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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지하 시인 / 골목의 발생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3.
<제8회 시산맥 작품상 후보> 中

<제8회 시산맥 작품상 후보> 中

최지하 시인 / 골목의 발생

 

 

골목의 역사는

음란한 점집으로 가는 화살표를 따라 순환하는

낡은 손금에서 시작되었다

 

그곳에 너를 두고 온 후부터

우리는 연결되었고

예의바른 표정으로 너를 안았던 그때부터 단절되었다

 

수상한 전생을 미래라고 읽은 것 같다

 

누군가 종교를 묻고

용서가 필요하다고 일주일의 간격으로 창문을 걸어둔

그 좁은 길은 행간마다 쓸모없는 명암이 생겨

몇 개의 발가락이 더 생겨나도 발설되지 않았다

 

결국 죽음의 내부에서 배경이 될 골똘한 증상들은

 

통증의 질량만큼 꿰매진 자국을 불행이라 결정할 때까지

나와 가장 밀접했던 슬픔과 구분할 수 없었다

 

돋보기 바깥의 세상은 나를 속이기 좋은 곳

손톱을 자르는 계절에 모음처럼 드물게 아침이 오고

너는 조금 증폭되어

조마조마한 나의 낱말들을 메운다

 

이별이 발생된 세상에서 빠져나가는 골목을

 

드디어, 가급적 세상과 세상 사이에 붙여 쓰기로 했다

 

-『시산맥』 2017-여름호

 

 


 

 

최지하 시인 / 공명

 

 

아파?

그러니까 좀 더 단호했어야지,

대답을 들을 수 없는 간격에선 대체로 아픔이 단순해졌다

우리의 관계는 무료했으나 침묵에 대해선 호의적이었다

하고 남은 말들과 듣지 않은 말과 꽃이 지지 않는 이상한 날씨에서

비롯된 형상은 침묵이었다

거울을 보지 않은 날에는 함부로 양말이나 꽃을 사지는 않았다

달콤한 냄새가 붐비는 한기에도 우리의 기분과 어울리는

단어가 시작되는 문장에선 오래 머무르기도 했다

우린 너무 늦게 만났어, 이런 말들이 낙서같이 쉽게 이해되는 오후에는

조금 더 성실하게 헤어졌다

어깨에 끼어든 통증처럼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한 우리는

소용없는 일이었지만 날마다 이별의 형식으로 밥을 먹었고

어제는 자꾸 봄이었으나

헤어지자고 말할 뻔했다

함께 갈까?

함께 가지 않아도 상관없는 대답

응,

 

 


 

 

최지하 시인 / 관계자외 출입금지

 

 

미안하다는 말을

함부로 꺼내 읽어서 미안해

처음엔 당신 곁에 앉고 싶었어

오랜 밤을 지탱한 장롱의 발등처럼

시간의 청태가 끼었거나 끼어들었을 뿐

눈을 밀고 들어오는 불면의 밤을 떠돌면서 궁리했던 뒤끝

팔에 난 상처는 어젯밤 구제인형들의

심장을 끓이다가 얻은 고독이야

비상구는 왜 늘 잠겨있지

인형의 눈으로 흘겨보면 손목시계는 자동으로 멈추었어

손목에서 흘러나온 시간들이 마구잡이로 왔다 갔다 해

그것이 내가 멀미를 하는 이유야

한 번 들어선 길에선 돌아 나오는 출구를

짐작하기 어려워하는 나에게도 문제는 있어

방문 앞엔 출입금지라고 빨간 두 줄을 그어주고 싶어

낯선 허벅지와 충돌하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아

당신의 깡마른 그림자가 신경 쓰여

나를 신고 싶다면 나침반이 달린

구두를 보내줘

문을 열면 바로 돌아갈 수 있게

 

난 맹금류의 눈일 때가 있어

처음부터 낮을 밤이라 불렀으면 좋았을까

그게 결말이라 해도

나는 사람들의 말투를 닮기 위한 입을 열지 않을거야

 

 


 

 

최지하 시인 / 그림자놀이

 

 

그러니까

또 한 번 아침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 본 그 아침을 다시

 

내 의지는 저토록 단호한 현관문을 나서는 일

하지만 식탁에서 그곳까지만

 

옆모습만 보이는 오른쪽 방과 의자 사이에서

시간의 체형으로 스물다섯 시간을

어려움은 좀 있지만 거기서만

 

