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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연숙 시인 / 오대산 가는 길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1.
송연숙 시인 / 오대산 가는 길

송연숙 시인 / 오대산 가는 길

 

 

죽음 앞에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푸르다

 

천년의 고목이 쓰러졌고

연두색 잎들이 둘러서서 조문하고 있다

거목이 되기 위해 나무도 속을 비워간다는 사실

쓰러진 전나무를 보고 알았다

지문이 닳듯이 나이테를 하나씩 지워가며

천년의 바람을 버티어 왔을 나무

 

누런 황소를 앞세우고

저녁 문지방을 넘어오던 할아버지 등처럼

꺾인 채 모로 누운 고목

팔다리 하나씩 떼어주며 고개를 넘던 나무는

걸어도 걸어도 그 자리였다

 

공부하러 타지로 떠나는 장손을

나무처럼 서서 한 점이 지워질 때까지 바라보시던 할아버지

그 가슴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을 나무가 쓰러진 뒤 알았다

 

마당 가에 거울을 내어 걸고 수염을 깎아드리며

우리 할아버지 귀엽기도 하셔라, 하면

어린아이가 되어 방긋 웃으시던 할아버지

할아버진 나이테를 지우며 지문이 다 닳은 손을

가볍게 내려놓으셨던 거다

 

연두색 잎처럼 그리움이 돋아나는 계절

가슴을 다 공양하고 쓰러진 고목을 만났다

월정사 전나무 숲길에서

 

-시집 『사람들은 해변에 와서 발자국을 버리고 간다』에서

 


 

송연숙 시인 / 생각나무

 

 

곱사등처럼 웅크린 시간을 편다

추곡약수터 가는 길

 

살금살금 다가가 두 눈을 가리고

누구게, 하고 물으면

화들짝 놀라 향기를 쏟아놓던 노란 스웨터

봄이면 지천으로 피는 생강나무꽃처럼

그리움의 팻말을 건 사람 걸어 나온다

꼬리를 치켜세우며 다가오는 고양이처럼 선명하다

 

무릎을 접고 앉아 약수를 퍼 올린다

그만큼의 속도와 양으로

줄지도 넘치지도 않고 고이는 사람

무릎처럼 깨진 시간의 빈자리를 호호 불어준다

만병통치 약손으로 아픈 배를 슬슬 문질러

온몸 환하게 불 켜 주던 사람

한 사람이 한 사람의 우주이고 집이었다는 걸

늦봄처럼 깨닫는다

 

생강나무 손을 잡고 약수터에 나들이 온 봄

나뭇잎에 햇살 비벼 널며 파랗게 물오른다

이 소박한 나들이에도

꽃잎 웃음 터트리며 즐거우하던 엄마

서른아홉에서 멈춰 선 그녀는

사진 속 봄꽃처럼 시들지 않는다

 

물방울이 스며 약수터 바위 색을 붉게 바꿔 놓았다

간절히 불러도 소실점처럼 사라지는 이름

알싸하게 쏘는 약수가 빈속을 훑고 내려간다

 

-시집 『봄의 건축가』 에서

 

 


 

 

송연숙 시인 / 발목이 늘어난 생각들​

 

 

스타킹을 벗으면

하루의 허물도 벗겨지는 느낌이다

온도를 높여 놓은 침대 속으로 들어가면 쉽게

물렁해진다

 

우리는 저마다의 침대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각자의 침대에 타인을 눕혀 놓고

침대보다 키가 큰 타인의 생각을

생선 대가리처럼 내리친다

 

잘린 대가리가 튀어나와

자신과 다른 생각의 발목을 기어이 늘려 놓고 만다

 

머리가 없거나

발목이 늘어난 생각들이

네모의 칸에서

네모의 칸에 갇힌 세상에서

 

아티카 언덕의 선술집 같은 뉴스의 정점에선

나그네들의 고함과 삿대질이 창칼처럼 오가기도 한다

 

옆구리에 긴 칼을 찬 거인들의 세상

나의 생각을 껴안고 빼앗기지 않으려 웅크리다가

발버둥 치다가

까짓것 생각 한 토막쯤, 내어주다가

 

뒤척이면서 녹아버리는 긴 잠

 

 


 

 

송연숙 시인 / 웃는 사과

 

 

 아이가 한 입 베어 먹고 간

 사과가 와삭, 하고 웃는다

 문득 웃음의 맛을 생각하다

 사과의 신맛을 떠 올린다

 사과의 투정과 뾰족한 말대꾸와

 즐거운 뺨을 떠 올린다

 

