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인숙 시인 / 달팽이의 꿈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2.
김인숙 시인 / 달팽이의 꿈

김인숙 시인 / 달팽이의 꿈

 

 

세상에서 가장 느린 풍향계를 달고

나는 나를 운반한다

내일의 바람은 아직 내 것이 아니므로

후생(後生)에게 맡기고

꽁무니에 따라 붙는 오늘의 바람을

폐부 깊이 들이마시고

나는 나를 끌고 평생을 간다

 

온몸에 뒤집어쓴 이 알이 부화할 때까지

기꺼이 나락을 헤매다

나는 새가 될 거야

붉은 날개를 가진 새가 될 거야

종일 타오르는 불꽃,

불타는 노을이 될 거야

 

그러니 한낮의 뙤약볕을 나에게 퍼부어 주렴

 

내 부리와 더듬이가 말라비틀어지도록

내 심장이 타들어가도록

온몸이 날개가 될 수 있도록

 

세상에서 가장 느린 풍향계를 달고

나는 나를 운반한다

현생(現生)에 부는 바람만이

오직 내 편이다

-​月刊 『 現代詩 』 2015年 1月號 揭載

 


 

김인숙 시인 / 마그마

 

 

당신이라는 나라에 가기 위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체온이 끓어오르고 있어요

이렇게 온몸에 불을 붙여 상승하다 보면

언젠간 재만 남게 되겠지만

뭐, 어때요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접근하는 방식인 걸요

 

범접하기엔 차마 먼 빙벽처럼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거리, 꼭 그만큼의 거리에서

당신은 굳게 닫혀 있군요

평생을 치받아도 동요하지 않는 당신을

지축(地軸)이라 불러도 될까요

고독이라 불러도 될까요

 

입구도 없고

출구도 없는 천공(穿孔) 속의 당신

 

당신이라는 나라에 닿기 위해

나 오래전부터 화려한 분신을 꿈꾸었지요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불을 품고 살았지요

 

틈을 보여주세요

화려한 분출을 보여드릴게요

 

 


 

 

김인숙 시인 / 먼 훗날까지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그 길에 묶인다는 것

기압과 기압이 만날 때 물의 불빛을 보았다

순간을 가르고 절단면까지 보이며

내리꽂히는 폭우

 

어쩌면 번개의 태생지란

불가능의 문이 살짝 열리는 곳이 아닐까

 

우리에겐 수많은 폭우가 내린다

그럴 때마다

우산은 언제나 일인용이다

폭우를 집에 들여놓지 못하듯

우산이 늘 폭우 근처를 서성이듯

양팔 잘린 토르소와

중심 잃은 나인 핀으로

우린 서로 멋쩍게 돌고 있다

 

내가 밟은 브레이크는 어디까지 밀려갈 것인가

스키드마크의 굉음과

내 목덜미에 박힌 파편은 언제 털어낼 수 있을까

 

먼 훗날까지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고

우산 위로 쏟아지는 하늘의 말씀에

왼쪽 어깨가 다 젖는다

 

 


 

 

김인숙 시인 / 연어캔

 

 

연어캔을 딸 땐

그속에 고이 잠들어 있는 한 일생을 깨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해요

 

연어를 놓아주세요

소파에서 빈둥거리지 말고

세찬 물살로 연어를 돌려보내 주세요.

연어의 뱃속엔 역류하는 세계가 들어 있어요

그것은 아름다운 파문,

연어는 자초하는 물고기예요

예정된 그 죽음의 행로를 잘라야 해요

 

강은포기를 모르죠

강을 포기하는 것은 연어가 아닌 우리들이니까요

흐르거나, 솟구치거나 한

연어의 꿈

폭포수를 거슬러 오르던

힘찬 꼬리가 달린 우리들 꿈 말이에요

 

연어캔을 딸 땐

한 생애가 이룩한 파문이 쏟아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해요.

 

 


 

 

김인숙 시인 / 이정표를 회상하다

 

 

멀어져간 이정표를 바라보았네

한낮 그림자가 꽃병을 엎지를까봐

거실 창문 안쪽 의자에서,

어떤 풍경도 속이지 못하는 투명을

지켜만 보았네

 

아무도 끄지 못하는 낮이 기우는 동안

창밖엔 빗줄기가 날아올랐고

바람에 흔들린 밤을 끔뻑끔뻑 떠돌며

흘기던 눈들이 사라져 갔네

아지랑이가 살짝 묻어있는 이정표엔

우리들의 이름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신발을 벗어 놓고갔네

 

층계를 굴러 내려가는 목소리에

자꾸 귀를 세웠지만

내 귀는 끝내 난청이 되어 버렸네

절대로 변하지 않을 이정표의 이름만 부르다

그 이름들은

끓어오르는 카레라이스처럼 솟아오를 거라고

 

-계간 <미네르바> 2020년 여름호

 

 


 

 

김인숙 시인 / 지금 바다 속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몸집이 큰 고래는 가장 작은 멸치를 먹고 산다

멸치는 떼를 지어 고래를 흉내 낸다

정어리 떼가 만드는 피쉬볼

한 덩어리라는 말을 선생으로 삼는다

한낮을 장식하던 고래의 숨이 물꽃으로 피고

모서리가 일그러진 달이 물속으로 떨어져 빛나는 밤

산호 숲에 떼 지어 숨어있던 정어리 떼가

숨을 놓고 별빛 따라 하늘로 치솟는다

그렇게 작은 몸으로 어디에서 거슬려 올라 왔는가

수평선 허리를 타고 뛰어난 위장술로

이 바다의 주인을 자처하는가

 

나는 밤마다 하늘을 보며 작은 포유류의 새끼가 되어

지금까지 고래를 피해온 삶을 벗으려고

정어리 떼에 섞여 일사분란한 피쉬볼을 만들어보지만

고래의 허밍이 친구를 부를 때

나는 하늘로 팔을 벌려 소리친다

정어리 떼여, 고래가 큰 숨을 들여 마시기전에

차라리 산산이 흩어져 덩어리를 깨고 뭉치를 뜯어내라고

내가 나를 허물어 이 급급한 삶에서 빠져나오라고 다그치지만

바다는 저 깨지고 야윈 달을 다시 동그랗게 수리해서

밤하늘로 둥실 띄우지 않는가

큰 물고기가 지나간 뒤

찢어지고 깨진 대형을 다시 수리하는

저 어린 물고기들의 자생력을 다시 배우기로 한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8월호 발표

 

 


 

김인숙 시인

강원도 강릉 출생. 성신여자대학교와 同 대학원 일어일문학과 석사. 2012년 월간 《현대시학》 신인작품상 수상으로 등단. 2017년 季刊 《시와세계》 평론상 수상으로 평론가 등단. 시집 『먼 훗날까지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제6회 『한국현대시인협회』작품상 수상. 제7회 열린시학상 수상. 2020년 제5회 『한국문학비평학회』학술상, 2020년 제18회 서초문학상, 2021년 제7회 『시사사』작품상 수상. 관동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겸임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