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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수권 시인 / 젊은 날의 초상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2.
송수권 시인 / 젊은 날의 초상

송수권 시인 / 젊은 날의 초상

 

 

위로받고 싶은 사람에게서 위로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슬픔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에게서 슬픔을

나누는 사람은 행복하다

더 주고 싶어도 끝내

더 줄 것이 없는 사람은 행복하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렇게도 젊은 날을 헤매인 사람은 행복하다

오랜 밤의 고통 끝에 폭설로 지는 겨울밤을

그대 창문의 불빛을 떠나지 못하는

한 사내의 그림자는 행복하다

그대 가슴속에 영원히 무덤을 파고 간 사람은

더욱 행복하다

아, 젊은 날의 고뇌여 방황이여

 


 

송수권 시인 / 아침 풀밭

 

 

달팽이 집 몇 개가 그림 속에 흩어진

草집들 속에선 누가 숨어 사는지

착한 아기와 며느리라도 숨어 사는지

딸각딸각 베를 짜는 아침 방직의 즐거운

베틀 소리가 들린다.

가벼운 깃털들이 비단 수실 꽃주머니를 차고

날아다닌다.

또 그 草집들 속에선 누가 선약을 달이는지

벌레들의 똥이 화풍단 알약처럼 흩어져 있다

간밤엔 무슨 잔치라도 있었느냐

조롱구슬 같은 별들이 떴다 자물린 흔적

한 밤내 울고 간 귀뚜라미의 흰 날개뼈와

부서져 쌓인 음부들

풀밭에 오면 전쟁도 미움도 시기도 없다

이제 막 잠을 깨고 나온 달팽이 한 마리

달디 단 이슬 한 모금에 환각의 뿔을 흔든다

 

 


 

 

송수권 시인 / 조팝나무 가지의 꽃들

 

 

온몸에 자잘한 흰 꽃을 달기로는

사오월 우리들에 핀 욕심 많은

조팝나무 가지의 꽃들만 한 것이 있을라고

조팝나무 가지의 꽃들 속에 귀를 모아본다.

조팝나무 가지의 꽃들 속에는 네다섯 살짜리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자치기를 하는지 사방치기를 하는지

온통 즐거움의 소리들이다.

그것도 볼따구니에 정신없이 밥풀을 쥐어발라서

머리에 송송 도장 버짐이 찍힌 놈들이다.

코를 훌쩍이는 녀석들도 있다.

금방 지붕 위의 까치에게 헌 이빨을 내어주고 왔는지

앞니 빠진 밥투정이도 보인다.

조팝나무 가지의 꽃들 속엔 봄날 이런 아이들 웃음소리가

한 종일 피어날 줄 모른다.

 

 


 

 

송수권 시인 / 인연

 

 

내 사랑하던 쫑이 죽었다

어초장 언덕바지 감나무 밑에 묻어 주었다

이듬해 봄 감나무 잎새들 푸르러

 

겅겅 짖었다

 

-시집 <허공에 거적을 펴다>(지혜, 2014)

 

 


 

 

송수권 시인 / 혼자 먹는 밥

 

 

혼자 먹는 밥은 쓸쓸하다

 

숟가락 하나

놋젓가락 둘

그 불빛 속

달그락거리는 소리

 

그릇 씻어 엎다 보니

무덤과 밥그릇이 닮아 있다

우리 생에서 몇 번이나 이 빈 그릇

엎었다

되집을 수 있을까

 

창문으로 얼비쳐 드는 저 그믐달

방금 깨진

접시 하나

 

 


 

 

송수권 시인 / 퉁*

 

 

벌교 참꼬막 집에 갔어요.

꼬막 정식을 시켰지요.

꼬막회, 꼬막탕, 꼬막구이, 꼬막전

그리고 삶은 꼬막 한 접시가 올라왔어요.

남도 시인, 손톱으로 잘도 까먹는데

저는 젓가락으로 공깃돌 놀이하듯 굴리고만 있었지요.

제삿날 밤 괴** 꼬막 보듯 하는군! 퉁을 맞았지요.

손톱이 없으면 밥 퍼먹는 숟가락 몽댕이를

참꼬막 똥구멍으로 밀어 넣어 확 비틀래요.

그래서 저도— 확, 비틀었지요.

온 얼굴에 뻘물이 튀더라고요.

그쪽 말로 그 맛 한번 숭악***하더라고요.

비열한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런데도 남도 시인— 이 맛을 두고 그늘이

있다나 어쩐다나.

그래서 그늘 있는 맛, 그늘 있는 소리, 그늘

있는 삶, 그늘 있는 사람.

그게 진짜 곰삭은 삶이래요.

현대시란 책상물림으로 퍼즐게임 하는 거 아니래요.

그건 고양이가 제삿날 밤 참고막을 깔 줄 모르니

앞발로 어르며 공깃돌놀이 하는 거래요.

詩도 그늘 있는 詩를 쓰라고 또 퉁을 맞았지요.

 

*퉁: 꾸지람.

**괴: 고양이.

***숭악한 맛: 깊은 맛.

 

 


 

 

송수권 시인 / 아내의 맨발ᆞ3

ㅡ갑골문

 

 

뜨거운 모래밭 구덩을 뒷발로 파며

몇 개의 알을 낳아 다시 모래로 덮은 후

바다로 내려가다 죽은 거북을 본 일이 있다

몸체는 뒤집히고 짧은 앞 발바닥은 꺾여

뒷다리의 두 발바닥이 하늘을 향해 누워 있었다.

 

유난히 긴 두 발바닥이 슬퍼보였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마취실을 향해

한밤중 병실마다 불꺼진 사막을 지나

침대차는 굴러간다

얼굴엔 하얀 마스크를 쓰고 두 눈은 감긴 채

시트 밖으로 흘러나온 맨발

 

아내의 발바닥에도 그때 본 갑골문자들이

수두룩하였다

 

-시집 <언 땅에 조선매화 한 그루 심고>

 

 


 

송수권(宋秀權) 시인 (1940~2016 향년 76세)

1940년 전남 고흥 출생. 호는 평전(平田).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75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山門에 기대어」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산문(山門)에 기대어』 『꿈꾸는 섬』 『아도(亞陶)』 『우리들의 땅』 『별밤지기』 『파천무』 『달궁 아리랑』 『하늘을 나는 자전거』 『빨치산』 등.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제1회 영랑시문학상(2003), 김달진 문학상, 서라벌문학상 등을 수상.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