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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정일 시인 / 소리 하나를 얻었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2.
권정일 시인 / 소리 하나를 얻었다

권정일 시인 / 소리 하나를 얻었다

 

 

우포늪에 와서야

소리 하나를

숨죽이며 내통하는 은밀한 소리를

제 깊이만큼 움직이는 침묵의 소리를

얻었다

 

왁자한 세속의 소리를 걸러 내느라

오래도록 저물지 못하고

깊은 속내로 들끓는 넉넉한 품을

얻었다

 

서로를 끌어당기지 못하고 우리는

갈라지곤 했는데

우둘투둘한 상처 만들곤 했는데

 

연초록 풀 위로 눕는 바람의 불손을

내 눈빛에 놀란 재두루미 선회하는 공포까지도

조용조용 서둘지 않는, 늪은

중심으로 중심으로 끌어 모으고 있었다

끌어 모아 연신 하나의 소리로 지켜 내고 있었다

한 어미의 자궁에서 맨발의

어린것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우포늪에 와서야

제각각 소리들이

중심으로 모이면 한 뿌리를 내린다는 것을

얻었다

 


 

권정일 시인 / 달고기

 

 

달고기라 불리우는 물고기가 있다

부적처럼 둥근 달을 품고 사는

보름이면 가끔 어머니는

달고기 포를 뜨면서 혼잣말을 하신다

달바라기를 물 속에서 했으니

빛이 바래 희디희게 허물어지는구나

달고기와 어머니는

한 그물에 올라오는 식구였다

포를 떠 달지짐을 부치는 날에는

보름달이 대책없이 떠

어머니를 다시 저며 내야 한다

이제 너무 저며서 큰 웅덩이가 되어버린

어머니

또 배가 불러온다야

달이 차고 있다야

이렇게 자꾸 몸 불면 어느 순간

세상이 모두 달이 되는 거다야

다시 저며 낼 어머니가 있어 나는 든든하지만

달고기가 될 어머니

바다 속 깊이 자맥질할 어머니

달고기처럼 허물어질 것이다

 

달덩어리

달덩어리를

피처럼

쏟을 것이다

 

-시집 <마지막 주유소> (2004년 현대사)

 

 


 

 

권정일 시인 / 고속도로

 

 

 사악한 순례다. 늦은 밤 고속도로를 질주하다 보면 맹목의 주검들과 만난다. 바람막이가 몸 자체인 것들, 헤드라이트 빛 혹은 어둠에 갇힌다. 바퀴와 발톱이 직각을 이루는 순간, 끼-익 고속도로는 멈추지 않는다. 목숨을 걸고 치명적인 길을 바람처럼 가르는 고양이의 형형한 눈빛은 무엇이었을까? 질주와 질주 사이에 깊숙이 박히는 독화살 같은 틈은 나를 도사린다. 고속도로는 주검을 수거하지 않는다. 오른쪽에서 느껴지는 짧은 섬광, 내 눈 켜 켜에 올망졸망한 예지의 눈동자들이 가혹하게 매달렸다. 어린것들! 늑막까지 차오르는 기침이 멈추질 않았다. 느낌표 없는 흰 차선이 검은 리본을 달아주고 120Km의 속도를 추월한다. 빠르게 증발하는 이 서늘한 간극. 난간이다. 살의를 맛본 고속도로를 충혈 된 눈동자 한 조각이 계속 따라붙고 있었다.

 

<다층> 2006년 가을호

 

 


 

 

권정일 시인 / 동작

 

 

 이것은 파이팅을 위해 손이 만들어내는 수화 같은 것이다

 

 좀 더 가까이

 

 누군가를 중심으로 오른손들이 모여

 손등 위에 손 등 위에 손 등위로 손을 쌓아 올린다 돈독해지는 순간이다

 하나의 공간이 되는

 

 전 지구적인 우리들이 모였다

 

 왼손을 그대로 가져와

 어깨에 두르고 서로 어깨를 겯는다 돔(dome)이 만들어진다

국가가 만들어진다 울타리 형식이 되는 나 너 우리들,

 함께의

 

 구(球)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손이 만들어내는 연속 동작을 멀리서 보고 있으면 심장이 들끓는다 어떤 면으로,

 

