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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소향 시인 / 지금은 가을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1.
박소향 시인 / 지금은 가을

박소향 시인 / 지금은 가을

 

빈 나무껍질에도 해가 들어

잘 익은 고독처럼 선홍빛 슬픔을

내려놓고 싶은 지금은 가을

당신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내 죄 깊어져 간절한 기도 울컥울컥

해내야 할 것 같은 지금은 가을

꿈 안기는 긴 밤 하릴없이

날리는 낙엽의 소리여

뒤척이는 가슴으로

눈물은 말라

그림움 없인 영 지날길 없는

아, 지금은 가을

 


 

박소향 시인 / 떠나가기

 

 

그냥 떠나가 보기로 할 것이다

햇빛을 피하지 못한 억새가

갈색의 호르몬을 하늘 가득 날리는

외딴 섬이면 더 좋겠지.

 

어깨를 누르는 커다란 보따리 하나

거기 어디쯤 풀어 놓고

가을 앓이 실컷 하면 되니까.

 

야생화의 노래 귓가에 가득 울려 퍼지는 오후

뚝방에 앉은 쓸쓸함 맘껏 누리면 되니까.

 

어느 밖으로 나가기 좋은 날

강바람 옆구리에 끼고

네가 흘리는 오래된 사랑의 노래를 들으며

하룻밤의 긴 여행을 떠나가 볼 것이다.

 

아직도 내가

돌아서만 흐르다 흔들리는 까닭을

거기 어디서쯤 만날 수도 있겠으니...

 

흐르는 것은 멈추지 않는다

단지 돌아서 갈 뿐이지.

 

내가 흔들리는 이유도 어쩌면

먼 길을 돌아서 가는 까닭인지 모른다.

 

아, 잠시 달콤한 우울을 즐길 수 있다면

쌉싸름한 카페인의 유혹도 과감히 감수하고

넘실대는 햇살을 만나기 위해 떠날 것이다.

 

어디까지 이 향긋한 계절의 깊이를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날은 그냥

떠나가 보기로 할 것이다.

 

 


 

 

박소향 시인 / 별이 되기까지

 

 

먼 길을 떠나보라

밤이면 더 찬란해지는 별을 볼 것이다

흐르는 물처럼 맑아져

얼기설기 얽힌 인연의 물줄기가

한 곳으로 모여

깨끗하게 씻긴 서로를 볼 것이다

 

먼 길 떠난 사람을 그리다 보면

그리움은 어느새 별이 되고

그 사람의 옷자락에 묻어 있던

아픔인 줄 모르는 병 하나 만날 것이다

 

그는 별이 되고 나는 물이 되어

세월을 뛰어 넘는

여전히 아름다운 인연이 될 것이다

 

시간이여 흐르라

밤과 낮이 수없이 바뀌어

네 얼굴 내 얼굴이

하나의 강에 별로 뜨는 그때까지

 

 


 

 

박소향 시인 / 새해 소망

 

 

새해가 되면

가슴 가득 소망을 품게 하소서

 

그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며

열심히 땀 흘려 정진하게 하소서

 

결과에 상관없이

내가 노력한 만큼 감사하게 하시고

 

받은 것보다는 베푼 것을 먼저 생각하는

겸손을 갖게 하소서

 

높은 곳보다 낮은 곳을 볼 줄 아는 눈을 갖게 하시고

욕심을 버리고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지혜를 갖게 하소서

 

절망과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올지라도

원망하며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는 겸손한 가슴을 갖게 하시고

먼저 화해를 청하는 용서의 손도 갖게 하소서

 

사람이 사랑으로, 세상이 사랑으로

사랑으로 모든 어려움과 허물이 덮여지는

그 사랑을 내가 먼저 실천하고

가질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축복은 간절히 바라는 자에게 먼저 당도한다는

믿음으로 늘 준비하는 내가 되게 하소서.

