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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균탁 시인 / 멸종 위기종 인간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0.
김균탁 시인 / 멸종 위기종 인간

김균탁 시인 / 멸종 위기종 인간

 

 

 심장을 기어다니는 벌레를 잡으려고 가슴을 열었다. 혈흔이 배꼽에 고여 소금기 가득한 우물을 만들고 지는 해는 꿈틀거리며 척수액 사이에 햇빛을 떨어뜨렸다. 익사한 벌레가 소금기 빠진 얼굴로 근심을 가득 몰고 와 말라버린 우물의 깊이를 가늠했다. 심장을 기어다니던 벌레는 절망이라고 울었지만, 멸망이라는 메아리가 부서진 우물을 타고 지구 밖으로 흘러 나갔다. 절지동물이 신발 끈을 고쳐 매고 신발의 개수만큼 눈물을 바닥에 떨구었다. 환형동물이 꼼지락거리며 심장에 난 생채기를 간질였다. 가슴을 열자 튀어나온 혈관의 흔적.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다 겁 없이 뜯겨나간 조각난 숨결. 길어지는 호흡을 따라 환형동물의 몸뚱이가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하고, 절지동물은 자신의 발뒤꿈치를 들어 빨라지는 맥박의 숫자만큼 교차하는 발의 횟수를 늘렸다. 절망이 정말 심장으로부터 시작해 폐를 거쳐 폐허가 된 곳에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폐포가 물풍선같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튀어 오른 물방울에 비친 것은 멸종 위기종의 발자국들. 지구를 기어다니며 땅을 온 힘으로 밀어 올리던 허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없는 세계는 없다고 부서져 내리는 몸들이 바스러지며 바람에 날려 흔적을 지웠다. 없는 세계가 있는 세계를 보며 서럽게 울었다.

 

 


 

 

김균탁 시인 / 심씨의 가을걷이

 

 

김씨네 밭에 민들레 홑씨가 날린다

새파랗게 질려 고개를 떨군 상추 사이로

지팡이를 잊고 나온 김씨의 걸음걸이같이

얕은 바람에도 비틀거리는 홍고추 사이로

민들레가 꽃을 피우고 홑씨가 되어 바람에 날린다

 

김씨네 밭에 꽃이 피었다는 건

중요한 일이 생겼다는 증거다

잡초 하나 자라지 못해 참새도 그냥 지나친다는

노랭이네 밭에 꽃이 피었다는 건

죄다 여물어 꽃씨를 뿌린다는 건

건망증이 심해진 심씨에게도 충격적인 소식

김씨가 해거름 노을 같이 걸어갔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심씨는 김씨 같은 노을이 몇 번 졌는지 생각해 본다

하지만 떠올린 이름보다 떠오르지 않는 이름이 더 많아

심씨는 떠난 사람들을 떠올리는 걸 그만두었다

그렇게 잊혀버린 사람들이 몇 명인가

이제는 숫자의 의미가 빛바랜 메모장처럼 너덜하다

 

심씨는 가을걷이가 끝날 때까지 김씨가 나타나지 않으면

김씨네 밭을 트랙터로 싹 밀어버릴 생각이다

그게 또 무슨 심보냐고 동네 아낙네들이 손가락질을 할테지만

싹 밀어버린 밭에 봄이 오면 꽃씨를 양껏 뿌려둘 생각이다

거지 같은 세상 가을걷이는 잊고 하늘에서라도 꽃 구경 실컷 하라고

김씨네 묵정밭에 꽃 같은 시절 양껏 뿌려두고

꽃 피면 막걸리 한 사발 갖다놓고 같이 꽃 구경이나 해볼 요량이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5월호 발표

 

 


 

 

김균탁 시인 / 질뫼늪

 

 

숲은 늙은 남편의 성기처럼 우거져 있었다

 

하얗게 식어버린 손이 거친 애무로

붉게 물들어 떨어질 때까지

어린 것들은 자라지 않았다

 

갓 잉태한 씨앗에게

딱딱해진 젖꼭지를 물릴 때면

몸속을 기어 다니는 습지로 비가 내렸다

 

그런 날이면

아무도 찾지 않는 그늘에

심장을 벗어두고

주파수가 고장 난 라디오처럼 울고 싶었다

 

햇볕이 들지 않는 곳으로

심장이 없는 것들이 바람에 날릴 때면

풍토병같이 다녀간 사람들의

가쁜 숨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 나왔다

 

그늘마저 은밀히 숨겨주는 밤이면

알몸으로 습지를 건너고 싶었다.

