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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준 시인 / 벌레의 철학을 깨치다
한 수 위다, 저 놈은 세상을 보는 눈이 내 머리 위에 있다. 방안에 놈들이 스멀스멀 기어다녀 모골이 송연할 때 많은데 그 진중함은 오랫동안 나를 관찰해온 것이 분명하다. 그래, 내가 함부로 살지 못했던 건 나를 관찰하는 한 수 위가 있었던 것 쳐죽일 놈, 가만히 보니 저도 소름이 돋아있다. 내가 소름 돋도록 무서워하는 것이 나를 향해 소름 돋는 걸 보니 놈에게는 내가 징그러운 벌레인가 보다. 죽일테면 죽여 봐라, 팽팽한 긴장의 줄 위에 올라앉아 천천히 흑백의 시간을 산책하는 영악한 놈들, 커다란 벌레가 둔한 눈동자를 두리번거리며 작디작은 미물과 배수진을 친 것을 보니 한심한가 보다. ─어리석은 벌레야, 넌 아직 멀었다, 벌레에 이르기까지.
권영준 시인 / 예순 끝없이 펼쳐진 바다 허공에 잠긴 눈물 먹을수록 허기지는 고요 꽃이 지지 않는 사계절의 봄 아픔을 단련시킨 희열 한 갑자를 돌아 환생한 소년 처음 연애를 시작했다
권영준 시인 / 아름다운 시체 고추 모종을 심다가 알았다 한때 삶이었던 누군가의 살이 썩어 봄의 물관을 타고 올라오는 것들, 햇살에 발효되어 열매가 되었다가 내 식욕으로까지 흘러들어왔다
아이는 아마 모를 것이다 자신이 탐하는 것이 무엇임을 아는 순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열어젖혔던 냉장고를 경악스런 눈길로 바라볼 테지만, 누군가의 반짝이는 눈동자와 펄떡이는 심장이 애틋한 어둠이 되어 찌개 속에서 끓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아이에게 가르쳐야 한다
벌레의 주검이 더러워 두 눈을 찌푸렸던 과거에게 미안하다 고추 모종 안에 죽어 있는 지렁이를 두 손에 받쳐 들고 내 삶을 끌고 가는 아름다운 시체에게 경배하노니 아, 세상의 모든 죽은 것들에 돌고 있는 따스한 피
권영준 시인 / 추억
길을 가다가 돌아보면 그리운 얼굴들이 보인다 유년의 길섶 사이로 소중한 것을 묻어두고 달려온 낯선 不惑의 거리에서 너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대답이 없다
소백산의 나무는 수도 없이 잎들을 땅에 떨구며 자신을 버리고 한번 버렸던 잎들을 봄마다 다시 주워들어 그리운 이들에게 애타게 손을 흔든다 그렇게 우리는 세월에 쫓겼을 뿐, 너의 존재를 잊은 적이 없다 교정의 품은 아직도 넉넉하고 숨겨놓았던 온기의 시간들은 푸르른 풍경이 되어 남아 있는데
시월의 그날 오래 잠들어 있던 사랑과 우정을 한아름씩 안고 우리 추억을 흔들어 깨워보자 가슴 설레이는 어린 아이 하나 손을 잡고 그리운 시절로 뛰어들어 보자 그럴 때 몸에서는 짙푸른 잎사귀가 돋아나고 나도 모르게 어떤 추억에게라도 다가가 불쑥, 초록손을 내밀어 보는 것이다
-2004.10.3 제26회 풍기초등 총동창회 체육대회 행사 기념 축시
권영준 시인 / 고인돌과의 해후
천년 전 내가 강물이었을 때 원시의 때를 씻어내던 따스한 짐승들이 또 천년이 흘러 불멸의 생명을 낳고 있다 그리운 이름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먼지조차 사라진 이후에도 똑 같은 자세로 수 천년을 더 살아온 힘이 나를 여기까지 인도했으니, 내가 결코 가볍지 않음도 저 숨죽인 어둠 때문이리 그러나 나는 함부로 살아 백년도 품지 못할 텅빈 소유를 수도 없이 반복했으니, 시간이 썩어, 고요가 된 저 단단한 언어를 보아라 녹슨 부장품들만 가슴에 쌓으며 적멸을 괴고 있는, 슬픈 딱딱한 돌에 고인 푸른 피가 내 몸으로 흘러들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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