 우는 입으로,우울한 입으로 베어 먹어도

 사과는 웃는 표정이 된다

 그건 한 입으로 울고,웃고 토라지는 일이 가능한 일처럼

 불가능한 사과의 표정이 된다

 

 웃는 사과를 책상 위에 놓아두기로 한다.사과는 두 개의 밧줄에 매달려 그네를 탄다.사과의 볼을 만지던 햇살이 노란색,보라색 꽃잎을 피운다.뱀의 뒤꿈치처럼 새빨간 사과,양동이에 물을 퍼 담으며 아삭아삭 웃기도 한다.웃음을 손에 쥔 껍질이 안으로 말려 들어가면 곱슬머리 바람이 불룩하게 흘러내린다

 

 옷자락에 쓱 문질러

 와삭 베어 문 사과의 즙이 손가락 사이를 타고 흐른다

 별똥별 같은 씨앗이 무릎 위로 떨어진다

 입꼬리가 올라간 사과는 웃으면서 늙고

 쪼글쪼글해지고 한 쪽 보조개가 반점 같이 썩을지도 모른다

 복복福자의 금딱지를 임종처럼 떼어내도

 사과는 웃는다

 웃으면서 향긋한,썩는 냄새를 풍긴다

 

 


 

 

송연숙 시인 / 나비뼈

 

 

 브라질에서 나비가 날갯짓하면 텍사스에서 토네이도가 일어날까?*

 

 두개골 X-레이에 나타난 노랑나비 한 마리, 그 나비뼈**를 바라본다. 나비는 뼈대 있는 가문을 원했고, 나는 뼈대 있는 가문 따윈 버리고 싶었다. 계절의 페이지를 되돌려 딱 한순간, 나비가 날개짓하는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그 어느 시점으로 돌아갈까? 돌아가서 노란 날개 팔랑팔랑 흔들어 토네이도 치는 오늘을 다시 만들까?

 

 꽃을 보면 눈을 지그시 감고 코에 먼저 향기를 건네주었다. 맛있는 음식 앞에선 코를 벌름거리며 향을 먼저 먹었다. 내 코안에 나비가 있다는 것 그때 알았다. 뼈대 있는 가문을 얻기 위해서는 날개를 버려야 한다는 것도.

 

 찢어진 파지들이 지구의 판이 되고 그 판 사이로 나비가 날아오른다. 차가운 공기를 따뜻하게 데워 들숨으로 들이고 들숨이 다시 날숨이 되는 시간, 걸어온 길로 되돌아가는 여행은 나비굴**을 통과해 나비가 되는 시간이다. 시공을 넘어가는 장엄을 위해, 나비를 위해, 카오스의 굴 같은 검은 페이지를 나는 담담히 넘기는 것이다.

 

*에드워드 로렌츠의 나비효과

**코 안에 들어온 공기를 따뜻하게 데우는 역할을 하는 뼈와 구멍

 

 


 

 

송연숙 시인 / 이파리 부엉이

-르네 마그리트의 공포의 동반자

 

 

부엉이는 한 장의 나뭇잎

밤눈을 밝히고 달을 살피는

떡갈나무 이파리들 중 하나일 것 같다

이파리들은 저희들이 다

새의 일종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아니,최면을 걸며

새의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

후박나무나 오동나무같이

넓은 이파리들이 있는가 하면

갓 돋아난 연두처럼 재잘대는 참새들

 

나뭇잎은 날아다니는 것을

새들에게 배우려 했을지 모른다

 

완벽한 위장술로

부엉이가 되고 싶는 잎새들

부엉이가 되어 밤하늘을 날고 싶은 잎새들

날고 싶은 이파리라니

벌레가 숭숭하게 파먹은 가슴은 한 장의 나뭇잎

공포가 동반하는 것은 어둠이 아니라

이파리들처럼 자라는

희망이었는지 모른다

이파리가 자랄수록 함께 자라나는

뿌리였는지 모른다

 

새싹마다 눈이 동그란

아기부엉이들이 자꾸 태어나는 밤

잎맥이 여러 갈래로 찢어 놓은 가슴

한낮과 한밤을 휘젖는

바람의 토론을 듣는다

 

 


 

 

송연숙 시인 / 사람들은 해변에 와서 발자국을 버리고 간다

 

 

 도로가 끝나는 곳에 바다가 있다.

