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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정 시인 / 갈증 쏟아지는 물이다
컵의 질문이었을까 솟구치는 생각인가
새였다가 새털이 되고 끝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투명한 물의 잎사귀가 날리는 날이다
왜 그때 난 당신 생각이 났을까 앞서가던 계절이 넘어졌고 새들의 날개가 멍들고 있었다
시간이란 늘 넘치게 충분하다고 믿었지 조금씩 아껴먹다가 나도 모르게 다 먹어버려 하나도 남지 않은 주머니 속 그것처럼
너무 빨라도 늦어버린 이상한 약속들 누군가를 잃고서야 서로를 알아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은 비명을 통과하는 화살인가
꽃의 허밍은 언제 시작하는 줄도 모르고 끝나고 순간은 순간의 그림자를 따라 타들어 간다
너무 가벼워 무거운 솜사탕 같은 생의 비밀들 그사이 무사히 안착한 착각 달아오르는 세상의 경계를 맞이한다
아, 목말라 수도꼭지에서 울음이 터진다 -계간 『시와 편견』 2025년 봄호 발표
김미정 시인 / 교차로
모든 길은 초보다 난 사방으로 흩어진다 건너고 건너도 이어지는 횡단보도 휘어진 길이 쏟아지고 바닥이 빠르게 깊어져요 지친 태양이 정지선에 머뭇거리네요 조각난 표정을 만지고 싶지만 울퉁불퉁한 신호음이 멈추지 않아요 누군가 길을 물을 때 뒤돌아보지 않는 속도를 무엇이라 부를까 겹치고 겹쳐 거대해지는 그림자들 금이 간 가로등이 만발해요 하루를 낭비하는 불빛이에요 뒷모습이 손을 흔들며 달려오다 넘어지고요 멀리 가지 못한 골목이 어둠 속으로 흘러내려요 내게서 빠져나가는 한 사람을 바라본다 아스팔트 위 흰 새들이 점멸하고 나는 모르는 얼굴이 되어 가로로 세로로 교차되고 있다
계간 『미네르바』 2023 가을호 발표
김미정 시인 / 바다의 문장
모든 서사의 시작은 거품이었다 누군가 해변에 엎드려 온몸을 다해 숨소리를 견디고 있다 모래성은 알고 있을까? 서로의 손등을 두드리는 빛과 어둠의 변주를 흘러넘친다 투명한 질문이 몰려오고 파도의 비밀은 쉽게 지워지지 사소한 표정이 뒹구는 모래밭 잠든 새들은 휘어진 수평선을 잡아당기고 태양은 헤엄치며 늙어가 손안에 움켜쥔 뜨거운 감정이 허물어진다 발끝에 닿는 바다의 기울기와 젖었다 말라가는 시간의 주름을 생각한다 모래의 발자국들은 머물지 않는 오늘을 기록하느라 바쁘고 세상 밖으로 한꺼번에 끓어 넘치는 고백이 저무는 햇살의 입자와 함께 멀어질수록 아름다워지는 지금 순간을 써 내려가고 있다
계간 『문예바다』2023년 가을호 발표
김미정 시인 / 울창한 사과
누군가 위태롭게 햇살을 익히고 있다 사과를 먹는 일은 사라진 방향을 오래 바라보는 일 붉은 울음이 씹힌다 휘어진 사과의 밤을 만져봐요 그날 쏟아지던 빗방울의 고백을 잊지 마세요 멀리 날아간 사과 너머의 열병을, 그리고 잎사귀마다 빛나던 그 번개 같은 순간을 사과는 상처가 모여 완성되는 맛인가 너무 시거나 씁쓸해지는 사과들 맛볼 수 없는 사과가 늘어난다 뭉쳐도 자꾸만 흩어지는 날들 풋사과는 풋사과로 지워져요 덜 익은 표정이 가지마다 만발하죠 바람은 모서리를 베어먹으며 자라고 다음은 언제나 다음이에요 뒤돌아서는 초록을 부를 수 없어요 나의 사과는 날마다 어두워지고 깊어지고 사과는 사과에 갇히고 피를 흘리고 우린 주먹을 쥐고 겹겹이 아파한다
김미정 시인 / 내밀한 겨울
