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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림 시인 / 저기요
저기라고 말하면 사슴이 보인다 저기라고 말하면 천년이 흩어진다
여자를 쫓아갔다 돌아오는 벌레 숲은 음악이 가지 못한 아우성 또 한발을 걸어가는 나비다
입술에서 개구리로 뛰어내리는 꽃의 체온 중얼중얼 넓어지는 바다의 허벅지 미열은 우아한 사각이 걸어가는 길이다 처음 저기라고 말한 사람 다른 별에서 해독증을 앓는데 저기의 내장은 씹을 것이 없어 미안하다고 빈 공터거나 가뭄일지 몰라, 새는 그런 기억으로 절벽을 허물어 나간다 저기 저기 저기는요 서성대거나 없는 질문 잼에 빠진 빵집을 돌아 갈까요 저녁이 되면 호기심은 수분을 잃게 되겠지만 조금 더 불안하거나 불이 없는 예감으로 꼭 한번 도착하고 싶은 얼굴이 있다 밟아보고 싶은 오지가 있다
이효림 시인 / 다이빙
공중이 초콜릿을 삼킨다 피가 흔들려 절벽은 더 깊어지고 목숨은 물방울처럼 달랑거린다 발은 공중에서 광대처럼 떠다니고
바람은 난간에 서 있다는 생각에 전신이 오글거려
어제 내리꽂힌 눈 위에 오늘이 자라면서 일어서는 날개 황망한 밤은 며칠을 가겠지만 습관성으로 나부끼는 머리카락
뛰어내릴까 계단이 먼저 귀를 세우고
가끔 심장마비로 죽은 낙엽 때문에 나무들이 기립으로 울었으면 우울도 없이 정리되는 오늘일 것이고
비명을 몰아넣은 칼집처럼 무대는 조명이 불안해서 발음 되지 않는 대화 방향은 찢겨지고 걸음은 깨어나지 않고 내가 쫒던 고공의 내장 달릴수록 선인장 낙타 주렁주렁 떼거리로 매달린 내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동물은 머리도 없고 모스크바는 얼음을 밟고 일어선다 흔들흔들 의자는 춤을 춘다 교실은 머리에 환약을 뿌리고 내가 팽창하기를 바라는 해바라기 행인이 많은 검색창에 기념식수를 한다
찌그러진 오후를 일으켜 두 손을 모은다
이효림 시인 / 궁상은 편지도 없고 겨울 내내 나비를 잡고 있었다
사과를 따라가 보았던 집은 음악도 없고 빨강도 보이지 않았다 우물 속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를 곤충이 따라하고 있었다 회나무 아래서 들으면 음악 같고 뒷마당을 지나가면 죽은 돌멩이의 몽상 같았다 어디서부터 변한 음색인지 우물은 한 문장으로 입을 닫았다 팔을 파닥거리는 퐁당. 물소리를 내며 개가한 여자가 백두산 한라산 태백산 혀끝에 우거지는 수풀을 쳐내고 있었다 사람은 떠나고 햇빛은 서로의 지느러미를 햝아주고 있었다 나는 어느 가문의 유랑자인가 타락한 유리잔은 맨드라미의 식솔로 가고 파괴되어가는 마당의 정맥들, 쥐새끼를 낳던 고양이도 없고 호랑이를 키우던 어미닭도 죽고, 오늘은 입 벌린 검은 비닐봉지가 주인이었다
이효림 시인 / 서류를 주세요
내 얼굴은 구비서류가 아니었어요 서류 주세요 얼굴을 턱 앞으로 밀었어요 얼굴에서 내가 보이지 않았어요 그는 이름을 크게 불렀어요 다시 대답했어요 그는 빤히 봤어요 목구멍을 뒤지듯 신분증을 살폈어요 본적이 어디인가요 나를 본 적이 없는데요 본인이 맞는지 본인이 몰라요 만난 적이 없어서 미안해요 본인 오라 했을 텐데 새를 데려왔군요개가 멍 뛰어나오다니, 주소 불러보세요 부산 식물원로… 내가 발견될 수 있을까요 지문이 숲처럼 흔들리는 걸 몰랐다니 그러니까 내가 왔잖아요 너무 파랗잖아요 머리도 꼬리도 없는 것이 … 그는 빤히 봤어요 등에 점이 있는데 호랑이 껍질을 붙었는데 입에서 자꾸 풀이 돋아났어요 발끝에서 도넛이 부풀어 올랐는데 내가 어떻게 발견될 수 없을까요 유사 얼굴 조심하세요 비밀 없는 얼굴을 어디다 씁니까돌아가세요 서류 모셔오세요