 항해를 끝낸 작은 배는 모래사장에 누웠고

 연인들은 어깨를 기댄 채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중이다

 목줄을 맨 강아지가 주인을 끌고 다니는 경포해변

 어둠을 긁으며 파도가 온다

 

 어둠이 길을 막을 때도 있었지만

 어둠이 길을 안내할 때도 있었다

 보여서 두려울 때도 있었지만

 보이지 않아 두려울 때도 있었던 것처럼

 

 흔들 그네를 타며 내려오는 어둠, 어둠이 바다와 서서히 한 몸이 되는 것을 지켜본다. 한 몸은 색깔이 같다. 색깔은 이념, 어둠과 바다는 이념이 같다. 속을 알 수도 없고, 목숨을 걸기도 한다. 꿈을 꾸기도 하고, 제 색에 맞게 모든 일을 해석하고 주입하기도 한다. 어둠이 바다와 하늘을 이어 놓는다. 으르렁대며 파도를 휘젓는 거인의 목소리가 하늘 끝까지 확장된다. 사람들은 작아지고 보이지 않는 어둠이 터널처럼 길다.

 

 모래사장 위의 빼곡한 발자국들

 사람들은 해변에 와서 발자국을 버리고 간다

 크기도 방향도 깊이도 각각

 그림자도 각각이다

 누군가의 발자국을 밟지 않으면

 한 발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산다는 것은

 누군가의 발자국을 밟으며 걷는 것이다

 

 수십 개의 달을 등으로 내 건 횟집에서 그림자가 찍힌

 저녁달을 먹어야겠다

 

 


 

 

송연숙 시인 / 학교의 봄

 

 

쏟아지는 말言을

혹은, 봄을 밀봉하는 시간

마스크를 쓰고

산수유가 피었다

까치발을 들고 쑥쑥 올라서는 봄

봄이 와도 아이들은 학교에 오지 못한다

바람 혼자 운동창의 공을 몰고 다닌다

 

뭉쳐야 산다는 옛말

흩어져서, 산다

흩어져서 나의 속마음에 귀를 대보고

흩어져서 너와의 거리를 가늠해 본다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흩어졌나

쉬는 종이 울려도

개나리처럼 조잘대며 쏟아지는 아이들이 없다

허리띠가 헐거워지도록 야위어 가는 봄

봄은 왔으나 봄이 아니라더니

 

학교의 봄은 아이들이다

 

-시집 <사람들은 해변에 와서 발자국을 버리고 간다>

 

 


 

 

송연숙 시인 / 아라홍련*, 고려에서 온 편지

 

 

창가에 서서 등불을 켰다 껐다 반복합니다. 어느 행성에서 누군가 이 별을 알아본다면 압축된 폐지처럼 눌린 시간의 핏줄에도 혈기가 돌 것입니다. 가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봅니다. 밖을 내다본다는 것은 눈동자가 서성인다는 뜻이지요.

 

씨앗 하나가 매일 매 시간 물었을, 지금은 어느 계절인가요? 700년이 지나도록 계절은 오지 않아서 나도 감감무소식입니다.

 

별을 빚어 아미타불에게 드립니다. “인간의 생을 잃지 않고 중국의 바른 집안에서 태어나되 남자의 몸을 얻게 해주소서.”** 우표도 주소도 없는 기도는 불꽃의 심지가 되어 떠돌이별처럼 밤하늘을 맴돕니다. 유리온실에서 바라보는 별은 타들어가는 심장처럼 팔딱입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현생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면 나는 차라리 진흙에서 뒹구는 바람이고 싶어요. 수드라처럼 진흙 바닥에 엎드린 나는 어금니에 씨앗을 꽉 물고 몇 개의 왕조를 건너갑니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한 여자의 말이 홀씨처럼 날아다닙니다. 터를 잡고 앉는 곳이 내 소유의 땅이라면 나는 어느 곳에 뿌리를 내려야 하나요. 태아처럼 웅크린 700년의 잠에도 물이 올라 오소소 온 몸에 가시가 돋아나는 여름입니다.

 

* 아라홍련: 2009년 함안산성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연씨가 피운 연꽃

** 1301년 고려시대 창녕군 부인 장씨가 쓴 발원문(發願文)

 

 


 

송연숙 시인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 강원대학교 및 同 대학원 졸업. 2016년 월간 《시와 표현》 신인상으로 등단. 2019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2019년 《국민일보》 신춘문예 밀알상 당선. 시집 『측백나무 울타리』 『사람들은 해변에 와서 발자국을 버리고 간다』. 현재 『시와 표현』 편집장, 한국시인협회 회원. 중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