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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달자 시인 / 창 너머 집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1.
신달자 시인 / 창 너머 집

신달자 시인 / 창 너머 집

 

 

북쪽 창 너머 학교 마당

키 큰 잣나무 위에 까치가 집을 짓고 있다

 

나뭇가지 하나 물어 오고

 

다시 나뭇가지 하나 물어 오고

 

종일 나뭇가지 물어 물어 오고

 

입 하나로 집을 짓는다

 

햇살 묻은 가지

어둠 묻은 가지

비와 눈이 묻은 가지를 쌓아

딱 요강만 하게 지어 놓은 집

 

까치 몸 푸는 날

 

지는 해도 아쉬워 머뭇거리는 시간

 

매무새를 고치며 그윽하게

 

나도 나뭇가지 하나로 까치집이 되어 보는 날.

 

- 시집 〈간절함〉 민음사

 


 

신달자 시인 / 뻘

 

 

저것봐!

누구의 진구렁 과거인가

 

벌렁 세상에 드러난

도무지 덮을 수 없는 난처한 탈선인가

 

벌거벗었다

무슨 고백이 이리도 의뭉스러운가

차라리 삶의 늑골을 보여주는 구나

아무리 말해도 인간들이 몰라서 물을 좍 빼고

삶의 밑바닥을 보여주는구나

저것이 삶이라면

누구의 골수를 다 빨아 먹고 저렇게 몸을 불렸을테지

벼랑에서 뛰어 내린 사랑을 말하기도 하겠구나

삶의 중간 계단에서 두발 꺽여

차라리 하늘로 구름을 붙잡기도 하겠구나

징그럽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여자의 운명같은

결코 연꽃이 피어나는 내세(來世) 같은 답은 없을지라도

진흙사이 사이

구름도 지나가는 아찔한 멍텅구리 슬픔을

새들도 피해 가는 거 본다

떠나겠다는 암시조차 없이

저 홀로 마음 유서를 남긴 마지막 얼굴이 저랬을까

한번도 달달해 본 적 없는 여자같은

살집만 서럽게 홀로 진흙으로 늙어 가는 여자같은

 

곧 바닷물이 들어 올라나?

 

 


 

 

신달자 시인 / 트롯의 밤

 

 

 홀로 와인 반병을 마셨으니

 나는 지금부터 미쳐島*에 닿는다

 量의 선을 넘으면 언제나 저미는 핏줄을 안고 운다

 

 아버지는 대부자였지만 주색잡기로 쫄딱 망해 고향 쫓겨나

서울 변두리 살며 누울 때도 고향 바라보며 눕는다고 했던 아버지

 

 어느날 술 한 잔 마시고 "고향 떠나 십여 년에 청춘은 늙어어엉어" 으윽 울던 아버지

 그 눈물 아버지 피같이 내 가슴 위로 흘렀지

 

 아버지 바람나 집에 뜸할 때 술로 배를 채우며 울어울어 울었던 어머니

 불현듯 마당 가운데 서서 아리랑을 살 찢어지게 부르다 쓰러지는 미친 여자

 그 모습 아직 나를 발광하게 만드는데

 

 나의 성장 공간에는 빈 공간이 없어라

 누구도 볼 수 없는 공간마다 젖은 손수건이 무겁게 흔들거려

 아버지 어머니 눈물 지금까지 따라왔어라

 

 빈 와인 병을 들고 가슴을 치며

 연분홍치마가 봄바람에... 애간장 저미는 내 노래가

 방울방울 눈물방울

 연분홍치마를 몇 천 번을 불러도 기다리는 남자는 오지 않고

 

 오늘밤 취한 나를 두고 봄날은 간다

 

*미쳐島는 김승희의 그래島에서 연상된 것임.

