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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정록 시인 / 모서리의 힘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2.
이정록 시인 / 모서리의 힘

이정록 시인 / 모서리의 힘

 

 

내장탕 전문인 청일식당

빈대 콧구멍만한 화장실엔

대각선으로 변기가 놓여 있다

일 보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모서리를 바라봐야 한다

똥처럼 마모된 모서리를 반성해야 한다

겉은 둥글둥글 따스해야 하지만

속으론 모서리의 힘을 갖고 있어야지

탈취제 빈 그물에 갇혀 있는 상표를 보며

자신의 이름을 반성해야 한다

네 귀퉁이 모서리마다 낡은 거미줄이 있고

입적을 마친 빈 방들이 매달려 있다

청양 버스터미널 옆 청일식당에 가면

대각선의 중심에 앉을 수가 있다

그래, 모서리는 힘이지

모서리가 있어야 똥심이 있지

독을 들이마시며 자신을 지워가는

순백의 탈취제, 그 낡은 이름표를 바라보며

중심을 찍고 나온다

버스를 한 대쯤 놓쳐 버리면 어떤가

칠갑산 그늘에 오래 숙성된

좋은 술이 팔짱을 끼리니

건배 대신 구기자를 외치며

칠갑산 계곡처럼 깊어지면 어떤가

 


 

이정록 시인 / 강

 

 

양수를 여섯 번이나 담았던

당신의 아랫배는

생명의 곳간, 옆으로 누우면

내가 제일 고생 많았다며

방바닥에 너부러진다

긴장을 놓아버린 아름다운 아랫배

누가 숨소리 싱싱한 저 방앗간을

똥배라 비웃을 수 있는가

허벅지와 아랫배의 터진 살은

마른 들녘을 적셔 나가는 은빛 강

깊고 아늑한 중심으로 도도히 흘러드는

눈부신 강줄기에 딸려들고파

나 문득 취수장의 물처럼 소용돌이친다

뒤룩뒤룩한 내 뱃살을

인품인 양 어루만지는 생명의 무진장이여

방바닥도 당신의 아랫배에 볼 비비며

쩔쩔 끓는다

 

 


 

 

이정록 시인 / 고치 속에서 북을 치다

 

 

 날개를 달기 전에 목숨을 놓는 번데기가 있다. 고치 속, 둘도 없는 단칸방을 둥글거리며. 이게 다야. 주름을 당겨 짱짱한 시톨이 되는 번데기가 있다. 달가닥 달가닥. 그의 고집만이 제 집을 커다란 악기로 만들 수 있다

 

 안에서 두드리는 적설의 지붕. 날개를 달기 전에 숨을 놓는 것은 . 출구를 버리겠다는 것이다. 뚫고 나가는 곳 어딘들 문이 아니랴만. 이게 끝이야. 스스로 환약이 되는 번데기의 마지막 생각이. 소리의 보온통을 만든다

 

 


 

 

이정록 시인 / 꽃물고치

 

 

아파트 1층으로 이사와서

생애 처음으로 화단하나 만들었는데

간밤에 봉숭아 이파리와 꽃을 죄다 훑어갔다

이건 벌레나 새가 뜯어먹은 게 아니다

인간이다 분명 꽃피고 물오르기 기다린 여자다

못생긴 노처녀가 욕심을 부린 것이다

부러진 우산대를 치켜들고

지나는 여자들의 손을 훔쳐보는데

할머니 한 분 반갑게 인사한다

총각 덕분에 삼십 년만에 꽃물 들였네

양손을 흔들어 보인다 손끝마다 눈부신 고치들

나도 따라 환하게 웃으며 막 부화한

팔순의 나비에게 수컷으로 다가가는데

손가락 끝부터 수의를 짜기 시작한 백발이

봉숭아 꽃 으깨어 목축이고 있다

아직은 풀어지지도 더 짜지도 마라

광목 실이 매듭으로 묶여있다

 

-(문학사상 2003. 9)

 

 


 

 

이정록 시인 / 물끄러미에 대하여

 

 

모내기를 마친 논두렁에

왜가리가 서 있다, 이가 빠진

무논의 잇몸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다

마꾸라지나 개구리를 잡으려다

어린 벼 포기를 짓밟은 것이다

진창에 처박힌 벼 이파리의 안간힘 때문에

봄 논의 물살이 몸살을 앓는다

물은 저 떨림으로 하늘을 품는다

하늘을 따라 키 큰 미루나무가 문안간다

쇠뜨기도 척추 한 마디를 뽑아 수액을 건넨다

물벼룩과 개구리와 어린 모가

가 닿아야 할 아뜩한 밥의 나라, 세상에

써레질을 마친 논만큼 깊은 것이 있으랴

식도를 접고 벌받듯 서 있는 외밭에게

많이 저리냐? 두렁 쪽으로 물결이 일렁인다

어린 순 부러지는 줄 모르고 뛰어다니는

발길 사나운 것이 삶이라서

늘 포만 다음에라야 깨우치는 나여

물끄러미, 개구리밥을 헤치고

마음속 진창을 들여다본다

눈물 몇 모금의 웅덩이에 흙탕물이 인다

언제 눈물샘의 물꼬를 열고

깊푸른 하늘을 들일 수 있을까

정처만이 흙에 뿌리를 박는 것,

마음의 바닥에 물끄러미라고 쓴다

내 그늘은 얼마나 오래도록

물끄러미와 넌지시를 기다려왔는가?

