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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영택 시인 / 바다 냄새 나는 길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2.
서영택 시인 / 침묵에 대하여

서영택 시인 / 침묵에 대하여

 

 

 언젠가 침묵을 지갑에 넣고 다니다

 

 내게 있던 모든 침묵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침묵은 바람을 닮아 만질 수 없지만 볼 수 있어 좋다

 

 아지랑이 시끄럽게 피는 봄날

 

 나는 침묵에 잠겨 추억을 꺼낸다

 

 어여쁜 여인이 미소를 보내면 가벼운 침묵을 삼키기도 하고 화장실에서 신문을 보며 짧은 침묵을 읽기도 한다 해가 지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 누군가 나에게 잘난 척할 때 나는 열심히 침묵을 부른다 하지만 내가 주산을 놓고 정답이 아닐 때는 짜증과 함께 침묵을 마구 던지기도 한다 그림자가 서서히 야위어가고 오늘 하루 무엇을 했는지 모를 때 어두운 침묵은 묵묵히 나를 따라온다 이룬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 들 때 세월 속 길고 긴 침묵은 시가 되어 날아가고

 

 한 생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될 때

 

 침묵은 세상을 온통 푸르게 물들인다

 

 


 

 

서영택 시인 / 바다 냄새 나는 길

 

 

비린내 나는 엄마의 생선가게는

갓 잡은 푸른 섬이다

 

바다 냄새 앉은 엄마의 손은

한 개의 큰 섬이다

별이 내리는 엄마의 생선가게에

꿈이 새록새록 피어나고

 

날마다 물질하고 돌아오는 길들이

잠든 파도에 실려

완행버스를 타고 들어왔다

 


 

서영택 시인 / 고양이가 나를 따라온다

 

 

 퇴근길에 만난

 어린 길고양이 한 마리

 남루한 저녁 불빛을 걸친 마른 몸매

 검은 바탕에 흰 벨트를 한

 막막함이 드리운 표정

 무엇을 찾아 헤매고 있는가

 

 난 아웅 하면서 쇼핑백을 만지며 부스럭 소리를 냈다 고양이는 나를 따라온다 한 끼의 식사를 기대했을까 처음에는 속이는 맛에 재미가 있었지만 바로 후회했다 쇼핑백에는 고양이가 좋아하는 먹을 것이 없었다 쓸쓸한 배고픔을 이용한 나는 미안하기도 하고 해서 뒤돌아보지도 않고 집으로 빨리 왔다 마음이 아파 밥을 가지고 그 장소로 갔지만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어린애도 아니고 어른이 이런 식으로 속이다니 하면서 화가 났을 것이다 밤하늘에 쪼그리고 앉은 별들이 나를 탓하는 듯하다 그 후 나는 그 고양이를 만나기를 기대하면서 빵 한 개를 한동안 가지고 다녔다

 

 언젠가 나도 무언가에 이끌려 따라간 적이 있다

 나를 이끈 것은 소리였을까 무엇이었을까

 화려한 불빛을 보고 무작정 뛰어들던 때도 있었다

 헛된 욕망의 발자국이 나를 따라왔다

 

 진실은 언제나 눈이 멀고

 나는 눈먼 어둠의 골목으로 사라진다

-계간 『시인하우스』 2024년 창간호 발표

 

 


 

 

서영택 시인 / 꽃잎의 시간

 

 

너는 없다

눈 마주치던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꽃잎이 바닥에 내려와 있다

전기선을 보호하느라

잘라버린 벚꽃

벤치도 꽃을 피우나 보다

오지 않는 님을 기다리듯

누워있는 꽃잎

허공을 밀거나 밀리면서

강물이 밀려가듯 꽃잎의 시간이 쌓인다

누구나 전성시대는 있는 법

어떤 시간은 깨끗해지고

어떤 기억은 아직 꽃잎에 머물고 있다

꽃은 꽃이란 이름에서 떨어지고

새잎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피는 꽃과 지는 꽃이 돌고 돈다

누군가 떨어진 꽃잎을 쓸고 있다

 

-『상징학연구소』 2023년 가을호 발표

 

 


 

 

서영택 시인 / 모래카르텔

 

 

바다는 모래를 삼키며 살아간다

모래 무늬가 파도의 양식이고 호흡이다

 

내 눈과 마음을 가득 채우는 모래들

흘러내리고 미끄러지며 서로 서로를 바라본다

 

얼마나 더 버티면 바다를 건널 수 있을까

경계를 지우는 바람이 몰려온다

 

모래가 지도를 넓히고 좁힌다

싱가포르는 세계 1위의 모래 수입국이다

국토의 30%는 매립으로 늘어난 것이다

주로 인도네시아에서 수입하였는데 불법 채취로

인도네시아에서는 24개의 섬이 사라졌다고 한다

 

나는 흩어지려는 모래의 심정을 이해한다

해변엔 머물지 못하는 발자국이 가득하다

 

태양은 더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고

하루만큼 나의 모래를 빼앗아가는 자 누구인가

 

-계간 『동행』 2024년 겨울호 발표

 

 


 

 

서영택 시인 / 모래 계급설

 

 

 사막은 모래 무덤

 세상을 헤매다 이제야 쉬는 곳

 