 

 


 

 

신달자 시인 / 종소리

 

 

외로움이 내게 다가와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은은하게 조금은 무뚝뚝하게

외롭다고 한마디 하네

 

외로움이 죽음에게

 

내가

프랑스 루르드 성당에서 사 온

종을 살짝 쳐 주었는데

그게 그렇게 깊은 물소리가 나는 거야

 

다시 오면 이스라엘 성당 종을

그 다음엔 연둣빛 새잎 하나를 손에 쥐여 주었는데

 

그 담엔 내게 오지 않았어

 

그 소리를 다 들으려면

세 번의 생은 다 가야 할 테니……

 

 


 

 

신달자 시인 / 한강이 나에게 이르노니

-다섯째 말

 

 

나는 육(肉)이고 혼(魂)

너무 그리워 흐르다가 강이 되고 바다가 되지요

유유히 흐른다고?

나는 지금 파도치는 곳으로 가는 중이에요

사실은 지금도 내 몸은 파도치고 있는 거예요

멈춰 선 강은 없어요 흐르고 흐르는 나의 생리를

그러면서 이곳저곳 생채기를 견디는 나의 이 간곡한 흐름을

 

나를 하늘처럼 두려워하진 않지만 나는 하늘이기도 해요

하늘은 나의 탁본 나는 하늘의 심장

잘 보면 실핏줄이 터져 붉은 피가 미세하게 흐르고 있는 거 알아요?

사람들이 이런 속사정을 아무리 모른다 해도

천만년 기억을 내 몸속에 다 갈피갈피 지니고 있는데

사람들이 나를 함부로 하는 일은 하늘을 욕되게 하지요

사람들이 믿는 그 신의 섭리는 차라리 주둥이 작은 새들에게 물어봐요

 

사람의 욕망은 내 발밑에 퇴적물로 깔려 있고

사람들의 불안은 침전물로 굳어가고 있어요

흐르지 않는 침전물 이물질의 거점은 나를 괴롭혀요

나를 아프게 해요

예禮를 알고 아름다움을 알면 사람들이 소주병으로 제 몸을 학대하진 않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나를 생명줄이라고 마이크 앞에서 말하기도 하더라구요

그뿐인가요 나를 잔잔하다 아름답다 불빛이라도 내리면 고혹적이다 그래요

뭐! "고혹?"

 

 


 

 

신달자 시인 / 헛신발

 

 

여자 혼자 사는 한옥 섬돌 위에

남자 신발 하나 투박하게 놓여 있다

 

혼자 사는 게 아니라고

절대 아니라고

남자 운동화에서 구두에서

좀 무섭게 보이려고 오늘은 큰 군용 신발 하나

동네에서 얻어

섬돌 중간에 놓아두었다

 

몸은 없고 구두만 있는 그는 누구인가

형체 없는 괴귀(怪鬼)

다른 사람들은 의심도 없고 공포도 없는데

아침 문 열다가 내가 더 놀라

누구지?

더 오싹 외로움이 밀려오는

헛신발 하나

 

 


 

 

신달자 시인 / 북향집

 

 

남(南)을 등지고

 

삼청공원 눈으로 오르는데

 

여명의 빛

 

창 덮은 한지 사이로 흘러라

 

곡진한 눈치를 떠오르는 햇살이 알았는지

 

둘러 둘러

 

북향 내 집 앞니만한 뜰에도

 

설핏 내리더라

 

푸릇한 새벽빛이

 

잇몸처럼 붉어지더라

 

 


 

 

신달자 시인 / 북촌 가을

 

 

한옥 기와 모서리가

맨드라미 빛깔로 물들며 솟네

이 집 처마와

저 집 처마가

닭 벼슬 부딪치듯

사랑싸움을 하네

 

알배기 햇살

쏟아지는 갈 오후

한옥 뒷마당에도

따뜻한 햇살 뒹구네

 

 


 

신달자(愼達子) 시인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숙명여자대학교 국문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1972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봉헌문자』 『겨울축제』 『모순의 방』 『시간과의 동행』 『아버지의 빛』 『아가』 『아버지의 빛』 등.  장편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산문집 『백치애인』 『그대에게 줄 말은 연습이 필요하다』 『여자는 나이와 함께 아름다워진다』 등. 1964년 여상 신인여류문학상, 1989년 대한민국문학상, 1998년 '향문화대상, 2001년 시와 시학상, 2004년 시인협회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