 

 


 

 

김균탁 시인 / 사막에 사는 삭막한 꿈은 삭아서 사라진

사라센의 기록

 

 

손가락 사이로 낙타가 기어 다니는 꿈은

그대가 머문 흔적

얼마나 많은 기억을 적어놓았기에

모래알은 이리의 눈처럼 눈부시게 반짝일까요

오래된 기록들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리도 많은 파편을 흩어놓고

발자국도 없이 발걸음을 밟고 떠난 걸까요

 

사막여우는 여름동안 긴 잠을 잡니다

겨울이 없어 서글픈 것들

조각난 추억을 모래에 하나씩 적어 놓으면

남은 잠들과 모두 이별할 수 있는 걸까요

먼저 떠나버린 사람들과

영원한 작별을 나눌 수 있는 걸까요

 

소리가 슬피 울어 적막이 흐르는 모래 언덕

바람은사진 속 사라센 사막의 맞바람을 스치듯

몇 개의 언어를 돌풍 속으로 데려갑니다

하얗게 눈부셔 슬픔을 닮아가는 말들

늑대의 울부짓음인 듯 여우의 여유인 듯

부서진 언어의 파편이 모래알처럼

가볍게 떠올랐다 먼 곳으로 날아갑니다

 

낙타의 오래 된 흔적은 낙차 없는 바람

바람에 바람을 실어 보내면

바라고 바라던 헤어짐이 바람을 탄

모래처럼 흩어질 수 있는 걸까요

수없이 낙오한 기억과 낙서처럼 긁적인 삶

선인장에 꽃이 피었다고

낡은 파피루스에 곰팡이가 피었다 지면

일찍 죽은 자들의 끝나지 않은 작별과 헤어질 수 있는 걸까요

선인장 같은 사랑도 무뎌질 수 있는 걸까요

 

 


 

 

김균탁 시인 / 현몽

 

 

나를 깨운 건 이른 새벽이었죠.

당신은 악몽을 꾸었다

품으로 파고들었고

난 당신을 위해 국수를 삶았죠.

얼마 전 배를 갈라 내장을 떼어낸

눈이 맑은 멸치 두 마리가

먼 바다를 떠돌다 지쳐갔죠.

 

고명은 삶처럼 간단했죠.

냉장고에는 말라비틀어진 애호박 반 덩이만

오랜 겨울잠을 자고 있었고

난 치부를 들킨 듯 서둘러 문을 닫았죠.

당신은 국수를 먹으며

이제 좀 살 것 같다

품으로 파고들었고

난 오래 삶은 악몽을 먹었죠.

 

 


 

 

김균탁 시인 / 집오리와 들오리의 집들이

 

 

책상 위에 쏟아진 건 지긋지긋한 오후였어

창으로 들어 온 지겨운 햇살이

집오리의 괴성처럼 눈을 찡그렸지

검은 강아지의 파란 눈이 노려본 건

과거의 오늘이었어

 

“피가 쏟아져요 선생님,

곧 죽는 건가요?”

 

들오리의 꼬리털보다 손이 하얀 의사는

그건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라고

날카로운 메모에 스친 흉터인 듯

구겨진 일기에 적은 날씨인 듯

흰 가운을 흔들며 무심하게 울었지

 

“울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잊힐 비밀을 말해줄게”

 

밤이면 은밀한 바람을 일으키는 그림자

긴 빛을 따라 길어지는 어둠은

하양 속에 잠든 검정

은은하게 퍼지는 은어는

바다를 그리워하다 죽어버린 밀어

꼬리를 어지럽게 비틀거리며

심해를 헤엄치는 해진 셔츠 같은 언어는

뼈를 잃어버리고 헤어진 무척추의 슬픔

 

속삭이지 못한 말들이

비밀이 되어 허공을 떠돌고

잠들지 못한 오후의 나른함을

지루한 강아지의 낮잠같이 핥는 밤에는

집을 잃어버린 오리들이

괴성을 지르며 울어

 

울다 잠든 소리가 가위에 잘려

손끝에 전해지는 감촉을 감추면

나쁜 버릇을 버리지 못한

사랑 같은 열병과 깨어진 조각에 베인 상처가

피를 흘려도 멈추지 못할 환각을 넘어

환청처럼 곁을 맴돌아

 

“이건 비밀이니까 너만 알고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 모서리가 해진 사육장처럼

무너져 내릴지도 몰라”

 

검은 강아지의 입 속에 남은 하얀 오리털

애도하기에는 너무 파랗게 질려버린

기억들이 집오리와 들오리의 차이처럼

무성하게 자랄 거야

 

 


 

김균탁 시인

1982년 경북 안동 출생. 안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9년  《시와 세계》 신인상 등단, 한국작가회의, 안동작가회의 회원, 대구경북작가회의 사무차장, 글밭동인, 이육사문학관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