등을 보이지 않고 이야기 할게

등을 갖지 않아서 의자는 삼백일이 넘는 벽이 되었지

 

오늘의 날씨를 보다가 진통제를 잃어버려서

시간에 속해있지 않은 나는 당분간 벽에 걸려있기로 한

 

나는 다음 생까지

여전히 아침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

현관문을 향해 이동하는 사람

 

내가 발견 될 때까지

저 문은 이용자가 제한되겠습니다

 

 


 

 

최지하 시인 / 또는 퍼블릭 마켓

 

 

그렇지만 오늘은 괜찮다

오늘 이후 비가 내린다면

계획되었던 어제로부터 너무 먼 오늘은

 

우연이었겠지

 

지나치게 다리가 흰 여자의 장례식이 있던 날부터

나와 당신 사이는 정기적으로 기한이 지났다

 

곰팡이처럼 침대 밑에 몸을 숨긴 여자의 가슴에서

못이 자라는 동안

아무도 살아있지 않아서

 

참을성 있는 당신에게만 비가 내렸다

그게 옳았다

새로 사온 당신의 식사가 오늘도 끝나지 않아서

 

편의점을 들어서는 골목을 바라보았다

스스로 경계를 넘지 않는 진열대 위의 길들

원래 있었거나 원래부터 없었거나

결국은 바라보던 곳으로 가게 되겠지

결별은 어느 길에서 시작되나

 

여자는 나로부터 시작되어 끝내지 못한 이야기였다

입구부터 간격이 맞지 않는 기억에서만 살았던

 

패를 뽑아 웃는 일보다 지루하게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라

단언하지 않기로 한 저녁에

두 얼굴이 텅 빈 당신은 비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아무도 죽지 못해서 오늘은

 

 


 

 

최지하 시인 / 아침의 단서

 

 

내일이 되어도 오지 않을지 모른다

대합실의 문이 열릴 때마다

언제나 오고 있는 사람과

오지 못하는 사람 사이가

흑백으로 읽히는 지점

 

그리고 아침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비껴가는 시간을 잡아두기 위해

남의 슬픔을 가져다 탕진하고 있는 불편한 세상에서

립스틱 광고보다 더 흔해서 못쓰게 된 문장처럼

가끔 지나치는 목적지

 

오늘은 이미 사용되었다

 

죽은 새를 내려놓고 잘못 올라탄

길의 등 위에는

발을 오므린 겨울이 남아있다

 

허공이었던 곳으로

먼저 떠난 새들보다 무심한

계절의 이름은 내가 지어 불렀다

 

봄이 와도 기억나지 않는

주소

 

그리고 당신

 

-시집 『오렌지 나무를 해답으로 칠게요』 2019. 상상인

 

 


 

 

최지하 시인 / 부정문

 

 

 네, 발바닥의 길이가 달라졌어요

 맞아요, 낯선 크기의 신발은 섬일지도 몰라요

 사물함에 놓인 섬은 발견될 가망이 없는데, 발가락이 지느러미처럼 빛나요

 온도를 지닌 것은 빛나는 거니까요, 그러니 발가락이 따뜻해진 아침엔 바흐의 첼로를 듣죠

 

 아, 아니에요

 이 명랑함은 착각이죠, 착각은 안도일까요

 너라는 꿈에서 깨지 않을 것과 알고 있는 것 단 한 가지가 너라는 것에 대해

 낭만적이라고 비웃을 수도 있어요, 부조리하죠

 

 매일 물에 비친 알몸을 보며 나이 먹기를 기다려요, 소파는 차갑고 나의 어떤 동작에도 동화되지 않아요

 눈에 물이 차올라요, 사랑이 끝난 후 목소리만 남은 기분이에요

 

 어떤 감각을 기준으로 서술할까요, 심장이 뛰지 않으니 좀 더 예리하게

 동의해요, 모든 왼쪽에 가까운 어휘들을 너보다 먼 나에게 옮기는 것

 책임은 있죠, 그것이 과거의 일이라 해도 위태로운 감정들을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지 못한다면

 

⸻월간 《시인동네》 2020년 5월호

 

 


 

최지하 시인

충남 서천에서 출생. 광운대학교 대학원 졸업. <조선문화> 신인상으로 등단. 2014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꼭 하고 싶은 거짓말』 『오렌지나무를 해답으로 칠게요』 『웃는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