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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용태 시인 / 세상에서 가장 시시한 시
내게는 두 개의 눈이 있습니다. 한 눈은 다른 눈에게 외롭다고 말합니다 다른 눈도 다른 눈에게 외롭다고 말합니다. 나는 두 개의 외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쓰는 이 시는 두 눈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시는 기어가며 자꾸 눈치를 봅니다. 한 눈은 야 똑바로 걸어 합니다. 다른 눈은 됐어 그게 바닷게야 합니다. 나의 시는 항상 두 편입니다. 한 편은 기어가고 또 한 편은 씁니다. 씌어지지 않은 시와 씌어진 시 나의 시는 두 개의 외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는 시의 이전이며 시의 이후입니다. 시는 말이 없습니다. 시는 반 조각입니다. 파도는 반 조각입니다. 파도와 파도에 부서지는 햇살 두 눈이 맞닿는 수평선 나의 두 눈이 죽고 두 외로움이 죽고 햇살이 태어나는 수평선을 향하며 달려가는 나의 시는 맨발입니다.
민용태 시인 / 고려장 구름은 팔 수 없다. 삼천 예순 날을 비가 내려도 구멍 뚫린 우리 지붕에 구멍 뚫린 내 가슴에 내가 빠져 죽어도 우리는 종이 아니다. 우리는 종이다. 눈 감고 귀먹은 종이어도 좋은 종이다. 하얀 종이다. 두들겨 맞을 대로 두들겨 맞은 쇠붙이 하얗게 목쉰 얕은 한숨으로만 남은 종 그것은 차라리 천 년을 닳은 무릎 억 년을 다듬이질 당한 무명베 맞고 용서하고 맞고 용서하고 칼을 맞고 칼끝을 어루만지는 비루하리만큼 따스한 가슴팍 증오만큼 늘 따스한 가슴팍 나는 할머니를 묻어야 했다. 할머니를 묻고 어머니를 묻고 계집을 묻고 가슴속에 가슴을 묻고 핏 속에 피를 묻고 흙 속에 흙을 묻고
민용태 시인 / 나의 사랑은
사랑아, 난 어떡할까 그냥 갈까 기다릴까 기다리면 올까, 오면 가지 않을까. 왔다 가면 또 어떡할까.
된서리야 치든 말든 이파리야 떨어지든 말든 감나무 맨 꼭대기 까치 몫으로 남겨둔 홍시 하나.
-시집 <시간의 손>에서
민용태 시인 / 붕어 잡이
붕어는 몸을 옆으로 꼬며 햇살을 받는다, 물로 옆구리를 치며 반짝 그것이 붕어다, 햇살이거나 살 비늘이거나 지느라미. 그래서 붕어탕이나 붕어찜을 좋아하는 사람은 붕어를 잡지 못 한다. 손이나 입에 들어가는 것이 붕어가 아니다 붕어를 잡으려면 물에 붕어가 노는 것을 보고도 안 보는 것 같이 노는 척 멀리감치 물에 들어간다. 붕어가 놀다 이끼나 돌 밑에 들어가면 못 본 척 가만히 다가간다 이 가만히 조용히 생각 가는 대로 버려두는 것이 명상이다 돌처럼 말없이 돌이 되어 돌 밑에 손을 놓는다 손은 말이 없다 이때 붕어를 움켜쥐거나 잡으면 명상은 빠져나간다. 가만히 있으면 붕어가 스스로 손 안으로 들어온다 잡으면 또 빠져나간다, 가만히 있으면 조용히 종이 되어 목어가 되어 묵상에 든다 비늘이 햇살이
―『미네르바』 2017년 여름호
민용태 시인 / 천년 은행나무장수 비결
아무 하는 일 없다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맨땅에 서서 바람이 팔을 잡고 나대지만 금방 손사래 땅에서 물 끌어올려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건너편 여자 나무에게 윙크 저쪽은 좀처럼 미소를 보이지 않는다 밝은 달 맑은 바람 말이 차다 별똥별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별빛 뒤집어쓴다 은행나무 은행잎 들고 밤낮 소녀들과 화투 놀음 나날이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
민용태 시인 / 한 식구들
하늘이 까만 솥뚜껑 열기 전부터 짹짹짹짹 밥달라고 소리치는 건 참새다 시냇물 쫄쫄 입맛 다시고 느티나무는 멀찌감치 뒷짐 지고 헛기침한다
은하수에서 물 길러와 지은 햅쌉밥 햇살이 8할이다. 산들은 고봉으로 한두 그릇 차지하고 서 있고 파도는 손뼉을 치며 여기도 입 있다고 소리친다
샛별이 새초롬하게 하늘 가에 서 있다. 별아, 너도 그렇게 밖에 서 있지 말고 얼른 내려 와 바람아, 너도 설레방구 그만 떨고 여기 와 앉아 우린 다 하늘 아래 한솥밥 먹는 한 식구 아녀?
민용태 시인 / 너는
너는 무슨 하늘로 벼룬 가슴이기에 나를 이토록 가득 채우는가
너는 무슨 이슬로 빚은 술이기에 나를 이토록 취하게 하는가
너는 무슨 숨결로 짠 고요이기에 안으로 안으로만 파고드는가
너는 무슨 꽃잎으로 만든 떡이기에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가
너는 오는가 가는가
너는 무슨 꿈으로 온 나비이기에 붙잡아도 붙잡아도 날아갈 것 같은가 너는 햇살인가 눈물인가
너는 무슨 강물로 빚은 노래이기에 사랑도 눈물도 흘러흘러 넘치는가
너는 무슨 죽음으로 벼룬 육체이기에 나는 이토록 네 속에 침몰하고 싶은가
말끝이 흐려지고 모호한 표정의 당신
눈코 뜰 새 없이 무료한 날의 당신도 알다시피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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