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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순 시인 / 간절기
상상에도 성수기가 있는 걸까 겨울과 봄 사이 간절기가 되면 상상이 부풀어 오른다
눈 한번 감았다 뜨면 상상 위에 싹이 돋는다 쑥쑥 자란다 무성해진다 건조한 내 생각 속을 떠돌아다니던 모티브를 풀어놓는다 뜯어먹는다
시를 쓴다 유목의 기분으로 탄생한 단어들 문장 위를 뛰어 다닌다 상징이나 비유가 필요 없으니 가식이 없다 알몸의 이미지들
행과 연을 부여한다 울타리라고 여겼을까 답답해서 몸부림친다 흩어지려한다 순간, 상상을 토해낸다
무표정을 하고 나를 올려다보는 시어들 다시 눈을 감았다 뜬다 황무지가 펼쳐지고 나의 시, 또 다시 겨울이다
-시집 <돌에게 자꾸 들켰다>에서
김문순 시인 / 세이렌
바다에서 탄생한 그녀의 노래가 지상을 떠돈다 가는 곳마다 치명을 부르는 목소리 피를 보고야 마는 잔인성이 도로를 질주한다
나는 이미 세이렌을 품고 있었을까 눅눅한 시간이 소리 없이 찾아와 배회할 때면 그믐처럼 어둠이 짙어 오는 심연
자발적이든 우발적이든 그녀를 만나려고 난폭해진다
결핍을 자꾸 물어뜯고 우울을 내내 뒤집어 쓴다 그때마다 안간힘으로도 어쩔 수 없이 쏘아 올려 펼치고 싶었던 날개 거미줄처럼 직조된 도시의 욕망 속에서 부질없는 몸짓으로 휘청일 때 꽃잎처럼 낙화를 바라는 세일렌의 목소리가 난간에 서서 집요하게 미혹한다 나는 도시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난파된 지 오래다 숨의 절정이 결말인 듯 비상을 띄워 깜박일 때쯤에야 감미로운 유혹의 목소리를 듣는다
괜찮아요 나에게 와요 절망 속으로 깊이 가라앉아 있으면 편안한걸요
끊임없이 부유하는 내밀한 세이렌의 부추김 먹빛이던 마음의 심지에 서서히 번져오는 죽음
도시가 삼키기 전에 차라리 도시를 먼저 배반할까 손목에 피가 흐른다 세이렌이 울린다 점점 커져야 하는데 소실점처럼 점점 작아진다 계간 『시와 소금』 2022년 겨울호 발표
김문순 시인 / 맑은 날의 역설
촘촘하게 몰두하는 태양의 느린 손길이 분주하다 식물들의 호응은 노골적인데 한 뼘씩 작아지는 나의 자세만 움추러 든다 간절한 최선은 나무나 풀에게 어울린다 시들어가는 삶의 행간에 물을 주는 일이나 먹빛 머금은 맥박의 안부를 물어보는 일 어둠에게 들키고 만다 조바심을 알고 있는 창문은 안절부절이다 깊은 들숨을 순간 놔버리는 통증 같은 낮달이 바스락거리는 나의 감정을 읽는다 실패의 이력이 몸에 밴 날들 풍경은 무럭무럭 키를 키우고 나는 온쉼표처럼 골방에 틀어박혀 있고 부질없이 부서지는 모래 같은 은둔을 지속한다 각진 구멍이 된 이곳에서 모니터는 겉도는 말을 소리 없이 삼킨다 슬픈 표정으로 좋아요를 누른다 지구 반대편은 지금 밤일 테니까 오전 11시에도 밝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벨을 누르지 않는 방문자가 온다 택배를 가져와 박스를 연다 악마 코스프레 옷을 껴입는다 나만 아는 천사의 기분을 맛본다 2022년 《시와 소금》 겨울호 발표
김문순 시인 / 애완 돌
외로움이 해소될 때까지 돌을 사랑했다
걸림돌 같던 당신이 떠나고 신조어의 파생 같은 애완 돌을 만났다
돌의 생각은 어둠 속에서도 빛났고 나의 애증은 숙연해졌다
밤하늘의 별빛과 달빛처럼 쓰다듬어지는 일에 익숙해지는 맨살
살짝 어루만지다 보면 돌 속에서도 싹이 나올 것만 같다
넌 아직도 기다림을 믿니 흑요석이 밤마다 뚜벅뚜벅 걸어와 속삭였다
그렇게 나는 돌에게 자꾸 나를 들켰다 들켜도 들켜도 부끄럽지 않았다
가끔 손안에 꼬옥 쥐고 있으면 반려의 기척을 내밀었다
쉬이 발설하지 않은 태도와 나를 떠나지 않을 것 같은 과묵
굳어버린 심장과 흘러내릴 수 없는 눈물이 필요 없어서
이젠 돌이 떠나면 내가 먼저 돌이 될 것만 같았다
2022년 ≪열린시학≫ 신인작품상 당선시
김문순 시인 / 리허설 2월의 마늘밭 새 부리 같은 촉수의 리허설이 한창이다 흙의 옆구리를 비집고 영역을 넓혀가는 뿔의 액션 무대를 자처하는 흙이 온몸을 다 내주면 동시다발적으로 솟아오른다 꽃샘추위가 배경으로 깔리지만 아랑곳없다 물이 오르기 시작한 연기가 잔설마저 녹인다 봄바람과 봄비가 선뜻 조연을 자처한다 번갈아 가며 찾아와 해토를 부추긴다
