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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채봉 시인 / 쫓기듯 살고 있는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3.
정채봉 시인 / 쫓기듯 살고 있는

정채봉 시인 / 쫓기듯 살고 있는

 

 

쫓기는 듯이 살고 있는

한심한 나를 살피소서

 

늘 바쁜 걸음을 천천히 걷게 하시며

추녀 끝의 풍경 소리를 알아듣게 하시고

거미의 그물 짜는 마무리도 지켜보게 하소서

 

꾹 다문 입술 위에

어린 날에 불렀던 동요를 얹어 주시고

 

굳어 있는 얼굴에는

소슬바람에도 어우러지는

풀밭 같은 부드러움을 허락하소서

 

책 한 구절이 좋아

한참을 하늘을 우러르게 하시고

차 한잔에도 혀의 오랜 사색을 허락하소서

 

돌 틈에서 피어난

민들레 꽃 한 송이에도 마음이 가게 하시고

기왓장의 이끼 한낱에서도 배움을 얻게 하소서

 

 


 

 

정채봉 시인 / 기도

 

 

쫓기는 듯이 살고 있는

한심한 나를 살피소서

 

늘 바쁜 걸음을 천천히 걷게 하시며

추녀끝의 풍경 소리를 알아듣게 하시고

거미의 그물 짜는 마무리도 지켜보게 하소서

 

꾹 다문 입술 위에

어린 날에 불렀던 동요를 얹어 주시고

굳어 있는 얼굴에는

소슬바람에도 어우러지는

풀밭같은 부드러움을 허락하소서

 

책 한구절이 좋아

한참을 하늘을 우러르게 하시고

차 한잔에도 혀의 오랜 사색을 허락하소서

 

돌틈에서 피어난

민들레꽃 한송이에도 마음이 가게 하시고

기왓장의 이끼 한낱에서도 배움을 얻게 하소서

 

 


 

 

정채봉 시인 / 꺼졌으나 꺼지지 않는 촛불

 

 

동화를 쓰면서

촛불처럼 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차가운 겨울바람이

촛불을 훅 꺼버렸습니다

고맙습니다

촛불은 꺼진 뒤에야

꺼지지 않는 촛불이 됩니다

 

 


 

 

정채봉 시인 / 꽃과 침묵

 

 

제비꽃은

제비꽃으로 만족하되

 

민들레 꽃을 부러워 하지도

닳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어디 손톱만한 냉이꽃이

함박꽃이 크다고 하여

기죽어서 피어나지 않은 일이 있는가.

 

싸리꽃은 싸리꽃대로

모여서 피어 아름답고  

 

산유화는 산유화 대로 저만큼

떨어져 피어 아름답다.

 

사람이 각자 품성대로

자기 능력을 피우며 사는 것.

 

이것도 한송이의 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집 <스무살 어머니> 중에서

 

 


 

 

정채봉 시인 /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 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내어 불러 보고

숨겨 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 시집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정채봉 시인 / 무지개

 

 

첫눈이 듣던 날

받아먹자고 입 벌리고 쫓아다녀도

하나도 입 안에 듣지 않아

울음 터뜨렸을 때

얘야,

아름다운 것은 쫓아다닐수록

잡히지 않는 것이란다

무지개처럼

한자리에 서서

입을 벌리고 있어 보렴

쉽게 들어올 테니까

나이 오십이 되어

왜 그날의 할머니의 타이름이

새삼 들리는 것일까

 

 


 

 

정채봉 시인 /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쫓기듯 살고 있는

나를 살피소서

늘 바쁜 걸음을

천천히 걷게 하시며

추녀 끝의 풍경소리를

알아듣게 하시고

거미의 그물 짜는 마무리도

지켜보게 하소서

 

꾹 다문 입술 위에

어린 날에 불렀던

동요를 얹어주시고

굳어 있는 얼굴에는

소슬바람에도 어우러지는

풀밭 같은 부드러움을 허락하소서

 

책 한 구절이 좋아

한참 하늘을 우러르게 하시고

차 한잔에도

혀의 오랜 사색을 허락하소서

 

돌틈에서 피어난 민들레꽃

한 송이에도 마음이 가게 하시고

기왓장의 이끼 한낱에서도

배움을 얻게 하소서

 

 


 

정채봉 시인 (1946-2001)

1946년 전남 순천 출생. (아동문학가).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꽃다발'로 당선. 대한민국문학상, 새싹문학상, 동국문학상, 세종아동문학상, 소천아동문학상. 동화집 <물에서 나온 새>가 독일에서, <오세암>은 프랑스에서 번역 출간. 동화작가, 방송프로그램 진행자, 동국대 국문과 겸임교수로 활동하던 1998년 말에 간암발병. 2001년 1월 향년 54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