 

 


 

 

박소향 시인 /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

 

궂이 빛나려 애쓰지 않아도

빛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아도

눈부신 사람이 있습니다

검은 옷을 입어도 하얘 보이고

아무리 감추려 해도 고와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추운 날에는 따뜻해 보이고

바람부는 날에는 넓은 창이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어 쓸쓸한 날

문득 풍성하게 넘치는 사랑으로

든든해지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가슴은 얼고 마르지 않는 눈물

그 너머로 눈꽃송이처럼

눈부신 그리움이 되어 넘실되는 사람

오이처럼 싱그럽고

초코렛처럼 달콤하여 얼어버린 마음

녹이러 가고싶은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미안하다고 말하면 더 미안해 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면 더 사랑하는 사람

언제라도 슬픔을 내려놓고 기대어도

좋은 사람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거칠은 얼굴도 고옵게 봐주는 사람

빗나간 마음도 어여삐 보아주는 사람

한마디의 말도 놓치지 않고 챙겨주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얼굴보다 옷차림보다 마음을 먼저

보아주는 사람 가진 것 보다 없는 것 보다

못가진 것과 부족한 것을 더 먼저

이해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용기와 위로와 힘과 사랑을 그리고

아름다운 마음과 말을 가진

당신은 바로 그런 사람 입니다

 

 


 

 

​박소향 시인 / 저문 마음

 

 

천둥소리 깊은 여름

밤 장마처럼

굳세게 쏟아지는 속세의 잔해들

 

감정의 골 깊어

어디론가 무심히 섞이어 떠나고

어쩌다가

둔덕 위 수북한 풀 무덤처럼

몸짓만 무성한 그대

 

속절없이 흔들리는 일도

한 철인 걸

등 뒤로 나부끼는 외로움

왜 몰랐을까

 

꿈마저 희미한 그 때

창밖의 하늘은 푸르러

바람으로 채우던 허기

 

마음을 버려야지

그래서

적막한 저 비처럼 쏟아내야지

 

 


 

 

박소향 시인 / 12월의 이별

 

 

바람도

한번씩

나뭇가지에 앉아우는 겨울

단 한번

인생을 흔들던

순간의 아득함이여

잘가라

십이월의 발끝에서 서성대던

긴 눈물의 그림자여

잘가라

 

 


 

 

​박소향 시인 / 가을 지나기

 

 

흔들리다가 흔들리다가

끝끝내

땅속으로 침전되어 가는

나뭇잎의 화려했던 한 시절을 보며

내 나이 어느새 가을 같다는 느낌이

문득 살갗으로 아리게 와 닿습니다.

어느 평범한 일상처럼 서글프게요.

 

죽음은 어쩌면 산 자가 보기엔

또 다른 행복한 영역의 꿈인지도 몰라요.

아무 것도 느끼고 싶지 않은...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은...

아무 세상도 보고 싶지 않은...

 

딴은 오늘 내가

분주하게 살아낸 삶 한조각은

이미 누군가에게 빌려 준

또 다른 한 부분의 삶인지도 모르죠

나를 닮은 그 누군가에게 준...

 

오늘처럼 심하게 가을이 내려 앉는 날은

심장에 몰아치는 바람소리마저

참 그리운 걸요

누군가 벗어 놓고 간

부드럽고 연약한 절망처럼

이유 있는 아픔인 걸요

 

하지만 어느새

창틈만큼 벌어진 당신의 꿈 속으로

나는 또

무제의 나를 들여 놓고 있습니다

깜박 잠을 잊고 있던 그 때처럼요

 

그리고 끝내

저 깊은 곳에 제몸을 내려놓은

잎들의 화려한 마지막처럼

투명한 어둠에 충만해지려 하고 있어요

 

 


 

박소향 시인

경기도 양주 출생. 2003년 월간 시사문단에서 시 부문 우수상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계간시와수상문학 사무국장. 종로문인협회 회원. 과천문인협회 회원. 선진문학작가협회 자문위원. 선진문학 신인문학상 심사위원. 2007년 휴먼메신저 휴머니즘 우수상 표창. 2017년 시와수상문학 문학상. 시집 <바보가되어도 좋았습니다 그대를 사랑할 때만큼은> <분(粉)>. 시향동인지 '시의향기'. 독도사화집 '독도에서 온 편지' 外 다수 동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