눈은 투명을 닮은 그림체 그것은 이전으로 가려는 화살표 불가능을 예보하는 환한 스웨터야 맨발의 새들이 만발해 찬 대기의 내부가 휘어지고 겨우 도착한 어젯밤이 빙판에 미끄러진다 허공을 견디고 밀며 때로는 딛고 아슬아슬하게 맞이하는 이름 없는 순간 숨겨놓은 빛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긴 목도리를 두른 감정들이 하나둘 떠나고 온전한 몸을 보여주지 않는 눈이 날린다 안아줘 안아줘, 우린 입김을 모아 눈을 뭉친다 나뭇가지가 눈을 기억하는 동안 거리는 오래되고 이내 뭉개지는 계단들 열린 상자들 우린 조금씩 벌어진 시차로 녹아내릴 거야 찬 공기가 앞에 머문 세상을 뚫고 가듯 온몸으로 휘저으며 나아가는 것 사라지는 것들이 공중을 지배한다 누군가 언 눈물을 녹여요 눈빛으로 온기를 만들어요 그것은 한 사람을 살리거나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들을 온 힘으로 밀어 올려주는 눈이 날린다 세계를 고요히 숨 쉬며 겨울은 언제나 한가운데 있었다
-월간 『현대시』 2025년 1월호 발표
김미정 시인 / 산방산 푸른 밤
물컹한 달빛이 바다로 흐르고
밤, 밤이 운동화를 신고 있다 바다 쪽으로 휘어진 산방산 산등성 위 눈썹달이 고요하다 먼바다는 빛나고 눈앞은 캄캄하다 두 팔을 흔들며 걸으면 씩씩한 바람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자기 그림자에 말을 걸었다 헤드폰에 모여들던 음악이 사방으로 흩어지기도 했다 나는 아픈 동생과 함께 타원형 운동장을 돌고 있다 울음을 대신한 멜로디를 동생의 손에 쥐여 주었다 손가락 사이 제주의 바람이 몰래 지나갔다 곶자왈을 아침마다 복용하는 동생은 점점 초록의 표정을 닮아가고 있다 가끔 그 내음을 온몸에 바르곤 했지만 이내 계절은 어지러움으로 비틀거렸다 겨울도 겨울 같지 않은 제주에서 난 출구를 잃고 헤매는 바람의 갈피를 넘기는 일을 반복했다 이제 좋아질 거야 점점 나아질 일만 남았어 애써 위로하는 수선화의 노란 말이 동생은 들려도 듣지 않은 척했다 무표정의 표정이 겨울을 보내려고 별빛을 뭉친다 산방산은 종 모양이야 동생은 말했다 종소리가 울리면 곧 봄이 올까 우리는 어둠의 한가운데를 돌고 있다 타원이 직선으로 느껴졌다 이 세상에 멈춘 것들은 없어 보이지 않아도 다 움직이고 있지 내일은 어느 바다로 노을을 보러 갈까 밤이 푸른 밤의 운동화 끈을 묶는 동안 우리는 조용히 기다려줬다
-계간 『문학저널』 2024년 겨울호 발표
김미정 시인 / 숨
익은 공기들이 떠오른다
허공을 데우는 일
세상에 숨을 불어 넣는 사람들
뱉는다 숨을 참느라 숨어 있었어 술래들은 나타나지 않지 숨이 숨을 연명하느라 가파른 언덕에 오른 거야 계단의 빈자리를 채우느라 당신의 호흡을 다 썼어
하루를 낭비하는 일은 감쪽같지 숨이 남은 요일들을 오려 이어 붙인다
날마다 떠오르는 캄캄한 표정들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당신의 눈동자가 보이지 않네 끝날 듯 이어지는 바닥은 침묵으로 물들고 파닥이는 물고기들과 숨소리 나지 않는 꽃들이 만발해
숨을 데리고 사라지는 순간들 잠 속에서 눈을 뜬다 흔들리는 입김이 피어나고 물방울이 물에 잠긴다 잠든 시간의 발바닥을 간질인다
깊은 숨을 몰아
숨이 숨 쉴 수 있게 -〈시를사랑하는 사람들〉2023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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