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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애 시인 / 가장 조용한 죽음
몽골에서 양 잡는 것을 보면 사람 둘, 짐승 하나가 사랑을 나누는 것 같다
한 사람은 뒤에서 양을 꼭 껴안고 한 사람은 앞발을 잡고 명치를 찔러 애인의 가슴을 움켜쥐듯 심장동맥을 움켜쥐고 가장 고통 없이 즉사시킨다
내가 너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살리는 것이다
속삭이는 주인의 품에 폭 안겨 양은 한마디 비명도 없이 커다란 눈만 껌벅이고 있다
하늘의 솜다리꽃이 하강한 양
초원의 말발굽에 밟혀 진동하는 꽃향기처럼 제 몸 냄새를 들판에 퍼뜨리지만 에튀겐*에게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조용히 별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환생을 지켜보는 것 같다
* 몽골 대지의 신
강신애 시인 / 겨울 장미원
전정의 칼날은 예리해서 무릎 근처가 시리다
로즈힙을 처방받고 싶은데 핏덩이 같은 알들은 모두 사라졌다
장미는 썩어문드러지는 일이 없지요 봉오리 맺히고 켜켜이 꽃잎 시드는 순간까지 자신의 전모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당신이 장미에 매혹된 이유였지
조지 오웰은 몇 푼의 돈으로 담장 가득 천상의 무리처럼 만발한 장미를 사랑했다 나날의 찬탄이 꽃을 흐드러지게 했지만 난 심드렁했지 너무 화려한 빛과 자태를
덧없는 아름다움에 무참히 마음을 걸어 잠갔는데 팽팽한 육질 한창인 꽃 때와 바람만 휘젓는 마른 줄기조차 장미의 순간임이 가윗날처럼 스친다
정주를 잃은 자에게 보내는 위로처럼 입춘의 가지들마다 색의 비밀이 잠겨 있다
엉클어진 분홍노을도 잘린 단면으로 스며들고
곧 믿을 수 없이 눈부신 성운(星雲)을 밀어올리겠지
계간『시와 사람』 2023년 여름호 발표
강신애 시인 / 심령술의 밤
아서가 올까요, 아서는 대리인으로 홈스를 보내지 않을까요? 팔걸이에 기댄 벨벳 조끼 벨벳 구두의 여자가 부드럽게 웃는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아서 코난 도일과 셜록 홈스를 구분하지 못했죠. 런던 베이커가엔 홈스의 집이 있다고 해요. 푸른 벨벳이 허물없이 말한다. 아서는 홈스처럼 탐정의 능력을 발휘했지만 심령술에 매달렸다. 그는 어디까지 자신을 걸었을까. 어떤 미로가 열리기를…… 의자가 둥둥 떠오르기를…… 하나 둘 지루해진 사람들이 떠난다. 갑자기 파이프 오르간의 굉음, 천공의 빛기둥 같은 흑건 백건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장막이 조금 흔들린다. 그가 왔어요! 모자를 쓴 신사인 그가, 벨벳이 일어선다. 영매의 귀가 나팔꽃처럼 불거진다. 피터는 무대 한가운데 초점을 맞춘다. 상상하면 이루어지는 걸까. 어둠 속에 집단적 초월주의자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작 아서는 믿음보다 앎을 중시했다. 그 앎은 믿는 것에 대한 앎이었을까 앎이 만든 믿음이었을까. 마법은 진실을 단련시키기 위한 눈속임일까. 소설이라면, 홈스는 아서에 대한 불경이라 해도 영매의 사기술을 파헤치겠지. 빛기둥이 잦아든다. 오르간 잔향이 객석에 길게 뻗는다. 위대한 영혼이여 메시지를……
계간 『맥』 2023년 창간호(봄호) 발표
강신애 시인 / 샌드페스티벌
허공에 뻗은 손이 비치볼을 돌리고 있어
긴 머리칼 끈 원피스가 무릎 위에서 펄럭이고
개의 이빨들이 첨벙첨벙 쏟아지고
이 모든 게 해변의 무수한 모래알이라는 게 믿겨져?
