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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형기 시인 / 실솔가(蟋蟀歌)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2.
이형기 시인 / 실솔가(??歌)

이형기 시인 / 실솔가(蟋蟀歌)

 

 

시름은 도른도른

물같이 흐르는

가을밤 귀뚜리.

 

초가지붕에

뚫어진 영창에

 

조용히 잠든 눈시울 위에.

 

옛날 옛날 먼 이야기

 

몇 구비 돌아간 연륜(年輪)의 자욱.

 

달은 밝았다,

나는 울고 싶었다,

 

모두가 그날 같은

가을밤

귀뚜리 ······

 

그렇게 가지런한

그림 한 폭.

 

-「이형기 시전집」(한국문연, 2018년) 중에서.

 


 

이형기 시인 / 다시 사해

 

 

그 바다는 마르고 싶어한다

물기를 모조리 날리고 싶어한다

그래서 해마다 20센티씩

水量이 줄고 있는 그 바다의 자의(自意)의 증발

요단강의 민물이 주야로 흘러들어

달래보지만 소용이 없다

그것은 그 바다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사는

한 마리 괴물의 소행이다

그 바다가 완전히 마르는 그날이

지구 최후의 날임을 놈은 잘 알고 있다

그날 말라버린 지구의 유적 위에

거대한 소금기둥 하나를 세우려고

놈은 그런다

그래서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터무니없는 꿈

터무니없으니까 그것은 진짜다

진짜 꿈이다

 

 


 

 

이형기 시인 / 절벽

 

 

아무도 가까이 오지 말라

높게

날카롭게

완강하게 버텨서 있는 것

 

아스라한 그 정수리에선

몸을 던질밖에 다른 길이 없는

냉혹함으로

거기 그렇게 고립해 있고나

아아 절벽!!

 

 


 

 

이형기 시인 / 나팔 소리 울리는 마을

 

 

나의 귓바퀴 뒤에는 마을이 하나 있다

성냥곽에 담아도 될 만한 작은 마을이다

추수가 끝난 지 오랜

사람없는 들판 논두렁길에

고장난 경문기 한 대 버려져 있다

그것은 지난 겨울 개미집을 찾아온

늙은 베짱이처럼 처량하다

갑자기 나의 손가락 끝에서

솟아나는 불꽃

한 시대 전의 소방차가 달려와서

물을 뿜는다 누가 우는가

그래도 아무것도 젖지 않고 뽀송뽀송

건조한 마을의 저녁노을이여

나의 고막 속에 가득 울려퍼지는

날카로운 나팔소리를 들어라

 

 


 

 

이형기 시인 / 모비 딕(Moby Dick)

 

 

영화는 끝났다

예정대로 조연들은 먼저 죽고

에이허브 선장은 마지막에 죽었지만

유일한 생존자

이스마엘도 이제는 간 곳이 없다

 

남은 것은 다만

불이 켜져 그것만 커다랗게 드러난

아무것도 비쳐주지 않는 스크린

희멀건 공백

 

그러고 보니 모비 딕 제 놈도

한 마리 새우로

그 속에 후루룩 빨려가고 말았다

 

진짜 모비딕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이렇게

만사를 허옇게 다 지워버리는

그리하여 공백으로 완성시키는

끔찍한 제 정체를 드러낸다

 

- 시집 《절벽》(1998) 수록

 

 


 

 

이형기 시인 / 돌의 환타지아

 

 

여기 돌 하나 있다

그냥 그렇게

그것은 가장 견고한 감옥이다

갇혀 있는 수인은 바로 돌 자신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탈옥의 꿈으로

불타고 있는 돌,

그 불길 식히려고

때로는 진종일 비를 불러 오는 돌

돌의 내부는 심장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푸르다 원시의 달밤처럼

또는 이미 죽어버린 미래의 추억처럼

그리하여 스스로 증식하는 돌

사막의 물고기와 에스키모의 눈보라를 낳고

하루살이의 영원과 별똥별의 추락과 바다를 낳는다

돌도끼로 찍어낸 생나무의 절규와 절규를 감싸안고 있는 침묵이

우주공간으로 발사하는 전파

희망과 절망이 맞물려 돌아가는 바람의 소용돌이를 낳는다

그리고 이튿날은 세상을 다시

견고한 감옥으로 되돌려 놓는 돌

그것이 여기 있다

응고된 광활한 자유가 있다

그냥 그렇게

 

 


 

 

이형기 시인 / 밤비

 

 

창밖에서

꼭 누가

나직이 부르는 소리와 같다.

 

밤비는

멀리 떠나간 동무를 생각하며

나 혼자

돌아눕는 비.

 

등불을 끄면

등불을 끌수록 밝아 온다

먼 곳이 환히 보여진다.

 

속으로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내 가슴에도 비 오는 소리

밤내

누구를 부르듯 비 오는 소리.

 

 


 

 

이형기 시인 / 돌베개의 시 1

 

 

밤엔 나무도 잠이 든다.

잠든 나무의 고른 숨결소리

자거라 자거라 하고 자장가를 부른다.

 

가슴에 흐르는 한 줄기 실개천

그 낭랑한 물소리 따라 띄워보낸 종이배

누구의 손길인가, 내 이마를 짚어주는.

 

누구의 말씀인가

자거라 자거라 나를 잠재우는.

 

뉘우침이여.

돌베개를 베고 누운 뉘우침이여.

 

 


 

이형기(李炯基) 시인 (1933~2005)

1933년 경남 사천 출생.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1949년 《문예》誌에 서정주의 추천으로 등단. 시집 『적막강산(1963)』 『돌베개의 시』 『풍선 심장』 『보물섬의 지도』 『심야의 일기예보』 등. 시선집 『그해 겨울의 눈』 『오늘의 내 몫은 우수 한 짐』. 평론집 『감성의 논리』 『시와 언어』 등. 한국문학가협회상, 문교부문예상, 한국문학작가상, 부산시문화상, ·윤동주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