물꼬소리 도란거리는 마음과

찬물 한 그릇의 눈을 가질 때까지

나는 왜가리의 발톱이거나

꺾인 벼 이파리로 살아가겠지만, 끝내

무논의 물결처럼 세상의 떨림을 읽어내기를

넌지시와 물끄러미 사이에서

써레처럼 발목이 젖어 있기를

 

-현대시 2004년 9월호

 

 


 

 

이정록 시인 / 손톱 뿌리까지

 

 

글 쓰는 사람이

웬일로 손톱을 깎는댜?

어미가 한창 농사일할 때는

땅뙈기에 다 닳아버려서

손톱깎이 한번 쓴 적 없어야,

글 쓰는 사람은 머리가 농토니께

긁적긁적 북북 골몰하다보면

어디 깎을 손톱이 남겠냔 말이여.

쓰는 둥 마는 둥 끼적거리려면

초장에 냅다 집어치우는 게 나아.

작물이든 작문이든 손톱 뿌리까지

다 닳아빠지는 일이여.

 

 


 

 

이정록 시인 / 뿌리주의자

 

 

 사막 모래를 쥐고 있는 풀뿌리 같다. 그 이미지의 실뿌리를 들어 올리면 그늘로 만든 설산이 나타난다. 뿌리 끝에 매달린 창문에 불이 켜진다. 커튼에 수놓은 낯선 무늬가 애써 의미를 짓지 않는다. 접힌 문양 한 귀퉁이를 당기면 세상 어딘가에서 울음이 새어 나온다. 관계를 놓치지 않는 존재들, 존재 안에 응축된 눅눅한 문장들이 주문을 왼다. 마을버스 낡은 스피커에 들어가 보지 못한 뉴스가 있나? 지렁이 입에 들어가 보지 못한 흙이 있나? 물고기 창자를 통과해보지 못한 바닷물이 있나? 네 발 짐승의 허파를 훑어 보지 못한 바람이 있나? 구멍 숭숭한 뼈 피리를 불어보지 못한 한숨이 있나? 그리하여 김수우 시는 폐허를 어루만지는 가슴 우리에게 징글징글한 희망 한 단을 내려놓는다. 닳고 닳으며 굴러온 살덩이에게 풀풀 살아나는 마른미역을 선물한다. 살아 부풀어 오르는 적막을. 끝끝내 향을 피우는 꽉 찬 공허를.

 

 


 

 

이정록 시인 / 시의 쓸모

 

 

모 시인의 승용차가

폐차 직전이란 걸 눈치챈 자동차외판원은

시인의 대표작과 신작시를 달달 외웠다.

시인이 오래된 만년필로 연거푸 사인했다.

하나는 신작시집이었고 다른 하나는 구매계약서였다.

자신의 시에 처음으로 제값을 치른 쾌거였으므로 승차감 또한 흐뭇하였다.

나 또한 시의 노복, 내 단골집 아씨는 별명이 줄똥말똥이었다.

가난한 시인의 전통을 내세워 안주 없이 맥주만 홀짝였다.

두어 달이 지난 어느 날, 옥편 값이 더 비싸데요!

한자 어석거리는 나의 시 「풋사과의 주름살을 줄줄 외웠다.

무릎을 꿇은 채, 메뉴판의 구부 능선을 제 유방으로 덮고는 가장 비싼 메뉴에 초고추장 같은 손가락을 찍었다. 왼손으로는 브래지어 끈을 살짝 올렸다가 눈사람 목주름만큼만 끌어 내렸다.

딱 여기까지라는 듯 가슴 둔덕에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다른 안주를 살피려면, 그녀의 젖가슴을 들어 올리는 수고로움이 뒤따름으로

나는 물레방앗간 옆 산뽕나무처럼 오디 눈동자만 깜작였다.

오빠 그거! 한번 매상을 올린 그녀는 번번이 과일안주를 대동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교양미 넘치는 시낭송가였다.

자동차외판원의 애인이란 소문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딘가에서 손익계산서를 두드리며 시를 외우는 애인들아. 아직도 나는, 주춧돌 메고 나가 기둥서방이라도 되고 싶다. 끝내 시의 용도폐기까지는 따져 묻지 못했지만

시 한 편이 최소한 과일안주 값은 되기를!

이 몸이 죽고 죽어 메뉴판이 되리라! 나에게도

뻥뻥 축포가 터지던 시의 역사가 있었다.

 

 


 

이정록 시인

1964년, 충남 홍성군 출생. 공주사범대학 한문교육과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수료.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혈거시대' 당선 데뷔. 시집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풋사과의 주름살> <동심언어사전> <시인의 서랍>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제비꽃 여인숙>. 천안청수고등학교 교사. 윤동주문학대상. 2017.7 제5회 박재삼문학상. 2002 제13회 김달진 문학상 시부문. 2001 제20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만해문예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