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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승훈 시인 / 꼭두서니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1.
이승훈 시인 / 꼭두서니

이승훈 시인 / 꼭두서니

 

 

해방을 꿈꾸었던 오래전 아버지가

국방색 옷을 벗고

나무가 되려 할 때

먼 곳을 바라보던 눈

그 갈피에 간직한 불

 

내 몸에 심어준 푸른빛을 열어젖혀

산길을 새기고

강물에 풀어지며

붉어진 눈물 빛으로

아버지를 간직했다

 

남자는 남자에게 여자는 여자에게

물들며 물들이며

끌어안고 서걱이는 밤

주먹 속 다진 맹세는

붉디붉은 혈통이었다

 


 

이승훈 시인 / 밤비

 

 

밤비는 내리고 바람은 불고

님은 떠난다

추운 밤 불빛에 젖는 이 종이가

나인지 모른다 그러나 가을 밤

비는 내리고 바람이 자면

빗소리 이 종이를 뚫고

나를 뚫는다 밤비 속에 밤비 속에

허옇게 센 머리 펄럭이며

이런 시를 써서 무얼 하나?

가을 밤 비는 내리고

님은 떠나고 나는 기침을 하고

계속 입을 틀어 막는다

 

 


 

 

이승훈 시인 / 모욕

 

 

그리움과 모욕밖에 남은 것이 없다

머언 들 위로는 마른 바람 일고

하아얀 불이 탄다

 

벙어리같은 시를 쓰며

풀잎에 어린 햇살처럼

나는 살고 싶었다 파열하는

마음만이 그 뜻을 안다

 

하늘 한 조각 베어먹고

배 고프면 웃는다 그래도

살아나는 웃음이 희열이 되는 날

 

헤매이는 날

 

마파람에 얼굴 트며

벙어리 벙어리 말도 못하고

비를 맞으면 맞을수록 목마른

그대와 나, 아아 그리움과 모욕밖에

남은 것이 없다.

 

 


 

 

이승훈 시인 / 놓아버리고 가자

 

 

놓아버리고 가자. 꿈 속의 길, 꿈 속의 사람,

꿈 속의 산. 허물어도 잃음이 없다.

새여, 날아가도 날아감을 모르며,

나뭇가지에 앉아도

흔들림을 모른다.

매일 지나가도 중학교 뒷길,

누가 깨끗이 쓸고간 뒷길,

내가 밟고 간다.

아무도 없는 중학교 뒷길,

내가 중학교 뒷길이다.

내가 중학교 건물 볼 때 중학교 건물이

나를 본다. 어디서 닭이 운다.

 

 


 

 

이승훈 시인 / 한국적 작문

-프레베르를 모방함

 

 

"아주 젊었을 때 그는

굉장히 수줍고 우울했다

그때는 결혼하기 전이었다

그후 그는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등이 굽고부터는

여행을 싫어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났을 때

등은 그대로 굽었지만

그는 아주 작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승훈 시인 / 너를 만나고

 

 

너를 만나고 사랑이 난리라는 걸

배웠다

너한테 너한테 배웠다

사는 게 난리지만 그동안

너를 만나고

난리가 끝난 줄 알았지

그러나 아니야

네가 떠난 다음 또 난리가 나고

이 난리는

내가 만든 난리

겨울저녁에 시작된 난리가

봄이 오는 저녁에도 계속되고

난리는 난리는 불이 아니야

불이라면 끌 수도 있지만

난리는 사랑이야

사랑은 저주받은 사람들의 직업이야

겨울저녁 싯벌건 노을이야

밤새도록 부는 바람이야

너를 만나고 사랑이 난리라는 걸

배웠다

지금도 계속되는 이 고역

이 업보 이 가난

하얀 닭이나 백 마리 기르면

난리가 끝날까?

이 난리가 지금도 계속되는 난리가

끝이 없네

천 마리 닭이나 기르면 끝나리

어젯밤에도 술만 마시고

돌아왔네

 

 


 

 

이승훈 시인 / 암호

 

 

 환상이라는 이름의 역은 동해안에 있습니다. 눈 내리는 겨울 바다―거기 하나의 암호처럼 서 있습니다. 아무도 가본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이 거기 닿을 때, 그 역은 총에 맞아 경련합니다. 경련 오오 존재. 커다란 하나의 돌이 파묻힐 때, 물들은 몸부림칩니다. 물들의 연소 속에 당신도 당신의 몸부림을 봅니다. 존재는 끝끝내 몸부림 속에 있습니다. 아무도 가본 사람은 없습니다. 푸른 파편처럼, 바람 부는 밤에 환상이라는 이름의 역이 보입니다.

 

 


 

 

이승훈 시인 / 난 달팽이가 좋아

 

 

난 달팽이가 좋아

난 무우도 좋아

하얀 무우

버석 버석 베어먹는

너의 입이 좋아

너의 코도 좋아

웃지 않는

너의 눈도 좋아

난 기차가 좋아

가을 기차는 더욱 좋아

난 철늦은 여행도 좋아

너하고 떠나면 더욱 좋아

난 룸펜이니까

난 알콜 중독자니까

난 너의 파아란 자켓이 좋아

난 저녁에 피곤한 네가

말없이 피우는 담배

연기가 좋아

해골같은 인생도

그때는 따뜻해

한번 타면 다시는

내릴 수 없는

기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이 좋아

난 가을 닭장 앞에

머리를 숙이고

모이를 주는

네가 좋아

난 가을 바닷가에

모자를 쓰고

갈매기 밥을 주는

네가 좋아

난 달팽이가 좋아

그런데 달팽이는 밤에

어떻게 사랑을 할까?

 

 


 

 

이승훈 시인 / 天眞

 

 

너무 날씨가 좋아

밖에 나와 하늘 한번 보네

무슨 말도 그리움도

없어라

삶과 죽음 모두 잊고

내일은 내일 생각하면 되는 것

이런 날은 귀신이 잡아가도

그만이지

모두 나도 모르는 일

(---)

날씨가 너무 좋아

글 쓰다 말고 밖에 나오니

간 것도 없고

온 것도 없네

이미 떠났지만 여기 있고

여기 있지만 이미 떠난 것

오늘 이 햇빛 속엔

오고 감도 없어라

天眞이여

내 몸 그대에게 맡기고

세상이나 한 바퀴 돌고 오자

 

 


 

 

이승훈 시인 / 홍가시나무

 

 

입안에 가시 돋친

그런 날이 있었다

거꿀반응이라던 역류성 식도염증

맥 짚어 당신이 내린

어혈은 내 우울증

 

벌판으로 뛰쳐나가

속을 다 게워내도

언제쯤 불살라질까 너를 보낸 붉은 죄

평생을 꼬박 태워도

목 깊숙이 걸렸다

 

여기서 거기까지

몇 년이나 걸릴지

더듬더듬 짚어가는 네 맘속 그 먼 길

온몸이 불에 메인 듯

한발 한발 뜨겁다

 

-《시조시학》2022. 여름호

 

 


 

이승훈(李昇薰) 시인 (1942-2018)

1942년 강원도 춘천 출생. 한양대학교 섬유공학과에서 국어국문학과로 전과하여 졸업,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연세대학교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1962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 《사물들》 《환상의 다리》 《당신들의 초상》 《당신의 방》 《상처》 등, 평론집 《이상시 연구》, 《반인간》, 《시론》 등. 춘천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역임,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2018.1.16 숙환으로 별세(향년 7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