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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나영 시인 / 사랑에 부쳐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3.
김나영 시인 / 사랑에 부쳐

김나영 시인 / 사랑에 부쳐

 

 

산도둑 같은 사내와 한 번 타오르지 못하고

손가락이 긴 사내와 한 번 뒤섞이지도 못하고

물불가리는 나이에 도착하고 말았습니다

모르는 척 나를 눈감아줬으면 싶던 계절이

맡겨놓은 돈 찾으러 오듯이 꼬박꼬박 찾아와

머리에 푸른 물만 잔뜩 들었습니다

이리 갸웃 저리 갸웃 머리만 쓰고 살다가

마음을 놓치고 사랑을 놓치고 나이를 놓치고

내 꾀에 내가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암만 생각해도 이번 생은 패(覇)를 잘못 썼습니다

 

 


 

 

김나영 시인 / 길일(吉日)

 

 

외삼촌의 파산이 오빠의 발 앞에 엎질러진 후

오빠의 청춘에 붉은 차압 딱지가 붙었다.

늘 생물도감 속에 숨어서 지내던

길거리 꽃 한 송이도 꺾지 못했던 오빠가

환갑이 다 되어 수백 송이 꽃 속에 파묻혀 있다.

멀리 사는 친척들까지 모두

한 자리에 불러 모아놓고

밥과 떡과 술을 멕인다, 하루는 부족하다고

2박 3일 밤낮없이 밥과 떡과 술을 멕인다.

에그머니나 오빠 망령 들었나 보네

나는 떡을 먹다가 목이 메고 마는데

내 등 두드리던 외숙모, 걱정 말란다

오늘은 길일이란다.

이렇게 큰 잔치 배설(排設)해 놓고

정작 오빤 부끄러워졌을라나

사진 속에서 빠져나오질 않는다.

하객들 불러 모아놓고

꽃 속에 파묻혀 빠져나오질 않는다.

오빠의 생을 통틀어

오늘은 이 지상에서 가장 화려한 날.

 

 


 

 

김나영 시인 / 외로울 때 안개꽃은 피어나고

 

 

 내 몸 어디엔가 감옥이 있다. 그 안에 한 마리 우울이 웅크리고 앉아 있다. 우울은 동물성, 내가 키워내는 외로움을 먹고 자란다. 나는 외로움 아이, 날마다 싱싱한 외로움을 키우는 외로운 아이. 외로움의 입자는 우울의 몸을 구성하는 고단백질, 우울의 위(胃)는 프리 사이즈, 음식물이 들어오면 우울의 위(胃)는 기하급수적으로 세포분열을 일으킨다.

 

너와 나 사이에 외로운 바다가 놓여 있어

너는 바다 저쪽에 있고 나는 바다 이쪽에 있어

수평선을 말아 쥐고 자꾸만 달아나는 바다가 있어

목 쉰 그리움으로 불러보는 아득한 이름이 있어

 

오늘도 우울이 너와 나 사이에 푸릇푸릇 돋아나는 외로움을 뜯어먹는다. 우울의 몸이 점점 비대해지고 있다. 우울이 내 몸 안에서 발광을 하고 있다.

 

 


 

 

김나영 시인 / 부푼 새

 

 

하얀 새 한 마리

허공에서 홀로 춤을 추고 있다

몸통을 잔뜩 부풀린 새가

허공을 힘껏 껴안았다가 멀리 보냈다가

 

가만히 보니 저 동작은 춤이 아니다

제 몸피 하나 가누지 못하는 엉거주춤이다

날개도 머리도 내장도 뼈도 다 털리고

입과 두 귀만 간신히 남은

아주 우스꽝스럽게 생긴 저 새는

입과 항문이 하나로 들러붙은 착종

문명의 수레바퀴와 붙어먹은 욕망이 부화시킨 새다

 

그걸 알고 저러는지 모르고 저러는지

저 새는 출생의 비밀과 자신의 운명에 시위하듯

입안 가득 바람을 잔뜩 깨물었다

허공을 쌈 싸 먹고 말겠다는 듯

찢어지게 아가리를 벌리고 또 벌린다.

위악적인 저 모습이 욕망의 몸짓과 다를 게 없다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분간이 잘 안된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저 새를 키운다

크고 작은 아가리를 채울수록 좋다 한다

처음부터 버려지기 위해서 태어나는 새도 있다

-과하게 부푼 아가리가 힘껏 잡아당긴 두 귀로 결박된 채,

전봇대 옆에 기대고 있거나 쓰레기통 옆에 부동자세를 하고 있거나 -

속사정은 달라도 모두 뚱뚱할 때 버려진다. 개중에는

먼 해양을 떠돌다가 식탁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도 있다

 

 


 

 

김나영 시인 / 사랑, 어떤 풍경

 

 

유리가 창틀을,

창틀이 유리를,

목적한다

 

