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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정인 시인 / 오고 있던 통증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3.
조정인 시인 / 오고 있던 통증

조정인 시인 / 오고 있던 통증

 

 

우리는 새를 피해 뛰었다

박수처럼 딱딱딱, 주먹을 날리듯 퍽퍽퍽

새부리가 뒷목을 파고들면 아프다. 위험하다

우리는 뛰었다

다리 긴 초식동물처럼 겅중겅중

 

재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양팔로 머리통을 감쌌다

두 팔을 내려

왼팔로 오른팔을 오른팔로 왼팔을

살갖이 드러난 데를 감싸고

뛰었다

날개를 퍼덕이며 맹렬하게 따라오는 새

새는 날개를 펴서 우리들 맨살을 감싸지 않는다

우리는 뛰었다

불량한 새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새에 에워싸여

새에 갇혀

우리는 이리저리 출구를 찾았다

우리는 너덜너덜 헤어졌다

사나운 새들을 피해서 갈 데가 없다

 

건물 입구로 뛰어든 우리는

날뛰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모든 게 휩쓸리고 있었다

발아래 물의 깃이 쌓였다

정적이 쌓였다

두 그루 나무처럼 우리는 우뚝 멈춰

문득이라는,

우리 앞에 당도해 있는 시간의 낯선 창으로

생에 첫 사람들인 것처럼 서로를 보았다

흠뻑 젖은 너는 입술이 파랬다

너는 날아든 새

오래 전에 오고 있던 통증

생애라는 말에서

생피 냄새를 맡은 날이었다

 

 


 

 

조정인 시인 / 그믐

 

 

검은 달빛 아래 나는 생의 기초에 등을 기댄다

나는 그들과 더불어 잔병치레를 한다

 

어둠이 툭툭 실밥 터질 때

머리 위 하프 뜯는 희고 긴 손가락을 상상했다

그것은 백양나무 그림자 때문일지도 모른다

껍질은 감자를 더 이상 가둘 수 없다, 던가 하는―해빙기의

많은 것들이 달의 댓돌 밑에서 기어나왔다

 

빛을 더듬는 수많은 섬모에 싸인

발아기의 감자는 더는 식물이 아니다

싱싱한 독이 고인 턱을 들어 시간의 기슭을 기어가는

다지류 곤충의 표표한 그림자

 

종양의 신열 속에는 진초록 눈썹 한 낱이 묻혀 있다

은밀하고 재빠르게 진행되는 음모의 전모

살아있음의 비밀한 무늬

감자의 전신이 끓고 별자리의 기미가 푸릇푸릇 떠올랐다

 

그믐, 빛과 어둠에 걸쳐진 실낱의 눈썹 밑

눈 속에서 펄럭, 개기월식이 이루어지는 사이

감자가 구근의 경계를 훌쩍 넘어서고

백양나무 마른 가지 위 반뜩, 소리 한 음(音)이 일어섰다

 

 


 

 

조정인 시인 / 산사나무는 나를 지나가고

나는 산사나무를 지나가고

 

 

 지금은 산사나무가 희게 타오르는 때, 나여. 어딜 가시는지? 산사나무는 나를 지나가고

 

 내가 나를 경유하는 중이네.

 흰 터번을 쓴 어린 수행자 같은 산사나무 수피를 더듬는다. 내가 나를 더듬고 짚어보고 헤아려 보듯, 나는 재에 묻혀 움트는 감자의 눈, 움트는 염소의 뿔, 움트는 붉은 승냥이의 심장, 봄 나무가 내민 팥알만 한 새순, 겨울 끄트머리에 걸린 시샘달* 방금 운명한 망자의 움푹 꺼진 눈두덩, 생겨나고 저무는 것들 속에 눈뜨는 질문. 나여, 나는 어디로부터 나를 만나러 산사나무 하얗게 타오르는 이 별에 왔나?

 

 어제 나는 스물일곱에 요절한 나를 조문하고 왔네. 꽃 같은 얼굴이 웃고 있는 영정 앞에 예를 갖추고 향을 피우고 한 송이 애도를 놓고 왔네. 나는 나의 빈궁한 유배처, 나의 고적한 유적지, 불탄 폐사지, 내가 나를 답사하고 탐사 중이네. 휘돌며 흰 보선발을 들어 춤도 춰보네. 나는 파장한 거리의 불 꺼진 상점들. 나는 나의 목 쉰 장사치. 나는 나의 홍등가. 내가 나의 창부, 거간꾼이라네. 그렇다면 나여. 끝내 나의 무엇으로 나는 남으려는지? 나는 나의 번다한 그 모든 혼란과 혼돈. 일생 나를 따라다니며 명치끝을 건드리는 생각이라는 뿔로 한 줄 문장을 쓰는 나는 고작 나의 가냘픈 질서, 나는 오늘도 문득, 내어난 일의 기적을 사네. 나라는 가능성을 사네.