-시집 <위대한 예측불허>에서
이효림 시인 / 다락이 정물화가 되듯이
오늘 밤 다락은 무수한 창가 달은 현 운동화에 발을 넣고 계단을 걷는다
어떤 소명은 작은 문장으로 새 나라가 되려고
목가적인 학교가서 있고 배고픈데 태어나지 않는 소행성과
페르소나의 울음을 풀지 못한 사람들 새벽잠을 버린다
떨어진 배꼽이 쓸모없는 줄 모르고 울다 거기서 여러 번의 꿈을 꾼다 신도 모르는 언어로
직립에 사력을 다하는 저쪽처럼
입술 오므린 새싹이 언덕을 오르며
도약이라고 새까맣게 타는 말을 한다
우리가 기울일 저녁이 영문 없이 우리를 지나치듯이
우주는 증식밖에 모르고
간절하여 눈 감으면 눈만 아픈 밤
다른나라말로 희망을 추궁했는지
문 열면 덜컹 당도하려 든다락이 뛰어내린다
-2022년 시와사상 가을호
이효림 시인 / 함몰
K는 여름과 새와 라디오는 왜 숨을 곳을 찾을까
겨우 마른 전설이 사방으로 흩어져 텅 빈 거울에 숭숭 이브가 자란다
날개는 변명처럼 부풀어 근원이 해체된 악기들 퉁퉁 바다를 친다
얼음새가 돌아가는 형식으로 허공을 향해 억양을 높인다 새 잎이 나기 전에 던졌을 독백은 향기처럼 돌고 돌아 눈이 파란 무덤과 물의 노래를 부르고
예언은 세계를 이을 듯 문턱에 서서 K는 쥐고 있던 바다를 훅 놓는다 종이 밖으로 넘치는 고양이를 보다가 바다를 지나가는 다른 인류를 보낸다 엉겁결에 손을 흔들며 손을 흔드는 것이 아닌데
K는 치명적인 향기를 가진 지구 속으로 빠진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행성을 꺼내 보다 덮는 버릇과
누구나 한 번쯤 음소거되어버린 계절이 찾아와 무채색 벽화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시간은 그냥 벽 위에 걸려 있고 얼굴을 닫는다 너무 어두워져 K와 각자 그린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도도새파란 꽃병이 남겨진 아침
이효림 시인 / 물은 셀프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부드럽고 상냥한 교육입니까 이 얼마나 갈증난 명사입니까 적의는 사라지고 말랑한 혀는 금방 분홍 말을 하는데 물 한 잔 가지고 벌컥 할 수도 없고 몸은 공손히 일어나 모범적인 사회인이 되는데 그래서 평범한 국밥을 먹는데 명령어의 힘을 이렇게 경험하며 반찬은 셀프입니다 벽에 붙은 인사처럼 뚱뚱하게 웃는다 맛있게 드세요 오늘은 잔반 없는 날입니다 민주시민이 됩시다 윙크하는 벽 커피는 셀프입니다 안녕히 가시라는 벽에게 안녕히 계십시오 공손한 우리는 언제부터 벽과의 소통이 이렇게 원활했습니까
-시집 〈위대한 예측불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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