마늘의 시간이 발단을 지나 전개로 넘어 간다 배경음악처럼 종달새가 날아와 운다 그때 나는 밭으로 간다 관객이 되어 기웃거린다 추임새를 보내는 그윽한 나의 눈빛 나의 호응과 마중을 알았을까 줄기를 쭉쭉 밀어 올린다 2월의 매운 시간 속 갈채를 보낸다 한파가 몰아치던 일주일 전만 해도 비극인 줄 알았는데 완연한 희극이다
2022년 ≪열린시학≫ 신인작품상 당선시
김문순 시인 / 소 엉덩이에 눈동자가 산다
아프리카에서는 소의 엉덩이에 부릅뜬 눈을 그려 넣어 천적의 공격을 방어한다지 이것은 솔깃한 위엄이거나 착한 위장술
커다란 눈은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순식간에 귀로 변한다지 센서만큼 예리하게 촉을 세워 사방을 살핀다지 그러나 통하지 않은 맹수도 있었으니
어둠이 내려 눈동자가 빛을 잃을 때 사자가 물고 간 새끼 송아지가 있었다지 울음이 초원을 뒤덮고 마지막 뒷모습을 먹먹하게 되새김질하던 어미 소는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지 광막한 초원의 이슬이 어미의 눈망울을 촉촉히 적신 후에야 혼곤하게 쏟아질 듯한 잠을 붙들고 또 다른 새끼송아지를 지키기 위해 부족들에게 엉덩이를 내밀었다지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자니 살갗 깊숙이 파고드는 소름을 만났고 압정에 박힌 듯한 나의 동공에선 어미라는 천명이 흘러내렸지
그동안 천적이 다가오면 물러나곤 했었는데 흠칫 뒷걸음치며 달아나는 게 일상이었는데
이젠 내 몸 전체가 커다란 눈동자란 생각…
2022년 ≪열린시학≫ 신인작품상 당선시
김문순 시인 / 율려(律呂)
꽃이 피면 잎은 돋고 꽃이 지면 열매가 맺힌다 끈긴 듯 맞닿아 있는 연(緣)과 연(緣) 가락이 되어 차분히 흐른다
하늘은 오늘도 선이 고운 자세다 정수리를 잡아당기는 듯 우주의 기운이 당신과 나를 주목한다
선율을 타고 새들이 난다 사뿐사뿐 3단 디딤 걸음으로 구름이 걷는다 당신도 거기 어디쯤 있을 것 같아 팔을 뻗어 안부를 보낸다
날숨으로 굴신 들숨으로 업이 된다 뱅그르르 돌아 꽃잎을 피워내는 것도 나비의 날갯짓과 연결되어 있다
두 몸이 만나서 이루는 필체 꽃밭은 유연하게 웃는다 당신은 하늘에서 땅의 문양을 즐기고 닿을 수 없는 뭉클한 감정은 나로부터 울려 퍼진다
깊게 가다듬은 호흡 구름 사위로 날아오르는 듯 간헐적으로 휴지를 만드는 비 아련한 감정의 질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내면의 소리를 우주의 언어를 빌려 쏘아 올린다 2022년 ≪열린시학≫ 신인작품상 당선시
김문순 시인 / 박씨상방 접이식 모란 부채 모란이 한 겹 펴진다 부채의 모란이 펴진다는 것은 갓 태어난다는 것 붓끝이 다시 한 겹을 향해 터치를 감행한다 혹여 붓끝이 실수할까 숨소리를 죽이는 순간 흙 속에서 새싹이 움트는 듯 새로운 모란이 펴진다 가슴 벅찬 새들이 날개를 퍼득인다 가벼운 터치 옅은 붉음이 번지자 상기된 얼굴로 골똘해진 침묵 한 겹 더 펴지니 영랑의 뒤뜰에서 모란이 피어난다 활짝 개화하는 그 순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시들지 않는 첫 향기가 꽃잎 바람을 일으킨다 -주간 『강진고을신문』2024년 1월 15일字 발표
김문순 시인 / 양푼비빔밥
어제 먹은 밥 그 힘으로 시를 짓다가 밥먹기를 잊었다.
오늘은 시를 짓는 힘을 남겨 밥을 지어야 겠다.
오 사랑하는 이와 먹을 따뜻한 밥 한 술
김문순 시인 / 눈 속에 핀 집
겨울이 쏟아져 산그늘까지 덮은 변방에서 파수꾼으로 서 있는 나는 눈이 멀고 귀 멀어 있다 온통 백색 적막 속에 드리운 야트막한 언덕에 엎드려 있는 묵정밭을 멀거니 바라본다
참새가 적막을 쪼다가 적막을 뚫고 날아간 자리에 다시 찾아온 적막, 동안거에 든 산사는 묵언에 든 듯 형체조차 가뭇하고 가끔 내 몸의 안부를 물어오는 듯한 들려오는 물 트는 소리, 창문 여닫는 소리
어둠이 내리면 나는 골방보다 더 외로워진 한 점으로 푹, 파묻혀 별들이 지나가는 길에 폐정거장처럼 우두커니 앉아 하루의 변방을 지키는 고독이 된다 눈과 귀와 입이 봉해진 채 언어를 잃어버린 듯 멍하니 면벽을 견딘다
새벽이 올 즈음, 머리와 몸, 손과 발이 점점 풍경이 되기 시작하더니 아침 햇살에 무소유 한 송이 빛나기 시작한다
-시집 <돌에게 자꾸 들켰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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