 

 둑길에는 어린 산사나무가 한 광주리 꽃을 피웠네. 산사나무라는 해당하라는 이름에 묶인, 나무라는 꽃이라는 색色의 배열을 지나네. 몇 걸음 가다보니 못다 핀 꽃망울이 달린 채 부러진 꽃가지가 던져져 있네. 나는 찢겨져나간 나를 지나치지 못하네. 꽃가지를 주워 둑길을 걷네. 지난해 봄빛이 되비치는 둑길, 나는 나의 전생과 후생을 주워 둑길을 흘러가네. 빛과 그늘이 출렁이는 유리, 혹은 유리의 안쪽을 물고기들의 유영처럼.

 

 산사나무는 나를 지나가고 나는 산사나무를 지나가네. 하나의 어항을 쓰는 두 마리 물고기의 동거처럼.

 

* 2월달 잎샘추위와 꽃샘추위가 있는 겨울의 끝 달(오픈사전)

 

 


 

 

조정인 시인 / 목격

 

 

눈썹과 눈썹 사이를 진흙달이 지나갔다

 

(잠든 자를 굽어보던 그림자 하나가 잠든 자를 걸쳐 입고

침대에 젖은 몸을 뉜다, 잠시만 머물다 가겠다한다)

 

폐가가 된 자신을 끌고 한 여자가 지나갔다, 주검을 일으켜

걷게 한 것 같은 무거운 걸음걸이로

 

수그린 옆모습을 어룽거리는 말들의 얼룩

 

삼베를 끊어

말이 흘리는 검은 피를 받으려고 나는 꿈의 갓길에 서있었는데

 

―달의 북쪽에서 붉은 재를 얻어와 인간의 전답에 뿌리니

이글이글 기근이 불붙는구나, 허기진 너희는 곧 부황이 들 테지

오라, 내 측은한 것들 곪아 흐르는 검은 젖을 물리마

 

햇빛과 먼지에 그슬린, 땋아 내린 머리타래 흙 묻은 치맛단 아래 내보이는

때에 전 발뒤꿈치 자기 앞의 불운을 맞으러 가는 저토록 묵묵한

걸음걸이라니

 

여자를 앞세우고 골목을 꺾으려던 남자 둘이 힐끗 내 쪽을 쳐다본다

타액 같은 웃음을 흘린다

 

소리가 소거된 여자에게서 뻗어 나온 비명이 거미줄처럼 번지는

꿈의 뒷길, 이 꿈의 유일한 목격자는 혹독하게 외로웠는데

 

흐려져… 흩어지려는… 양악을 두 손으로 붙들고… 조금조금 흘린

누군가의 퉁퉁 불은 말들이… 머리맡에 뒤척이는 새벽녘

 

생면부지 거지여자가 나를 다녀갔다 소리 나지 않게 방문을 닫아주고 갔다

 

 


 

 

조정인 시인 / 사라지는 건 없어 밤으로 스며드는 것들이

짙어가기 때문*

 

 

 오늘은 비의 수신인, 가을이고 저녁이다. 종일 비를 듣는다. 추적이는 비의 발걸음 소릴 듣는다. 느리게 길게 나에게로 온 비는 저를 바닥에 누인다. 병색이 짙다, 이 비 다녀가면 뭇 초목도 따라 병색일 것이다. 감염이다. 비는 모든 계절을 관통한다. 모든 시간을 관통한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하나의 연장선으로 잇는다. 하지만 오늘 이 개별적인 비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오늘 이 빗속엔 지난여름 빗속으로 떠난 사람이 있다.

