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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제하 시인 / 외로운 황혼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3.
이제하 시인 / 외로운 황혼

이제하 시인 / 외로운 황혼

 

 

닿을 수 없는 거리는 그리움을 낳고,

메울 수 없는 거리는 외로움을 낳는다.

 

바라는 보아도 품을 수 없는 것들은 사무침으로 다가

온다.  

가까이 있다가 멀어지면 그 거리만큼 눈물이 흐른다.

 

 


 

 

이제하 시인 / 나무

 

 

어릴 때는 저 나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다.

그 이파리들이 던지는 풍성한 그늘이

마치 당연한 허구인 듯이,

마시고 그냥 노래했을 뿐이다.

 

서른 살에 저 나무는 반쯤 편 우산 같은 무리를 쓰고,

하늘 한켠에 외로운 모습으로 직립해 있었다.

돈을 생각하고 걷는 갈짓자의 어지러운 발걸음 저편에

그것은 아득하고 나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그저 그런 형상처럼만 보였다.

 

내리막길이 보이는 고갯마루에 서서, 이제서야 문득 깨닫는다

나의 근원은 대체 어디에 연(聯)해 있는가.

진심으로 내가 소원하는 것은 숲의 무성함이거나 헌란한

그 색체가 아니라

깊고도 질긴 그 뿌리였다.

길은 어둡고 일은 태산처럼 쌓여 있다.

가장 확실한 모습으로 떨고 선 저 한 그루 나무

 

-시집 <빈 들판> [나무생각]에서

 

 


 

 

이제하 시인 / 어느 나무 아래서

 

 

무엇으로 너의 쓸쓸함을 채워주랴

아득한 광야를 너는 꿈꾸고 있으나

흐르는 물 우리 앞에 지금도 죽지 않고

그 소리 아직 멀리멀리 이르지 않았나니

이승에서 잠시 앉는 이 나무 그늘에

우리가 무엇을 더 달라고 하랴

어두운 구름 떼 주공(宙空)에서 푸르게 푸르게 쓰러지고

하나 남았던 길이 작은 바람에 지워지네

무엇으로 너의 쓸쓸함을 채워주랴

머나먼 바다를 너는 꿈꾸고 있으나

남은 모닥불 우리 앞에 지금도 죽지 않고

저 빛 아직 멀리멀리 이르지 않았나니

이승에서 잠시 앉는 이 나무 그늘에

우리가 무엇을 더 달라고 하랴

어두운 구름 떼 주공(宙空)에서 푸르게 푸르게 쓰러지고

하나 남았던 길이 작은 바람에 지워지네

 

 


 

 

이제하 시인 / 밤길

 

 

한밤 거칠 것 없는 들녘에서 눈을 뜨노니

동에서 서으로 강은 흐르고

흘러간 하늘은

뒷곁으로 뒷곁으로 돌아와 닿고

내 믿는 것은 오직 이것뿐

눈으로 들어오면 눈물이 되는.....

너는 저 어둠속 등(燈)빛들을 느끼듯이

모든 것을 오래오래 보아 두어라

눈으로 들어오면 눈물이 되는

바람은 소리소리쳐

샘처럼 서늘한 눈물 어린다 눈물 어린다

 

 


 

 

이제하 시인 / 끊임없이 부대끼며

 

 

생각의 갈피들이 버스 속에서 부대끼며

즐긴다 창밖에서 자전거 탄 네 명의 아이들이

한꺼번에 넘어졌다 넘어지며 자빠지며

미끄러지며 살자 끊임없이 부대끼며

가끔은 흔들리며 그 흔들림 속에서

보리밭 사이를 간다 멀리 산과 산 사이로

굽어 사라져 버린 길 속으로 돌아 들어가

나는 없다 온통 갈아엎어 놓은 땅

빈 논에는 토박이 새 한 마리 보이지 않고

보리 싹들이 몸 부대끼며 살아가는

보리논은 그래도 따스했다 속 깊이 파헤친 세상

그 속에서도 몸 비벼대며 살아갈 이웃이 있으면

가슴 따뜻하다 우리

겨울새들도 겨울 속에 갇혀

공동묘지의 비석 없는 무덤들도 함께

오래도록 기억된다 우리들은 아름답게

오랜 기억이고 싶다 그리고 꿈결 같은 바다

바다가 있는 풍경 그 속에서 바다는

집착을 버리는 몸짓으로

내가 있는 시간 속으로 끊임없이 다가와 닿고

 