 세상 지나온 둥근 모양의 시간들

 닳고 닳아 사라진 몸을 찾아 헤맨다

 

 모래도 계급이 있다

 자기들끼리 부딪쳐 마모된 구슬모양 모래는 쓸모가 없다

 각이 있어야 서로 접착이 잘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건축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병사모래다 도시화가 되면서 연간 500억 톤의 모래가 필요하다고 한다 인도와 아프리카 중국 등에서 앞으로 엄청나게 수요가 일어날 것이다 장교급에 해당하는 모래는 유리 태양광 판넬 등에 사용된다 장군급 모래는 LCD 반도체 실리콘 렌즈 화장품 등에 사용된다 공급보다 수요가 2배 이상이 많아서 모래 부족 현상이 심각하다

 산에서 강으로 바다로 이어지는

 구르고 굴러 완성되는 알맹이

 

 바위에서 모래가 될 때까지

 지천으로 깔린 고비를 넘고 넘는다

 

 나는 지금 어느 계급의 모래로

 삶의 비탈진 능선을 굴러가고 있는가

 

-계간 『문학과 사람』 2024년 가을호 발표

 

 


 

 

서영택 시인 / 벌초

 

 

바람이 풀을 베기 시작한다

걱정 많은 풀들의 걱정을 잘라낸다

술 한잔 부어놓고 큰절 두 번 하고

봉분에 눌러앉은 불효의 마음을 걷어낸다

말복이 지나면 풀은 더 자라지 않는다

추석 때 몰려오는 발걸음을 위해

풀 뒤에 숨어 보이지 않던 시간을 찾는다

고향 떠난 마음은 어린아이 모습 그대로다

뒤척이는 그리움을 잡아

저녁노을에 앉히고 풀을 벤다

타향을 이해하려는 몸짓이다

양지보다 그늘진 쪽이 더 잘 자라는 풀

수분 증발이 적기 때문이다

생각이 자라 무덤을 뒤덮으면 가을이 깊어진다

고요하던 풀밭에 풀벌레 소리는 늘 배가 고프고

달빛과 꽃은 그대로인데 사람들만 변해간다

말끔하게 마음이 보이고 봉분이 환해지면

내 삶과 조상에 대한 면목이 선다

큰절 두 번 하면 끝이다

 

계간 『두레문학」 2023년 가을호 발표

 

 


 

 

서영택 시인 / 별이라 부르는 것들

 

 

밤하늘에서 별을 캐던 때가 있었다

서로 자기 것이라고 이름 붙이며

주머니 가득 별을 담고

별을 입에 물고 내려오던 언덕이 있었다

별이라 부르는 것들

밤하늘에서 별을 캐던 때가 있었다

서로 자기 것이라고 이름 붙이며

주머니 가득 별을 담고

별을 입에 물고 내려오던 언덕이 있었다

도시의 불빛 속으로 사라진 별들

같은 하늘인데 서울에서는 잘 맛볼 수 없다

어두워진 세상 예전의 별맛을 다시 보고 싶다

별 중에 너무나 선명하고 밝게 빛나는 것이 있다

저 별의 주인이 누구일까?

나도 누군가의 별이 되고픈 시절

그 순간들이 마음을 찌르기도 하고 뜨겁게도 한다

별맛도 나지 않는 삶의 굴레 속에서

다시 언덕에 올라 달빛 사다리를 타고

친구들의 웃음소리를 디딤돌 삼아 별을 캐고 싶다

입안 가득 별맛을 보고 메마른 가슴에도 심고

무딘 시간의 발걸음도 반짝이고 싶다

어느새 별을 생각하는 나의 뒷모습을

별이 환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계간 『시와 함께』 2023년 봄호 발표

 

 


 

 

서영택 시인 / 백년손님이 끌고 온 길

 

 

 서울 이야기로 길이 열리자

 달빛이 모여들었고

 어느새 집 안은

 일가친척이 가져온 길로 가득해졌다

 매형이 끌고 온 길이 제일 넓고 길었다

 김서방이 왔다고 떠들던 별들도 잠이 들고

 어둠도 숨죽이며 뒤꿈치를 들고 다녔다

 하룻밤 지나 매형이 떠난다

 모든 길은 갑자기 꿈처럼 사라지고

 집안은 절간처럼 고요해졌다

 길 끝에 풀을 베어 짐을 지고 마당에 들어오는 어린 내가 보인다 땀범벅이 되어 들어온 나를 보고 집에 일꾼이 있는데 어린애에게 저런 일을 왜 시키느냐고 하는 사람이 옆에 서 있다 그때 충고를 귀담아들었다면 내 인생은 지금과 달라졌을까?

 또 다른 길에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서울 누님 집으로 어머니와 간 내 얼굴이 보인다 남산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대한극장에서 의미도 모르는 만화영화를 보았다 나는 버스를 몇 번밖에 타보지 않아서 그날 죽을 힘을 다하여 참으려고 했지만 결국멀미를 했다 나를 찾아 불러준 그 마음이 지금도 사라진 길 위에 선명히 보이는 듯하다

 

계간 『시와 편견」 2023년 가을호 발표

 

 


 

서영택 시인

1957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 2011년《시산맥》으로 등단. 시집 『현동381번지』 『돌 속의 울음』. 2020년 문학 나눔 도서선정. 조지훈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