 

 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김희준, 문학동네, 2020)의 제목은 완결된 문장이 아니거니와 쉼표로 마무리가 되어 다음에 올 말의 여지를 무한토록 남겼다. 쉼표 하나가 이토록 깊은 한숨이던가. 이토록 적막한 휴지(休止)이던가. 이토록 드넓은 대지 이던가. 이토록 막막한 침묵이던가. 이토록 돌올한 기표이던가. 그가 지어 놓고 떠난 언령(言靈)의 집에 들어 며칠을 묵었다. 그곳에서 그는 언제라도 현재형으로 속삭인다. 시집의 여백에 나는 이런 말을 적었다. ㅡ(나보다) 먼저 이승을 떠난 이들을 우리는 고인이라 부른다. 모든 고인은 생존해 있는 자들의 다가올 미래이며 스승이다

 

 2019년 〈지리산문학상>을 받게 됐을 때였다. 이 부족한 사람을 축하해주기 위해 통영에서 그가 와주었다. “꽃이 시들까봐 새벽에 꽃집에 들러 찾아왔어요.” 하며, 수줍게 내민 보랏빛 리샨셔스 꽃다발은 시인의 젊음처럼 풋풋하고 향기롭고 품위 있고 아름다웠다. 뒤늦게 찾아본 꽃말은 ‘변치 않는 사랑’. 이 보잘 것 없는 글이 갓 ‘첫’ 시집을 상재한 그에게 건네는 한 송이 '마음의 리샨셔스'가 돼주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 김희준, 「머 메이드 구름을 읽어내는 방식」에서

 

 


 

 

조정인 시인 / 우는 신

 

 

희생제 제물로 바쳐진 세 마리 염소 중 두 마리는 보자기로 눈을 가리자

저항을 멈추고 순순히 칼을 받더랍니다. 그런데 한 마리는 유독 목을 들어

소처럼 큰 울음을 울었다 하지요.

의식 절차에 따라 녀석의 동맥을 끊고 피를 받고 가죽을 벗기고 고기, 각을

뜨면서 녀석의 배 속에 새끼가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요.

신도 새끼 밴

희생물을 받기를 꺼려 해서요. 신도들은 염소를 판 상인에게 몰려가

항의를 했다는데요.

비 뿌리는 사원 안마당, 허리춤이 빠지도록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신도들이 부르짖는 신은 대체 어디 있을까. 보자기 속에 천천히

눈꺼풀을 내리고 죽음의 공포를 내려놓으며 미안하다, 미안하다

저의 배 속 새끼에게 절규하던 어미, 모로 쓰러져

잠잠한 고기로 돌아가 전례를 마친 신도들 접시에 나뉘었겠지만

예배 마친 신도들 공복에 들어앉은 신. 제단 위 뜨거운 촛농으로

뚝뚝 져 내리는 신. 인간의 오장육부 컴컴한 구석구석 촛대를 가져다 대는

신.

검은 보자기로 가려 두고 인간만 못 보는 신.

신전에는 없는 신.

신전 바닥엔 어미 염소 캄캄한 울음이 낭자하게 흐르는데요. 신, 저 홀로

사원 담벼락에 기대어 사무치도록 쓸쓸한데요.

 

- 시집 『사과 얼마예요』 민음사

 

 


 

 

조정인 시인 / 폐허라는 찬란

 

 

 죽음을 미리 끌어다 생필품으로 쓰는 종족이 있다. 아침이면 두런두런 죽음을 길어 어깨에 붓거나 발등에 붓는다. 입안을 헹구고 향로에 붓는다. 쿠키를 만들어 접시에 덜거나 우묵한 찻잔, 영원의 바닥까지 그것을 따른다. 일테면 모든 길은 죽음으로 나 있는 명백한 등을 대낮에도 밝혀두는 종족.

 

 추상이 구체를 뒤집어쓰는 계절. 먼 목련이 기억을 더듬어 올해의 목련에게로 거슬러온다. 나무 안에 은어 떼 점차 맑아온다. 혹한과 가온, 뿌리가 받아 마신 그늘의 총량이 제련한 저렇게 서늘한 빛.

 

 죽음을 목전에 둔 짐승처럼 꽃으로 성장한 나무가 목을 들어 길게 운다. 오후 3시, 흰 꽃그늘 아래서는 누구라도 백발이 성성한, 낯선 영역의 인간이 된다.

 

 올해의 목련이 뎅그렁뎅그렁 조종을 흔들며 산길을 내려간다. 해마다 시리도록 눈부신 종교가 들어섰다가 사라지는 산중턱. 당신은 그 꽃 진 자리를 폐허라 했고 나는 멍이라 했다. 꽃의 정점

 

- 시집 『사과 얼마예요』 민음사

 

 


 

조정인 시인

1998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 시집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 『장미의 내용』 『사과 얼마예요』. 동시집 『새가 되고 싶은 양파』 『웨하스를 먹는 시간』. 평사리문학대상, 지리산문학상. 문학동네동시문학상, 제1회 구지가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