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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찬일 시인 / 천생연분에 대하여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2.
박찬일 시인 / 천생연분에 대하여

박찬일 시인 / 천생연분에 대하여

 

 

꽃들이 휘어 있고 나무가 휘어 있고

공중이 휘어 있듯이

 

내가 그 곁을 지나가면 내가 휜다

그쪽으로 넘어질 뻔한다

그가 내 쪽으로 넘어지려고 했다

 

능선길;멀리서 그 물체가 보이면

다른 길로 돌아서

가고자 했던 곳으로 가고 있다

휘고 싶지 않고 넘어지고 싶지 않으니

끝까지 걸어가기를 원하니

 

붙박혀 있는 꽃들에게, 나무에게 묻는다

천생연분이라 한들

가고자 했던 곳만큼하겠니

 

나는 넘어질 뻔했을 뿐이다

가고자 했던 곳으로 가고 있는 내가 좋다

도달하는 곳이 천생연분이다

 


 

박찬일 시인 / 노란 열차들

 

 

노란 열차들은 고장이 났는가

아니다 외곽이 우그러졌을 뿐이다

본 열차에서 떨어져 나갔다.

앞 열차에는 누가 타고 있었을까

노란 열차에는 누가 타고 있었을까

노란 치즈 노란 파프리카 노란 라면 노란 막걸리

노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노란 열차에 타고 있었을까

버린 것은 앞 열차인가 노란 열차인가

아마추어가 떨어져나간 것인가

일이 이인가 이가 일인가

프로가 떨어져나간 것인가

떨어져나간 노란 것이 병이었다면

병아리 모습을 한 죽음이었다면

 

 


 

 

박찬일 시인 / 비극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喜劇이다

 

 

약병에서 젤리 같은 것 젤리보다 딱딱한 것이

손바닥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

약병에서 손바닥으로 이동

손바닥에서 입으로 이동

병이 정로환 약병 두 배쯤 된다

비워지거나 버려지는 법이다

무슨 약인지 모르고 먹는 것은 좋지 않은 일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젤리보다 딱딱한 것이 손바닥에서 입안으로 자리를 옮긴다

 

젤리, 차오! 입안이 약병에게 인사를 했다

젤리, 차오!

 

편안하다, 마음이 속으로 젤리에게 인사를 한다

 

돌아다보면 다 命運이다

수많은 나날들 젤리 없이 보냈지만 언젠가 만나야 하리

 

비극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喜劇이다

끌려 다니시길 권한다, 반드시 반드시 喜劇이라네

환율이 대체로 천 이백에서 움직인다

집이 거주하다 마는 것

디프레션이 끝나게 되어있다네

 

 


 

 

박찬일 시인 / 북극점

 

 

북극점에서 북극점이 없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더 갈 곳이 없으니

시간이 없고 시간이 없으니

더 갈 곳이 없고

북극점에 도달한 게 아니었어요

김충규 시인에게 말했어요, 틀림없이

더 갈 곳이 없다고 하니 그만두라고요

베링의 얼음덩어리에서 멈추는 거

가끔, 하늘을 쳐다보는 거

무엇을 기다리는 거 보세요

크레바스가 넓어요, 돌아갈 때가 문제죠

크레바스를 건너기 싫을 거예요

아주 다른, 이쪽 편과 저쪽 편

북극점에 도달했는데 돌아갈 수 있겠어요.

더 갈 곳이 없고, 돌아갈 곳이 없으니

천상 고아들인 거죠

 

 


 

 

박찬일 시인 / 하느님과 함께 고릴라와 함께

 삼손과 데릴라와 함께 나타샤와 함께,

 

 

떨어지면 받아주리라 고릴라가

도망치면 숨겨 주리라 삼손과 데릴라가

변하였다

고릴라도 내 편이고 삼손과 데릴라도 내 편이다

하느님도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문지방으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하느님과 함께 고릴라와 함께 삼손과 데릴라와 함께

나타샤와 함께 살리라

나는 변하였다

나뭇가지를 상대하지 않는다

철봉 평행봉을 상대하지 않는다

살려고 하는데 살지 말라고 할 리 없다

세상은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하느님과 함께 고릴라와 함께 삼손과 데릴라와 함께

나타샤와 함께 살아보았느냐

 

 


 

 

박찬일 시인 / 시 한 편

 

 

 죽을 준비 없이 있는 게 죽을 준비 하는 게다. 모르는 사람 아는 사 람 뭔지 모르고 아는 게 약이다 신 다음에 믿을 만한 게 약이다 잠든 자를 더 잠들게 하는 약뿐이었나 그

 

 동안 먹은 약이 보약이다 죽을 준비 하지 마라 태어날 준비 없이 죽을 준비 없이 태어나고 죽는 게 맞다. 죽은 자는 죽은 다음에 죽을 거고, 산 자는 태어나기 전에 알고 있다

 

 도대체 몽테뉴가 지하철을 탔든 버스를 탔든 무슨 상관이오

 

 대신 죽든지 대신 태어나든지 맘대로 하시오

 

 


 

 

박찬일 시인 / 만원이 인생인 인생

 

 

 일어날 일이 다 일어났다. 바람이 남김없이 불어 낙엽이 낙엽이 되었다 바람은 남김없이 불어 쓰레기통은 만원이 되었다 더 와도 만원이고 덜 와도 만원이다

 

 요구르트통 커피통 맥주통, 통통들이 공장에서 만원이고 편의점 구멍 가게 수퍼마켓 하이마트 아마존에서 만원이고 냉장고에서 만원이고 더 와도 만원이고 덜 와도 만원이다

 

 늦가을 낙엽이 만원이다 바람이 만원이다. 일어난 일이 만원이다 더 일 어나도 만원이고 덜 일어나도 만원이다 뉴스가 만원이고 도널드 트럼프 가만원이고(새로운 뉴스라니) 새로운 뉴스가 만원이다

 

 죽어도 만원이고 더 죽어도 만원이고 덜 죽어도 만원이고, 콘테이너가 만원이고 대서양과 태평양이 만원이다 공동묘지가 만원인 날, 별자리가 만원이고 더 와도 만원이고 덜 와도 만원이다

 

 예술이 더 와도 만원이고 덜 와도 만원이다 예술의 종말이 만원이다.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다. 모두 예술가가 될 때: 만원이다 더 와도 만원이 고 덜 와도 만원인 예술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 단풍을 쓰는 사람이 만원이다 노란 은행잎을 쓸어 담는 사람, 마대자루가 만원이다 가을 햇빛을 쬐는 사람 더 와도 만원 덜 와도 만원이다

 

 


 

박찬일 시인

1956년 강원도 춘천 출생. 1993년 《현대시사상》을 통해 등단. 연세대학교 독문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독일 카셀대학에서 수학(박사후과정). 시집 『화장실에서 욕하는 자들』 『나비를 보는 고통』 『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 『모자나무』 『인류』 『북극점 수정본』. 시론집 『해석은 발명이다』 『사랑, 혹은 에로티즘』.  연구서 『독일 대도시시 연구』 『시를 말하다』 『브레히트 시의 이해』 등. 박인환문학상, 제7회 유심작품상 등 수상.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