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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율 시인 / 적응이라는 말
1 아무것도 아닌 의자와 아무것도 아닌 고요 속에서
로즈마리가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잎을 틔운다
목을 꺾어 고개를 돌리면
빈 공간의 텅 빈 시간 아무 것도 아닌 비명과 아무 것도 아닌 구덩이와
2 오래 박혀 있던 긴 못을 빼는 심정으로
3 발도 없이 문턱을 넘는 이들처럼 진심을 다하려는 마음이 늘 옳은 것은 아니지만
4 지구 반대편 어디에서는 폭설이 내리고 또 어디에서는 폭우가 쏟아지고
뭉텅뭉텅 잘린 자리마다 칼의 기억이 박혀있다
5 썰은 오이를 꼭 짜고 있을 때 누군가 그림자처럼 걸어와
너도 매순간 불타고 있구나
6 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한 사람 안에 웅크리고 있는 또 한 사람을 구하는 일
잎이 떨어지다 정지하는 순간마다 그늘과 햇빛 사이 조용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다정한 연옥의 난민들처럼
7 한밤중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했던 말을 또 했다
-반년간 『서정과현실』 겨울호 발표
김지율 시인 / 강릉
모두 잠든 새벽달 아래 서서
여기가 지난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조용한 막사 앞으로 긴 그림자가 지나갔다
이 계절이 지나면
폐장한 해수욕장의 파라솔 아래 쌓여있는 모래들 슈퍼 앞에 묶여 있던 개가 해변에서 멀어지는 사람들을 오래 바라본 그때처럼
도착하기 전에 흰 밧줄에 묶여 떠난 그들처럼 우리는 누구도 서로를 기억하지 않을 거라고 아무도 여기 없었던 것처럼 그 무엇도 증오하지 않을 거라고
바다로 난 길 끝으로 흰 그림자 하나가 달려 나갔다
멀리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이제 정말 슬프지 않다고 너는 천천히 총을 내리며 말했다
김지율 시인 / 아무도 기적을 말하지 않았다
누군가 삽을 들고 목련나무 아래 서 있었다
어디에도 닿지 않은 채 사라진 마음은
유언일까 선언일까
푸른 돌멩이를 오래 쥐고 있으면
오래전 누군가 내 무덤 위를 막 지나간 것처럼*
바닥은 조금 더 깊어졌고
밖에 누구 없나요
방 안에는 하루 종일 불이 켜져 있었다
*오래전 누군가 내 무덤 위를 막 지나간 것처럼 : 존 반빌, 「The Sea」.
-시집 『우리는 날마다 더 아름다워져야 한다』(2022)
김지율 시인 / 나는 바닥부터 시작했다
여전히 한쪽에서는 돌이 날아오고 한쪽에서는 긴 싸움이 이어졌다 사거리에는 높은 십자가가 있고 우리의 규칙이 누군가의 목적으로 바뀔 때 내가 사랑했던 모든 밤들을 시행착오라 해도 불길 뒤에서 헌옷 수거함까지 덕지덕지 붙은 포스트잇과 벽제 화장터로 가는 길에서 어떤 시간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인간으로부터 인간에게로 이미 지나온 곳에서 문득 그 바다가 다시 보고 싶었다 벽이 시작되는 어딘가에서 모두가 끝났다고 말할 때 그것은 다만 부족한 명분과 바깥의 기분 누군가를 마중 나가던 밤하늘의 별은 아름다웠고 더 크고 둥근 사과를 기적이라 했지만 나에게 던져진 필살의 쾌도는 소리 없이 명중했다 날아가는 화살은 또 누군가의 등에 꽂히겠지만 나는 문득 그 바다가 다시 보고 싶었다 ㅡ시집 『우리는 날마다 더 아름다워져야 한다』에서
김지율 시인 / 그렇지만 사과꽃은 피지 않았다고 한다
1 이 숲을 지나가는 무심한 시간들을 사과라고 치자, 2 사과는 빗속에서 커지는 나 사과는 푸른색 사과는 빨간색 사과는 조용하게 부풀어 오른다 둥근 사과는 쪼그라들었다가 갑자기 터지는 10분 전의 로망 3 흰 트럭이 사과를 가득 싣고 저 모퉁이를 돌아갈 때까지 나무에서 오래 흔들리는 사과는 언제나 나 사과의 바깥은 사과의 여백으로 가득하고 4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면 반복되는 사과의 구조와 반복되는 사과의 인내심 앞에서 사과는 사과의 부재를 증명하고 모든 것은 하나의 얼룩에서 시작되고 모든 꽃은 똑같은 무로 현현하므로 7 사과의 시간은 견고하고 사과의 공간은 넓다 반 토막 난 무릎으로도 울지 않는 것들이 한참 동안 곁에 있었다 작은 사과 속의 더 작은 사과가 굴러올 때까지 어느 날 사과를 꺼내 다시 본다고 치자 수사마귀가 자신의 머리와 목숨을 암사마귀에게 내맡긴 것처럼 자살과 종교와 반항은 다르지 않아서 물속에서 퍼져나가는 푸른 잉크를 보며 사과의 윤리와 사과의 맹목에 대해 침묵하기로 했다 햇빛과 돌과 어둠을 등져야만 떠날 수 있는 빈방과
ㅡ시집 『우리는 날마다 더 아름다워져야 한다』에서
김지율 시인 / 비인간 ㅡ우리는 서로의 앞면만 본다
사라진 사람들과 우리 사이 몇 명의 사람들이 더 살고 있을까 어떤 밤은 침묵으로 또 어떤 밤은 피투성이로
꼭 무엇이 되려고 살았던 것은 아닌데 너로부터 시작된 기억이 각목처럼 천천히 굳어갈 때
인간이라는 말과 사랑이라는 말과 슬퍼하지 않기 위해 슬퍼한다는 말이 같은 의미라면 우리 오늘만 살기로 하자
너는 아직도 그 겨울 끝에서 흰 눈 위에 글씨를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썼다가 지운다 스스로의 흔적을 지우며 사라지는 것들 앞에서 자꾸 입에 침이 고일 때, 그러니 다시 묻겠습니다
사라지지 않는 돌은 진실에 가깝지 않니
굳어지는 순간에 무너진 것들이 가슴에 푸른 알을 낳습니다 창밖으로 반쯤 잘려 나간 누군가의 기억 속으로 내가 자꾸 미끄러져 갈 때 자꾸 무너져 내릴 때
동의하지 않습니다 동의하지 않겠습니다
사람은 한 단어이고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인데
사람의 일을 사람처럼 하는 사람과 사람의 일을 사람처럼 하지 않는 사람과
긴 여름이 지나가고 서로에게 달라붙어 함께 사라진 것들은 정말 사람이었을까 사람이 아니었을까
물을 주지 않아도 길게 자라는 나무 사이로 어떤 사람의 이름과 어떤 사람의 얼굴이 지나간다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웹진 『시인광장』 2025년 2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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