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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동범 시인 / 구름의 묘지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1.
조동범 시인 / 구름의 묘지

조동범 시인 / 구름의 묘지

 

 

 세계의 끝에 가면 구름의 묘지에 당도할 수 있을까. 구름이 흐르고 흘러 세계의 끝에 다다를 때 구름은 이윽고 사라지고, 부서지는 모래언덕을 서성이는 것은 누군가의 악몽뿐이다. 오래 전에 죽은 자가 있고 구름의 묘지에서 그는 썩지도 않고 서서히 부서지려 한다. 바람조차 불지 않으므로 죽은 자는 천천히 부서지며 메마른 지상이 되어갈 뿐이다. 비가 오지 않는 날들이므로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없다고 그는 생각한다. 지나온 것들을 떠올린다고 달라지는 건 없는 법이지. 메마른 공중을 지나치며 구름은 그저 흔적도 없이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다. 영원히 썩지 않는 모래언덕에 누워 바라보는 하늘은 맑고 푸르다. 모래언덕에 누워 죽음에 이른 자의 음성이 흘러나오는 것만 같다. 이곳은 구름의 묘지이므로 하늘은 소멸에 이른 구름의 텅 빈 허공뿐이다. 폭풍우가 몰려오는 하늘이나 적란운이 피어오르는 적도의 하늘은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모든 구름은 흐르고 흘러 세계의 끝을 향해 사라지려 한다. 무수히 많은 밤과 낮과, 세계의 끝에서 구름은 끝도 없는 소멸에 이르려 한다. 오래 전에 죽은 자가 있고 이곳은 구름의 묘지이므로 죽은 자는 이제 죽음조차 기억나지 않는구나.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다. 이곳은 구름의 묘지이고 소멸에 이른 구름은 세상에 종언을 고하고 어느새 완전한 공중이 되려 한다.

 


 

​조동범 시인 / 그리운 남극​

 

 당신은 진지한 표정으로 배낭을 꾸린다. 창 밖에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비 내리는 어느 오후. 당신은 소풍을 떠나려 한다. 배낭 안에 바나나 따위는 없다. 동물원 가는 길, 위로 비구름 지나간다. 당신은 배낭을 메고 소풍을 간다. 우산도 없이, 폭풍을 뚫고 가는 소풍. 이 길이 끝나면 비 그치려나. 신발 안의 빗물이 둔탁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비에 젖어, 당신은

 주머니에서 나침반을 꺼낸다. 나침반의 바늘은 고집스럽게 극점을 가리키고 있다. 바늘의 끝을 따라가면 빙산을 만날 수 있을까. 당신은 비를 맞으며 동물원으로 가고 있다.

 그곳에서 펭귄을 만나리라.

 동물원의 펭귄, 물위에 누워 나침반처럼 극점을 가리키고 있다. 비에 젖은 당신, 유빙처럼 살아온 삶이었느냐고, 남극을 잊었느냐고 펭귄에게 묻는다. 펭귄은, 극점에 담겨 깊은 바다로 가라앉고 있는 중이다.

 두 눈 가득 남극을 담고.

-2002년 제9회 문학동네 신인상 당선작

 

 


 

 

​조동범 시인 / 버거킹을 먹는 여자​

그녀는 버거킹 마니아.

화창한 봄날 눈부시게 화장을 하고 버거킹으로 간다.

택시가 만들어주는 버거킹과의 거리

이십 분 내내 그녀는 버거킹만을 생각한다.

친구도 없는 외출.

버거킹은 그녀의 애인이다.

빛나는 바닥을 가로질러 가야 하는

햄버거 왕국.

그녀는 딱딱한 의자에 앉아

버거킹을 기다린다.

드디어 버거킹이 등장한다.

그녀는 버거킹의 이미지를 먹는다.

버거킹의 간판을 먹고

빛나는 바닥을 먹고

화려한 네온 기둥,

화장실의 변기까지 먹어 삼킨다.