얼음 속의 영원처럼
슬라이스 된 사과의 단면처럼 우리는 한 번에 한 쪽의 ‘지금’을 맞닥트릴 뿐이라고
네 말은 통 이해할 수 없지만 모래를 보면 알 것도 같아
한 알 한 알이 과거 현재 미래여서 황홀한 리듬이 흐르는 해변 여기, 다 있군
아이가 모래를 튕기며 달려오고 파도 한 자락 들쓴 여인이 돌고래를 타고 오고 물거품에서 솟아나는 인어도 염소 뿔도
작열하는 태양 아래 다른 시간으로 반짝이고 있어
모래를 파고 누우면 따뜻해
사과 하나 통째로 베어 먹고 싶어
속삭여줘 흰 포말을 일으키는
월간-『문학사상』 2021년 8월호 발표
강신애 시인 / 물가의 집
어떤 사람이 물가에 집을 지을까
짠내 나는 상점, 좁은 골목을 통과하면 바다
흔들리는 목조 주택 접이식 의자
유리창 속의 항구 하늘과 내통하는 바다의 광휘에 작은 근심과 떠들썩함 따위 훼방꾼으로 여기는 사람이겠지
고래 분수 위 무지개나 보석을 실은 채 가라앉은 선장 이야기
옆구리에 저보다 큰 참치를 묶고 달리던 배가 해변 말뚝에 뚝뚝 부딪는 끽끽 소리에 조가비처럼 귀 기울이는 사람이겠지
이 빛나는 덧없음, 광대한 심연에 무릎 꿇은 늙은 보헤미안이겠지
강신애 시인 / 천년의 나이테가 녹아든
깊은 숲 속 우람한 참나무에 큰 구멍 뚫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 그 속에 편지를 넣기 시작했네 수신인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그 편지를 아무나 와서 집어가도 된다고 하지 찌르레기 맴도는 참나무 구멍에 손을 넣어 하얗게 접힌 글자들 펼친 처녀 쌉싸래한 도토리 향내 나는 어느 사내의 갈망에 마음 빼앗겨 제비꽃 살림 차렸다고도 하지 천년의 나이테가 녹아든 타닌 같은 문장을 만날 지도 모르지 먼 길, 초록 맥박이 뛰는 불빛 같은 소식을 만나러 참나무 우편함에 가고 싶네 잎 잎마다 뽀얀 솜털을 달고 갈바람, 구름 떠도는 내 물관이 가닿을 참나무 편지를 지금 써야겠네
강신애 시인 / 물의 살
네가 심연을 뚫고 한 줌의 손에 당도한 것은
보기 위해서, 보아주는 눈이 필요했기 때문
겉으론 냉담한 척 손가락 새로 빠져나가더니
딱하군, 하며 가만히 고여 있다
불가사의한 증발하는 빛의 둥근 어깨
단지 반사할 뿐인 네가 사람처럼 연민의 힘살이 있다니
재빨리 한 모금 삼킨다
미세히 떨며 열린 살 속으로 들어가는 살
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내 깊은 곳에서 마음을 만들어내고 있는 살
강신애 시인 / 소
안개 속에서 검은 소를 만났다 구정물과 젖은 풀의 냄새를 풍기며 천천히 어디로 가는 중이었는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도 가만히 바라보았다 커다란 눈이 성스럽도록 멀었다 포근했는데 이상하게도, 소의 등허리에는 어제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있었다
춥지 않니? 눈을 털어주려 손을 올려놓았을 때 갑자기 고개를 돌려서 놀란 나는 뒷걸음질쳤다 소도 놀란 듯 했다
자동차도 뜸한 길가 낡은 속삭임 같은 마을 불빛을 무수한 습기가 운반해왔다
나는 더듬듯 계속 걸었다 안개의 발판마다 젖은 현의 선율이 튀어나왔다 뒤에서 희미한 울음소리를 들은 듯 했지만 모른 척 조금 빨리 걸었다
돌아오는 길에 안개로 윤곽이 무너진 소를 만났다 흐린 등에는 내 손자국이 찍혀 있었다 무거운 마침표처럼. 소는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 누군가를 기다리듯 거기 우두커니
강신애 시인 / 막을 파내려가 거기
종일 흰 무덤 목련꽃이 실수로 印畵한 저쪽 바라보다 퇴근한다
자곡동 성남 분당 몇갈래로 흩어지던 마음 모아 탑성마을에 내리면 깊은 숨 몰아쉬는 숲 위로 잠언처럼, 떠오르는, 방
후들거리는 서른 눈 깊은 숲과 살림 차려 이사온 후로 내 어깨 양쪽은 늘 숲에 젖어 있다
호주머니 속 치사량의 신기루는 어디론가 새버리고 백열등 보얀 내 방으로 두근두근 돌아간다
사막을 파내려가 거기 꽃뱀으로 또아리 튼 숲과 나는 목련 같은 아이를 가지리라
모래바람 속, 줄줄이 불려나온 진눈깨비 목련 사막은 더 이상 사막이 아니다
강신애 시인 / 질병통역사*
모르겠어요 처음 본 내게 당신 치부를 고백하다니
백미러로 핑크색 손톱과 구릿빛 피부를 음미하고 있었는데
당신과 어울리지 않는 사악한 죄 훼손된 꿈, 봇물 터지듯 펼쳐놓다니요
그건 발 아래 히비스커스 꽃을 바치며 태양신 사원에서 고백해야 했어요
오늘은 관광 가이드 내일은 의사에게 낯선 지방, 병증의 신음을 번역하지만
우리는 모두 오지여서 각자의 방언을 말할 뿐
나의 말들이 주구(呪具) 같은 상징으로 다정한 운율로 당신 마음을 어루만졌나요
내 이마에 바른 연꽃 향유가 당신 가슴골의 딸기 아플리케가 서로를 치유할 수 있을까요
대체 누가 우리 허기를 통역해주죠?
당신의 아픔, 나의 슬픔 똑같은 환처인데
산비탈로 꼬리를 흔들며 회색 원숭이들이 몰려오고 있어요
* 줌파 라히리, 『축복받은 집』.
-계간 『문학청춘』 2024년 여름호 발표
강신애 시인 / 드림 레코더
며칠 악몽을 꾸고 늦은 밤, 저장해둔 꿈을 켠다
쿵!
사각의 만다라가 펼쳐지는 꿈
형형색색 찬란한 모래알 불꽃들이 일렁이는 꿈
숨 막힌 향연을 펼치는 거대한 보자기의 펄럭임으로 지복(至福)의 희열에 떨다 깨어나는 꿈
누가 접었다 펼쳐놓은 메시지인지
머리칼처럼 엉켜 구멍으로 뻗어나온 식물 뿌리에 토분이 부서질 듯했지
내가 그 안에 담겨 있다가 갈구하는 꽃과 잎사귀들을 끌고 바깥으로 터져나와 빛 부시게 파동치는 걸까
어둑한 고원 본 적 없는 불꽃의 이 여운은 죽은 나무를 살리는 예언일까
꿈을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꿈을 꾸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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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소요를 끄고 불을 끈다
-반년간 『시인하우스』 2024년 하반기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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