바람이 불면 유리와 창틀은 부르르 떨다가

서로의 틈새로 더 깊숙이 파고든다

 

창틀을 벗어난 유리는

사방 날카로운 칼날을 세우나

그 날카로움으로는 무도 자르지 못한다

 

이내 사면초가(四面楚歌)에 이른다

 

유리 없는 창틀은

주인 잃은 수틀,

꿈 잃은 눈동자,

어떤 풍경도 빛나지 않는다

 

유리는 유리를,

창틀은 창틀을,

주장하지 않는다

 

서로의 안팎을 힘껏 끌어안고

서로를 감싸고도는 보이지 않는 그 힘으로

유리창은 빛난다

 

 


 

 

김나영 시인 / 코르셋

 

 

내 이목구비는 아버지를 빼닮았다

오래된 비유에 적합하도록

돌아가신 아버지가 내 얼굴에 확장된다

아버지와 내가 젖은 다시마처럼 겹친다

아버지의 피륙이 나의 피륙에 신표(信標)처럼

똑! 맞아떨어지려고 궁리한다

노심초사 아버지는 나를 감염시키려고 한다

비유는 나를 동반하고 이미지에 가까워졌다

아버지가 나를 입고 늘어지게 순환한다

끈적끈적 점철되는 나

아버지는 나를 연기하고 연기하려고 태어났을까

숨이 막혀요 아버지 이제 그만 나를 떠나세요

이제 그만 나를 호명하세요

아버지가 나를 부를 때마다 내 이름이 비좁아요

짙은 화장을 해도 감춰지지 않는 아버지 얼굴

아버지의 일부가 헐어서 된 내게

복수의 피가 뜨겁게 흐르고

태어날 때부터 헌것이던 나

죽어도 나는 새것이 되긴 틀린 틀

죽어도 단수가 되기 힘든 나

문득문득 내가 없다,는 사실만 빈 빵틀처럼 사실적이다

호명 밖을 겉도는 나의 실체

내게 밀착하고 좀처럼 변형되지 않는

아버지의 오래된 눈웃음

들실과 날실처럼 뒤엉켜서 나도 주름처럼 웃는다

 

 


 

 

김나영 시인 / 무꽃

 

 

무꽃이 피어났다, 쓰레기 봉지 안에서

기억상실처럼 하얀 무꽃이 피어났다. 생선가시 사이

불어터진 밥알 사이 시퍼렇게 곧추 세운 꽃대가

안간힘을 다하여 꽃을 밀어올리고 있다.

쓰레기봉지를 묶으려 들자,

밤새 게워놓은 들숨과 날숨이

해서체의 긴 유서(書)를 빠르게 써내려간다.

쓰레기봉지 안, 촛농처럼 하얀 무꽃이

가쁜 숨 몰아쉬고 있다.

 

 


 

 

김나영 시인 / 내 이름은 파랗게 일렁이는 발목

 

 

지난여름 기습적 폭우가 한강 산책로를 짓밟고 지나갔다

낭창낭창한 꽃대를 자랑하던 꽃길이 곤죽이 되었다

구청 관리들이 그 자리에서 머리를 맞대고 있을 때

매복하고 있던 야생이 먼저 숟가락을 꽂았다

강아지풀, 돌피, 개밀, 가는털비름, 털빕새귀리가

'인디언 사회에는 잡초라는 말이 없다'는 전언 앞세우고

낡음 낡음한 멜빵바지에 손가락 삐딱하니 찔러 넣고서

동네 건달처럼 짝다리를 짚고서 건들건들 헝글헝글

그 행색이 하나같이 시시하고 껄렁껄렁해 보이지만

트릭이다, 저들은 야생당(野生黨)이 키우는 비밀병기다

봐라, 강아지풀 외엔 암호 같지 않은가, 저 이름들

화가 폭발하면 아스팔트도 씹어 먹는 녹색 괴물들이다

조명발 한번 받아본 적 없지만 저 분야의 베테랑들이다

끝났다 싶을 때 Coming Soon을 외치고 다시 돌아오는

어디에 던져놔도 누대를 거둬 먹이는 튼실한 흙수저들이다

꽃길 철거 소식에 뒤늦게 합류한 쇠무릎 어르신들

관절 주사까지 두 대씩 짱짱하게 맞고 왔다나

세계는 지금 복고풍의 음악이 유행한다나 뭐라나

다들 모인 기념으로 발바닥 댄스파티부터 열어보자는데

좌우지간 놀란 땅거죽에 다시 생피가 돌겠구먼 그래

 

 


 

김나영 시인

1961년 경북 영천 출생.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1998년 《예술세계》를 통해 등단. 시집 『왼손의 쓸모』 『수작』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편저: <홍난파 수필선집>. 2005년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2009년 제2회 미네르바 작품상 수상. 현재 한양대학교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