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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민용태 시인 / 세상에서 가장 시시한 시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2.
민용태 시인 / 세상에서 가장 시시한 시

민용태 시인 / 세상에서 가장 시시한 시

 

 

내게는 두 개의 눈이 있습니다.

한 눈은 다른 눈에게 외롭다고 말합니다

다른 눈도 다른 눈에게 외롭다고 말합니다.

나는 두 개의 외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쓰는 이 시는 두 눈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시는 기어가며 자꾸 눈치를 봅니다.

한 눈은 야 똑바로 걸어 합니다.

다른 눈은 됐어 그게 바닷게야 합니다.

나의 시는 항상 두 편입니다.

한 편은 기어가고 또 한 편은 씁니다.

씌어지지 않은 시와 씌어진 시

나의 시는 두 개의 외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는 시의 이전이며 시의 이후입니다.

시는 말이 없습니다. 시는 반 조각입니다.

파도는 반 조각입니다.

파도와 파도에 부서지는 햇살

두 눈이 맞닿는 수평선

나의 두 눈이 죽고 두 외로움이 죽고

햇살이 태어나는 수평선을 향하며

달려가는 나의 시는 맨발입니다.

 


 

민용태 시인 / 고려장

구름은 팔 수 없다.

삼천 예순 날을 비가 내려도

구멍 뚫린 우리 지붕에

구멍 뚫린 내 가슴에

내가 빠져 죽어도

우리는 종이 아니다.

우리는 종이다. 눈 감고 귀먹은

종이어도 좋은 종이다.

하얀 종이다.

두들겨 맞을 대로 두들겨 맞은 쇠붙이 하얗게 목쉰

얕은 한숨으로만 남은 종

그것은 차라리 천 년을 닳은 무릎

억 년을 다듬이질 당한 무명베

맞고 용서하고 맞고 용서하고

칼을 맞고 칼끝을 어루만지는

비루하리만큼 따스한 가슴팍

증오만큼 늘 따스한 가슴팍

나는 할머니를 묻어야 했다.

할머니를 묻고 어머니를 묻고 계집을 묻고

가슴속에 가슴을 묻고 핏 속에 피를 묻고 흙 속에 흙을 묻고

 

 


 

 

민용태 시인 / 나의 사랑은

 

 

사랑아, 난 어떡할까

그냥 갈까 기다릴까

기다리면 올까, 오면 가지 않을까.

왔다 가면 또 어떡할까.

 

된서리야 치든 말든

이파리야 떨어지든 말든

감나무 맨 꼭대기

까치 몫으로 남겨둔

홍시 하나.

 

-시집 <시간의 손>에서

 

 


 

 

민용태 시인 / 붕어 잡이

 

 

붕어는 몸을 옆으로 꼬며

햇살을 받는다, 물로 옆구리를 치며 반짝

그것이 붕어다, 햇살이거나 살

비늘이거나 지느라미.

그래서 붕어탕이나 붕어찜을 좋아하는 사람은

붕어를 잡지 못 한다. 손이나 입에

들어가는 것이 붕어가 아니다

붕어를 잡으려면

물에 붕어가 노는 것을 보고도

안 보는 것 같이 노는 척

멀리감치 물에 들어간다.

붕어가 놀다 이끼나 돌 밑에 들어가면

못 본 척 가만히 다가간다

이 가만히 조용히

생각 가는 대로 버려두는 것이 명상이다

돌처럼 말없이 돌이 되어

돌 밑에 손을 놓는다 손은 말이 없다

이때 붕어를 움켜쥐거나 잡으면

명상은 빠져나간다.

가만히 있으면

붕어가 스스로 손 안으로 들어온다

잡으면 또 빠져나간다, 가만히 있으면

조용히 종이 되어

목어가 되어 묵상에 든다

비늘이 햇살이

 

―『미네르바』 2017년 여름호

 

 


 

 

민용태 시인 / 천년 은행나무장수 비결

 

 

아무 하는 일 없다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맨땅에 서서

바람이 팔을 잡고 나대지만

금방 손사래

땅에서 물 끌어올려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건너편 여자 나무에게 윙크

저쪽은 좀처럼 미소를 보이지 않는다

밝은 달 맑은 바람 말이 차다

별똥별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별빛 뒤집어쓴다

은행나무 은행잎 들고 밤낮 소녀들과 화투 놀음

나날이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

 

 


 

 

민용태 시인 / 한 식구들

 

 

하늘이 까만 솥뚜껑 열기 전부터

짹짹짹짹 밥달라고 소리치는 건 참새다

시냇물 쫄쫄 입맛 다시고

느티나무는 멀찌감치 뒷짐 지고 헛기침한다

 

은하수에서 물 길러와 지은 햅쌉밥

햇살이 8할이다. 산들은

고봉으로 한두 그릇 차지하고 서 있고

파도는 손뼉을 치며 여기도 입 있다고 소리친다

 

샛별이 새초롬하게 하늘 가에 서 있다.

별아, 너도 그렇게 밖에 서 있지 말고 얼른 내려 와

바람아, 너도 설레방구 그만 떨고 여기 와 앉아

우린 다 하늘 아래 한솥밥 먹는 한 식구 아녀?

 

 


 

 

민용태 시인 / 너는

 

 

너는 무슨 하늘로 벼룬 가슴이기에

나를 이토록 가득 채우는가

 

너는 무슨 이슬로 빚은 술이기에

나를 이토록 취하게 하는가

 

너는 무슨 숨결로 짠 고요이기에

안으로 안으로만 파고드는가

 

너는 무슨 꽃잎으로 만든 떡이기에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가

 

너는 오는가 가는가

 

너는 무슨 꿈으로 온 나비이기에

붙잡아도 붙잡아도 날아갈 것 같은가

너는 햇살인가 눈물인가

 

너는 무슨 강물로 빚은 노래이기에

사랑도 눈물도 흘러흘러 넘치는가

 

너는 무슨 죽음으로 벼룬 육체이기에

나는 이토록 네 속에 침몰하고 싶은가

 

말끝이 흐려지고 모호한 표정의 당신

 

눈코 뜰 새 없이 무료한 날의 당신도

알다시피 무료다

 

 


 

민용태(閔鏞泰) 시인

1943년 전남 화순 출생. 한국외국어대 서반아어과 졸업. 1972년 스페인 마드리드대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1968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 1979년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1987년 고려대 스페인어과 교수.  한국서어서문학회 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회장 등을 역임. 1970년 스페인 마차도문학상, 2000년 제7회 충헌문화예술상 문학특별공로상, 2002년 문학아카데미 제정 한국시문학상, 2015년 익재문학상, 2016년 유럽국제한림원 미하이 에미네스쿠가 주는 세계시인상 수상. 2009년 스페인 한림원 종신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