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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경 시인 / 날마다 시 쓰듯
‘그저 순간에 보이는 것만을 믿지 마 차근차근 샅샅이 훑어내야 해 세밀한 관찰력이 중요해. 크고 작은 것들 다듬고 없애야 할 것들은 여기저기 널렸단다.’
PCB 칩에 묻은 납땜 얼룩 제거 방법이다.
언니들이 가르쳐준 방법대로 살면 나는 시의 달인이 될 것만 같다.
그때 이미 난 내가 내 눈에 보이는 것 외엔 무엇도 볼 수 없는 사람임을 알았다.
컨베이어가 신음을 뱉는다. 2교대 야간 12시간 환한 공장 등불 아래 내가 본 것은 칠흑이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어둠 속 장미 그 잎새 사이로 날아가고 싶었다.
프레스 기계 울음소리가 내 심장 문을 끽끽 열고 들어와 내면의 연못에 파문되던 날이다.
*PCB: 인쇄 배선 회로 기판.
구효경 시인 / 먼 곳의 옥상
후루룩 꽃잎이 새처럼 날아가는 팔월 줄넘기를 하다가 담 넘기를 하는 기분이 들어 이 줄을 다 넘으면 저 너머엔 장미가 피어있을까. 체한 날 손을 땄을 때 흘러나온 피처럼 검붉은 정원이. 눈앞에 없는 울타리를 눈앞에 옮겨놓지
먼 곳의 정원에는 먼 곳의 정원사가. 먼 곳의 세탁소에는 먼 곳의 세탁사가. 나는 지금 여기가 거기보다 더 멀게 느껴진다. 먼 곳의 사람에겐 지금 여기 내가 멀게 느껴질 테지. 그렇지만 오늘은 모든 사람이 가까운 날. 그렇지만 내일은 다시 모두가 멀어지지.
지하실에서 피어나는 곰팡이와 애기 장미. 내가 밟는 골목길 개똥벌레 같은 가로등 흙과 먼지가 날리는 그곳이 쌔근쌔근 갓난아기 안고 잠든 누구에게 가까운 곳의 옥상이자, 먼 곳의 옥상이었을 테지.
체한 날 손을 땄을 때, 그 손 어루만져 줄 사람 없다고 슬퍼 말라고, 사람은 양 손을 갖고 태어났구나 싶었지.
줄넘기를 넘다가 하늘넘기를 하는 기분이 들어 저 파란 도배지 깔아놓은 천장을 뛰어넘으면 나의 옥상은 지구 위에. 얼마나 넓을까. 내 발은 얼마나 좁았을까.
가난한 오늘을 넘어가며 저 너머엔 손끝에서 피는 검붉은 장미를 화분에 심어놓는 사람이 살고 있을 거라고 믿지
구효경 시인 / 코코에린을 위한 찬가
그녀의 희고 고운 얼굴은 마치 숫눈길 같아 별이 쉬어가려다 그 빛에 가려져 숨은 눈동자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기 위해 태어나 은신처와 안식처가 되어주지
일요일과 비슷한 분, 첫과 끝을 함께할 우리의 운명은 아침과 밤이 겹쳐질 때까지 영속하지
그녀의 눈물에서 사는 물고기 그곳을 떠나선 살 수 없어 우리는 마주 본 눈빛에 비친 서로의 모습을 닮아가지
꽃을 창조하는 *희소로 인해 지천에 태어난 장미들이 숭앙하는 그녀 *열 번째 뮤즈의 시로도 부족한 아름다움을 찬미하지 모든 길은 코코에린으로 통한다.
* 희소: 예쁘게 웃음, 기뻐서 웃음 * 열 번째 뮤즈: 플라톤이 호명한 고대 그리스 여자 시인 사포
구효경 시인 / 은빛 구두
달의 힘으로 끌어내는 페이지, 빛을 탄 소주와 맥주거품에 눈물이 묻을 때 달빛과 만유인력의 힘으로 우리는 과거를 밀어냈다. 만일, 그대가 끊이질 않는다면, 미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인데, 모래를 밟는 은빛 구두에 나뭇가지로 실로폰 소리를 낸다.
뒤바뀌어진 전개와 처음부터 그것이 아니었던 결말. 우리의 동화는 처참히 무너지고,,,, 슬픈 은반지와 구두의 중력은 우주를 배회하다가 되돌아갈 곳을 잊었는데 잃어버린 것은 그대가 끊고온 우표의 샴페인. 끊이질 않는 것은 미래의 소란, 과거가 과거에게 손을 내밀며 발걸음을 옮기자 할 때, 배신을 모르는 장미 가시들이 빛살 푸른 허공의 바람을 점점 뚫으며, 아우성치는데,,,, 왜 우리는 미래에도 없을 사유를 완성하는가 왜 우리는 현재의 틈입에서 전복을 내던지는가 내딛는 계단 마다 붉은 꽃들이 현현하고,,,, 서슬 퍼렇던 청춘과 시립게 찢긴 황혼에서 우리의 발은 그렇게도 아팠다. 유리 조각을 밟는 슬픈 여인의 맨발처럼, 층층 점점 또각또각 구푸러진 목소리로 울 때 밤들은 멈춰서서 찢긴 동화에서 은빛 구두를 발췌해오며, 탄식, 탄성, 탄식, 탄성,,,,, 헤맸다.
아름다운 것들은 왜, 자멸, 하는가. 그러나, 그 끝엔 소생이 있었다. 화려하고 찬란한 밤이었다. 태양이 뜬 밤, 울었다.
-웹진 『시인광장』 2025년 2월호 발표
구효경 시인 / 일기예보
언젠가 종적을 감춘 하늘이 깊은 땅굴에서 발견되던 날이다. 어지러운 이명 사이로 기상청의 특보가 요란하게 울려댄다. 긴급 속보입니다. 오늘은 땅에서 천국이 발굴되겠습니다. 전문가들은 지질학자들은 천문학자들은 미리 점지해놓은 갈비뼈를 붙여 하늘을 복원할 예정입니다. 아담의 유골을 먹은 바람이 되새김질로 토해놓은 원소를 측량하여 상실한 영혼을 파 올리겠습니다. 수억 광년을 돌아온 태양이 사상 초유로 떠오르겠습니다. 내일은 태초 이래, 최초로 땅에서 소나기가 내리겠습니다. 구름이 대지 위의 안개를 덮칠 테니, 모두 눈을 감고 걸으세요. 지하에서 천년을 잠들었다 눈을 뜬 신생아처럼 흐릿하고 모호한 경계, 그 선을 따라 내가 흘러들어간다. 생전 내가 살던 세계가 여기에 있잖아. 닫힌 몸 밖으로 뛰쳐나가지. 널 구출하러. 암담한 음부에 결박된 채로 죽었노라고, 외람된 전설 속에 머물던 이름을 건져낸다. 붉은 지층 너머 흙과 암석의 겨드랑이에서 탈환해온다. 푸른 혈색 띤 얼굴과 살갗에 밴 무늬를 쓰다듬는데 어덴가,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난다. 텅 빈 자궁에서 깨어난 하늘이 양수를 토하고 있다
구효경 시인 / 두 번째 유서
꽃씨를 뿌리며 흙길 밟는 줄 알았다. 아무리 발밑이 까슬까슬해도. 아무리 손 안이 무거워도. 알고 보니 풀 위에 돌 던지며 걷는 중이었다. 내 걸음은 꽃 한 송이 피워내지 못하리.
거칠게 살아온 파도들이 다 비눗방울이어라.
이야기를 담지 않고 버틸 수 있는 눈물샘이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내가 기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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