정오의 햄버거 하우스 버거킹.

햄버거 하우스 버거킹에서는

이미지를 구워 햄버거를 만든다.

버거킹의 시종들은 세련되고 친절하며

버거킹을 집어드는 그녀의 손은

우아하고 아름답게 빛난다.

햄버거 하우스 버거킹에서는

누구나 공주가 된다.

버거킹 마니아, 그녀는

버거킹과의 거리를 가늠하며

이미지의 왕국, 버거킹으로 간다

 

 


 

 

조동범 시인 / 산청*

 

 

 상복을 입은 여자의 등 뒤로 상여가 타올랐다

 상여의 불길이 새 떼처럼 하늘을 가득 메웠고 무수히 많은 죽음이 여자의 어깨 위로 터벅터벅 떨어졌다. 상여의 불길을 돌아보며 여자가 흙을 만졌지만 만져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타오르는 상여 속으로 몇 개의 만가가 무심하게 들어섰고 여자의 상복이 무덥고 지루하게 펄럭였다.

 마지막 장례를 마치자,

 여자는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회닫이처럼 상여의 불길이 하늘을 맴돌았다.

 상여의 불길이 화사하게 피어오르는 7월이었다.

 타오르는 상여를 뒤로하고 밥을 먹고

 타오르는 상여를 뒤로하고 눈물을 닦고

 타오르는 상여를 뒤로하고 집으로 가는

 7월이었다.

 상여의 불길 위로 외롭고 쓸쓸한 계절이 쏟아졌다. 뭉게구름 처연히 피어 있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장례를 마쳤지만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상복을 입은 추억이 맑고 푸른 산으로 들어서는 폭염이었다. 상여의 불길 속으로 부장되지 못한 추억이 던져지기도 했고,

 한 마리 늙은 소가 더러운 발굽을 핥으며 불길 속의 7월을 무심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타오르는 상여를 뒤로하고

 바람이 불고 구름이 흘러가고 숲이 출렁이는 7월이었다.

 타오르는 상여를 뒤로하고

 밥을 먹고 눈물을 닦고 집으로 돌아가는,

 상복을 입은

 7월이었다.

 

*경상남도 산청.

 

*상여 사람의 시체를 실어서 묘지까지 나르는 도구. 10여 명이 메며 길이가 길고 꼭지 있는 가마와 비슷하게 생겼다.

*만가 : 상여꾼들이 상여를 메고 가면서 부르는 구슬픈 소리.

*회닫이 : 장사 때 하관을 한 후 흙을 메우며 회(석회)를 다짐.

*하관 : 시체를 묻을 때에 관을 광중(中)에 내림.

*광중 : 시체가 놓이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을 이르는 말

 

 


 

 

조동범 시인 / 걸스카우트

 

 

겨울이 가고 봄이 왔어요

엄마

구름은 젖은 그늘을 만들며 흘러가고 야영지는 낯선 별들로 가득했지요

어린 소녀들은 저마다 머리카락을 풀어 숲의 그늘을 더듬고 깊은 산의

골짜기는 한없는 그늘 속으로 사라졌어요

엄마

야영지의 설레는 첫 번째 잠이에요

수액이 된 흰 눈이 저마다 서글픈

꽃잎을 길어 올리는 소리가 들리는 밤이에요

산은 깊고, 거대한 소문처럼

숲의 어둠은 은밀하고 매혹적이었어요

소녀들은 눈물을 흘리며, 구름이 만든 그늘을 따라 입산했고요

골짜기의 그늘 속으로 사라진 몇몇은

새학기가 다가와도 하산하지 않았어요

야영지의 밤은 깊어만 가고, 사라진 소녀들은 쉽게 잊혔어요

봉우리마다 옮겨 붙은 불길은

환하게 야영지의 어둠을 밝히고 있었고요

소녀들은 불길 속의,

놀랍도록 늙어버린 엄마들을 바라보며 경악했어요

불길 속의 엄마들은 비명을 지르며

소녀들을 향해 맹렬히 쏟아졌어요

소녀들의 온몸을 관통해,

생을 다한 별자리가 사라지고 있군요

야영지의 밤은 잊을래요

돌아오지 않는 소녀들의 이야기도 잊을래요

엄마의 이야기가 밤새도록 들려오는,

놀랍도록 무서운

야영지의 밤이니까요

놀랍도록 두려운

나는 아직 걸스카우트니까요

 