지구를 돌리고 있다

 

차곡차곡 층을 이룬 구호를 흩뿌리자 경기가 시작되었다

 

 


 

 

권정일 시인 / 당신은 꽃등잔 들고 저녁 길을 마중 나가고

 

 

여기서부터 혼자입니다

여기서부터 혼자라고 지금부터는

여기서부터 혼자라고 생각하시고

여기서부터 혼자를 더욱 확실히 해 주십시오

여기서부터 혼자를 절대 잊지 마십시오

여기서부터 진짜 혼자입니다

여기서부터 진짜 혼자라고 언뜻 보기에

여기서부터 진짜 혼자일 것 같지만

여기서부터 진짜 혼자입니다

 

여기서부터 나는 혼자의 대상입니다

 

 


 

 

권정일 시인 / 불두화

 

 

산이 깊다

산방화서에 달려있는 백색무미 불두화 아래

울고 있는 여자

들릴 듯 말 듯 끊어질 듯 소소한 울음소리

울음소리가 고운 걸로 보아 함부로 산 사람 같지는 않았다

여자의 등은 항해를 마치고 닻을 내린 새벽처럼 아슴하다

맘 놓고 울 수 있는 곳이 고작

인두겁 끊긴 절 초입 열매 맺지 못하는 불두화 아래,

불두화 무리는 입을 굳게 닫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구름으로 떠돌았을까

씨앗 하나 배태할 수 없는

형해의 등을 쪼으며

무거운 이의 애민소리 골라내듯

울음을 간섭하고 있는 뻐꾸기,

절만하다가 절만하다가 내려오는

내 발자국이 자꾸 뒤돌아 보는 것은

나는 저만한 솜씨로 속속들이 울어내지 못하고

바람소리에 몇 줄기 눈물 실어내고 마는데

이미 세상의 길 다 맛보고 나서

나이테 주름 조밀한 불두화 아래

울음방 하나 마련했는가

허적한 산길에 갇혀 울음길을 오르는가

끝이 없을 것 같은

거문고, 거문고

검은 현을 질기게 뜯어내고 있는 여자여,

저물지 마라.

저물지 마라.

불두화, 그늘 아래로 들고 있었다

 

 <주변인과 시> 2006년 봄호

 

 


 

 

권정일 시인 / 검정 구두

 

 

이제 너에 대한 예의를 지킬 때가 되었다

너는 나를 끌고

내 행선지를 줄줄 외우고 다녔다

수상한 데를 둘러볼 때나

깡통을 걷어찰 때나

음악을 맞춰 까닥까닥 흥겨울 때도

노련하게 내 표정에 밑줄을 그어주었다

까치발을 세우고 남자를 훔쳐 볼 때도

가지런히 뒤꿈치 모으고 내숭을 떨 때도

반짝반짝 나를 빛나게 해 주었다

철없는 발자국에도 눈이 있다고

너는 나보다 먼저 젖었고 먼저 똥을 밟았고

먼저 달려가 악수를 했고 먼저 집에 데려다 주었다

너는 나보다 나중에 밥을 먹었고 나중에 잠을 잤고

뜬 눈으로 밤을 새기도 했다

너는  표정 없는 나를 터벅터벅 읽어내기로 했고

그래, 살다보면 높은 벽도, 깊은 수렁도 만나는 거야

그렇다고 기죽지 말라고

내 과거를 편집해 아침마다 페이지를 넘겨주었다

나를 깁듯 너를 기워 노쇠한 너를 따라 다녔다

이제 나는 너에게 예의를 갖추려고 한다

무거웠던 나의 아픔을 털어내고

나를 내려놓으라고 이른 아침,

평생 한 번 빛[光]나는 화장을 해 주었다

 

수거함 앞에 정중히 내다 놓았다

 

- 2006년 두레문학 5집-

 

 


 

권정일 시인

1961년 충남 서천 출생. 1999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국제사화집 『숲은 길을 열고』 발간. 시집 『마지막 주유소』 『수상한 비행법』 『양들의 저녁이 왔다』.  산문집 『치유의 음악』. 2009년 부산 작가상 수상. 2011년 제1회 김구용 문학상, 2019년 제39회 이주홍문학상 수상. 웹진 『시인광장』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