳐야 하리
-<유심(惟心)> 2015년 11월호 -
고옥주 시인 / 고치
나는 자면서 시를 쓰지
네가 옷을 벗기 시작하는 시간
불을 끄지 않으면 밤이 내개 쏟아지지 않음
벌레들이 우글우글 기어올라 발자욱을 다져넣지
별빛 긴 벌레 울음 둘둘둘 말아
모든 열림을 겹겹이 닫으면 안으로 켜지는 불
속속들이 울음이 불꽃이 되는 동그만 집
무덤 속에서 나는 시를 끝내지,
고옥주 시인 / 나무, 겨울잠
겨울 밤 마로니에 나무 도열한 사잇길 걸어가면 땅속 어두운 뿌리나라 걷고 있는 듯 땅 위아래 풍경이 흡사해질 때 하늘로 오르던 마음, 뿌리로 내려놓으며 나무들은 겨울 동안도 버릇처럼 빵속으로 꽃 피우고 열매 맺는 시늉, 느닷없는 열매로 무거워 쓰러지지 않게
<닻이 되어 줄 그만한 무게의 꿈>
겨울 흙 속이 그런 꿈덩이들로 웅성웅성 환하게 빛나고 있는 게 아닐까 땅 위 뿌리가 허공과 바람과 별 그 아래 걸어가는 웅크린 나까지 쪽쪽 빨아들여 땅속에도 겨울별이 뜨고 어느 사람 하나 서성이고 있는지 몰라
고옥주 시인 / 기우뚱
구부러진 길 하나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구부러지게 만들었을까 내닫던 마음 멈추고 살짝 비껴서기 바람도 휘어 돌아가는 길 굽이 어귀 꽃의 목만 경계를 넘나드는 그 하늘한 둥글림
물굽이 하나가 수초와 물고기의 항로와 물의 흐름을 비틀고 그 위 구름과 비의 각도를 조금씩 기울여 세상을 한걸음 늦추고 지도를 바꾸고 있다 무수한 직선을 둥글리는 구부러짐이여! 가끔 기우뚱거리기 멈칫멈칫 직선에 쉼표 찍기
고옥주 시인 / 흰 목련
겨우내 꽃 피는 시늉으로 견디다 주춤한 숨결에 느닷없는 흰 횃불이다
목련은 어떻게 사랑하나 먼저 피어나 막 가슴 부풀리는 어린 것의 순결을 바라보고 굵은 빗방울만 흩어보내다 가슴 속의 말 전하지 못하여 봄날 햇살 아래 기진맥진 맨 몸뚱아리로 떨어져 내리는 퍽 소리가 가장 진한 사랑의 말이다
겨우내 그 자리 지나며 가슴에 불 켜는 시늉.
고옥주 시인 / 자작나무
하얀 수피에 참을 수 없을 때마다 마음의 눈금을 그어가며 숨을 토한 흔적을 남기다 인간보다 오래 남을 이야기를 수천 년 지켜내고 누군가의 몸을 덥히려 타오를 때 삼켜온 긴긴 이야기를 한없이 자작자작 풀어낸다 영양죽파리 자작나무숲에서 원없이 보았던 자작나무들 가지를 떨구어낸 상처마다 세월바라보는 눈들이 생겨났다 조용히 그자리에서 상처를 보듬으며 서로 눈으로 얘기를 나눈다 눈이 내리면 그곳에 다시 가고싶다
고옥주 시인 / 독백 19
사방에 보이지도 않는 불덩이가 치솟는데 봄꽃들 무심히 세상 구경하고 있네 이제 보니 지구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었어 마음으로 쌓은 바벨탑을 들킨 건가 대량 살처분 된 동물의 역습인가 아무도 안전하지 않은 무차별 공습 사람을 모아놓던 여러 방편이 끊어진 적막 * 더러운 일을 너무 많이 해치운 손과 미소와 웃음으로도 가리지 못한 입의 횡포 입을 막아도 미움과 싸움은 감염 중 안거에 들어 면벽 묵언 손 씻기 수행 사람 사이에 낡은 희망 대신 허공을 품고 일말의 그리움을 다시 사랑으로 확진하기 * 지금 삶은 금지되고 봉쇄되었다 물길 하늘길도 막히는 길이었다 이 길은 어디로 가는 길인가 이 봄날 누구라도 부디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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