 


 

 

조동범 시인 / 전원

 

 

목책에 매달린 손이 몸통을 잃고 흐느끼고 있다

남겨진 손은

사라진 몸통을 애써 더듬어 보지만

일몰은 아름답고 목책은 견고했다

목책에 매달린 손을 바라보며

죽은 새 한 마리가 무심하게 날아가기도 했다

 

바람이 불고 석양이 다가왔다

석양을 배경으로 목책이 있고 초원이 출렁였다

남겨진 손의 단면은 선홍빛 절망을 떠올렸지만,

초원은 몸통을 잃어버린 손을 말리며

무심한 건기를 지나고 있었다

손의 끝이 잠시 움직인 듯도 하였으나

 

잘려나간 단면 가득 오래된 나이테 선명했으므로

누구도 그것이 남겨진 손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바람이 불고 석양이 다가왔다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은 감미로웠다

노래하는 목동도 한가로이 초원의 풀을 뜯는 가축도 없었지만

모든 것은 완벽했다

 

몸통의 역사를 증거하지 못한 손이 다만

목책에 매달려

선홍빛 바람과 죽은 새의 무심한 궤적을

무수히 견딜 뿐이었다

 

 


 

 

조동범 시인 / 기다리는 마음*

 

 

 나는 때때로 죽음과 조우한다.* 죽음은 어느 곳에나 있고, 나는 숙명처럼 고개를 들어 다다를 수 없는 지평선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이곳은 어디인가. 난로가 켜진 방안은 아직 춥고, 지평선의 끝에서 모래폭풍은 불어오는가. 불행으로 가득한 누군가의 전설이, 죽음을 향해 들리지 않는 음성을 중얼거리고 있는 것 같구나. 라디오에선 요절한 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평일 오전은 어느새 쓸모없는 무료를 견디는 중이다. 가수의 창법은 어딘가 낯설고, 어느새 익숙하다. 죽음처럼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그러나 결코 죽음을 노래 하지 않는구나. 그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지는 국경일의 추도사와도 같은 것. 죽음이 언제나 드라마와 불행을 흐느끼는 것은 아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놓인 국수 한 그릇처럼 물끄러미, 평상에 앉아 바라보는 저물녘의 황혼처럼, 죽음은 다가온다. 죽음은 그렇게 내게로 온다” 나는 스스로 불길을 향해 걸어 들어간 사람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것이 그의 불운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나에게도 죽음은 그렇게 다가온다. 어쩌면 나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폐장된 놀이공원의 음험한 적막처럼, 물끄러미 굴러 다니는 빈 깡통처럼, 죽음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상을 서성인다. 난로가 켜진 방을 떠올린다. 방안 가득 번지는 불길을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던 것일까. 죽음은 먼 곳에 있지 않고, 불길 속을 걸어 나는 그렇게 죽음을 향해 걸어 들어간다.

 

* 김민부 시인의 작품 제목과 시구.

 

-<시와서정>2021년

 

 


 

조동범 시인

1970년 경기도 안양 출생. 서울예대. 한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2002년 《문학동네》신인상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카니발』 『금욕적인 사창가』. 산문집 『나는 속도에 탐닉한다』 평론집 『디아스포라의 고백들』 『4년 11개월 이틀 동안의 비』 연구서 『오규원 시의 자연 인식과 현대성의 경험』 등. 딩아돌하작품상, 미네르바작품상, 김춘수시문학상 등 수상. 현재 경희사이버대, 서울예대, 중앙대, 한경대 등에 출강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