 


 

 

이제하 시인 / 은박지의 아이들

 

 

1

아이들은 잔인하다

마음에 한 점 티끌도 없이

잠든 수탉의 목을 비틀고

수런대는 피수풀의

그 줄기를 타고, 구름 위에

방뇨하는 즐거움을 뿌린다

 

하지만 이것은 한결같은

늙은이들의 소원

살아남아 오히려 목이 마른 이여

누가 저 아이들을 달래랴

무명의 추억 속에 오직

희희낙락 떠도는

 

누가 저 아이들을 물러오랴

산 방게와

가재와

물고기 외에는

 

2

아이들이 넘어진다, 두 팔을

귀처럼 꺾어 세우고, 무작정

달려와서, 무작정

넘어진다, 넘어진다

 

제 발로 일어나는 자존심도 모르고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우는

바보 먹통

 

사물의 중심이

직립하는 뼈 속에 있지 않고

설설 기는 곡선의

그 발뒤꿈치에 있음을 알면서도

불현 듯 불을 켜고

한밤중에 몸을 일으키는

먹통들의

전쟁

그 아비규환의,

기억의,

폭소의,

바닥에,

쐐기처럼 박힌

아이들의 고리

 

저절로 올라가는

사닥다리

마른 호도와

풋풋한

자지의

콘트라스

 

움친 청개구리와,

훔친 복숭아의

그 이중의 도약

 

3

먹의 큰 산봉우리 뒤에서

돌연

먹의 큰 손이 튀어나와도

 

아이들은 놀라지 않는다

그 내용이 미소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성내지 않는다

그 눈이 먼지로 가득하지 않고

이태백의 달처럼 비어 있기 때문에

 

한 어시장의 왁자지껄함이 끝나고

비둘기와 아낙들이 돌아갈 즈음

어디선가 옆걸음을 쳐온 일군의

작은 발들이 둥글게

무리를 짜고

그대와 나의

끊어진 고리를 잇는다

 

4

한 아이가 물구나무를 선 채

밤의 중심에

낚시를 드리운다

다른 아이는 모로 누워서

아침처럼

웃고 있으나

누구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풀은 늙은 소나 먹는 것이다)

한 어둠이 가고

다시 다른 어둠이 겹쳐도

자리를 옮길 따름이다

땅과 하늘,

두 평생선상의

영원한 이동

 

세 번째 아이가 어디선가 나타나

발가벗은 몸으로

바다를 없앤다

 

5

달리는 아이들의 다리는

갈기와도 같다

 

털은 풀을 부르고

풀은 다시

물을 부른다

물의 아버지, 불의 사타구니

지상에 박힌

이 거대한 말뚝

을, 누가 뽑으랴

 

홀로 귀먹고 눈먼

세 번째의,

하늘을 향해

 

영원히

달리는

아이들

 

6

어둠은 절대

끝나지 않으리라

어둠이 있는 한

아이들은 계속

태어나리라

 

은지 위에 긁히는

중섭의 손

야윈 손

 

황소가 울고

사라진 우리들 마음이

소주로 풀려도

 

웃는 아이들은 무한공동

그 바닥에서

일제히 거꾸로

다시 기립한다

 

 


 

 

이제하 시인 / 저녁에

 

 

누군지

피아노를 치고 있다

오래 전 일이다

너와 나는 돌담에 기댄 채 예사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게 몇 시쯤이었을까)

한순 말 끊어진 곳에

그 무섭도록 넘치던

고요

이제서야 생각이 나지만, 그 고요말고

무슨 다른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이마 위에

눈 위에, 어깨 위에, 우리 가슴 위에

빗살같이, 소나기의 광망같이, 아니

화살같과도 같이

꽃혀와 해일처럼

넘쳐나던

그때 그

고요

여직도 누가

하염없이

피아노를

치고 있다

 

 


 

이제하(李祭夏) 시인

1937년 경남 밀양시 출생. 홍익대 조각과 서양학과 수학. 1958년 '현대문학'에 詩 데뷔. 196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입선. 소설집 '草食 기차' 기선, 바다,하늘' '龍' 소설선집 '유자약전'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장편소설 '열망' '소녀유자' '진눈깨비 결혼', 시집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빈들판', 1999년 명지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시인/가수 등으로 활동. 2009 동리문학상. 1999 제9회 편운문학상. 1987 한국일보문학상. 1985 제9회 이상문학상 대상. 1955 제1회 학원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