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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정란 시인 / 눈뜬 별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4.
이정란 시인 / 눈뜬 별

이정란 시인 / 눈뜬 별

 

 

박명에 누워 창밖을 보면

검은 바다가 하늘 밑에 끼어 울부짖는다

 

몰아 닥친 바람에 물결은 쉬이 결정된다

결정된 직후에 처형된 붉은 그림자가 일어나

유령을 녹인다

다시 빚어진 검은 짐승, 바다로 걸어 들어가

떠오르는 해를 움켜쥐고 삼킨다

불쑥 환해지는 세상

태양은 눈에 띄지 않는다

 

꿈과 잠, 바다와 하늘, 발바닥과 지구가 반으로 접혔다가

피와 살, 무덤과 집, 달과 태양으로 펼쳐진다

 

몸은 불의 소용돌이를 감각하며 천천히 움직여 가는 바람

 

새로운 냄새를 맡을 때마다 풀려나오는

헐거운 춤사위를 서리서리 휘감아

팔을 자르고 용에 불을 지른다

 

모아 둔 달가루가 타면서 풍기는 성운 냄새에 눈이 먼다

 

 


 

 

이정란 시인 / 듯이

 

 

빈 의자에 앉으려다

바닥에 미끄러져 빈자리를 올려다본다

아무도 없는이 웃고 있다

 

아무도 없는 옆에 앉으려다 다시 무언가에 밀쳐

나동그라져

아무도 없는 무릎 위에 포개 앉은 나를 깨닫는다 어제의 나 어제의 어제의 나

아무도 없는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했던 꺼풀들

 

등 위에 아무도 없는을 업은 줄도 모르고, 마치

그 입속에 혀를 넣어 그의 내장을 빼먹은 적 없는 것처럼

 

아무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누구에게도 신세 진 일 한번 없는 것처럼

 

나는 (오직) 나다

주장할수록

 

아무도 없는에게 진 부채가 가벼워나 지는 듯이

 

없는에서 비롯된 바람과 들판과 바다의 생사와 내가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듯이

 

의자가 나에 주저앉을 빌미를 아주 없애려는 듯이

 

-시집 『이를테면 빗방울』 《문예중앙》에서

 

 


 

 

이정란 시인 / 나이테

 

 

잘린 나무 둥치에 비빈 손바닥으로 전신을 문질렀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듯한 시간을 덮어썼다

 

낯선 경계면에 맞닿았다

 

또렷한 죽음의 양각이 몸을 새겼다

 

팔다리는 날아가고 피는 기절했다

 

솟아나 콸콸 넘치는 시간의 中間에 휘말렸다

 

몽과 비몽을 뒤섞어 혼인했다

 

발기한 죽음의 눈물을 다 받아 삼켰다

 

지금이 막 깨어났다

 

 


 

 

이정란 시인 / 여행

 

 

물의 심지가 끊어져 섬이 옮겨붙지 않는다

하늘이 말라붙은 만년필로 손바닥에 마른번개를 쓴다

 

귀를 접은 나무 하얀 무덤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잘 건조된 독수리 눈알에 갇힌

여러 종의 동물 우는 소리를 움켜쥔다

 

이마에 달린 하늘이 희부연해지는 시각

베갯모에 붙은 삼각 단추를 떼어내자

막 부화된 나비가 쏟아져나온다, 책 속에서

글자들이 깨어났는가 싶었는데, 나는

기형으로 자란 나비에 실려

두개골을 빠져나간다, 한 덩이 불꽃이다

 

그곳은 얼어붙은 불꽃 동굴의 입구

발자국 소리에 불꽃이 녹아 사라지는 미로의 출구

 

결 잃은 창문이 수평으로 쌓여 있는 빈터에서

 

아흔아홉 두터운 밤의 심지에 사막이 옮겨붙는다

북극성이 쏜 화살에 맞아 달이 부풀어 오르고

입안에서 활대가 녹는다 휘청거리며 무인도가 풀려 나간다

 

 


 

 

이정란 시인 /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내가 그리지 않은 그림 속에서 나는 발견된다

그림은 나를 매일 바꾸고

나는 풍경을 맞추기 위해 헤매 다닌다

 

벌판을 걷다 알게 된

갈매기를 데리고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그림이 춤을 춘다

 

걷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지도가 열린다

지도에 침이 고이고 침샘에서 별이 반짝거린다

나는 암흑을 뱉어버린다

 

조각난 거울에 여러 개의 풍경이 담겨 있다

거울은 풍경을 흔들고, 풍경은 거울을 내동댕이친다

발목이 들어 있는 구두가 튀어나온다

구두와 발목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

 

성장을 멈춘 아이와 뿌리 잘린 나무가

한 쌍의 무덤이 된다 무덤 안에서

나는 처음 본 할아버지의 수염에 내 머리칼을 꼬고 있다

 

네가 발견되지 않는 장소에서

나는 휘발된다, 너는 번개

시든 그림자를 바위에 우겨 넣고 그림 밖으로 빠져나간다

 

 


 

 

이정란 시인 / 하지의 태양혈

 

 

어느 별에서 누가 아픈가

지끈 태양혈 누르며

하지의 들길을 걷는다

 

걷기를 멈춘 아기의 다리를 타고

한 줄기 오줌이 흐른다

다시 길을 가는

아기 따라 나도 간다

 

피 대신 물

바람보다 발걸음

 

그것은 사랑을 초월한 동행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윤회

죽음과 삶을 뒤섞는 호흡

태초부터 이어져 온 맥박

 

손에 손

입에 입

그 위에 마음자리

 

마음과 마음을 맞추면

흘러넘치는 침의 거미줄

 

이대로 가

어디든

가지 않아도 가

언제든

 

함지야

웅, 아가야

태초부터 지금까지야

 

우린 아주 잠깐 사이

함께 태어난 샴쌍둥이

심장이 붙어 숨 쉰다

 

숨 한 줌씩 모아

연두색 아기 태양의

등을 덮어준다

 

아련한 연기 너머

천궁 넘고 꿈을 건너

시간의 비늘 벗기며

천둥 번개 속에 영원히

 

우리의 엄마들 만나러 함께 가자

백만 살 아가 태초야

천만 살 티끌 바람아

 

 


 

 

이정란 시인 / 악기 사러 가는 길

 

 

무궁화 악기점 진열대에 첼로가 서 있다

유리창에 이마를 들이대고

초롱한 눈빛으로 창 밖 거리의 악보를 읽는다

첼로의 느슨한 줄이 내 눈길 쪽으로 당겨지자

도시의 오후가 팽팽해지고

음을 맞추는 소리 붕붕거린다

유리창 안에 어른거리던 노래의 한쪽 문이

열리고 파도치듯 흘러나온

세바스찬 바하의 무반주 첼로곡이

가을비에 떨어진 은행잎의 속살 속으로

아득히 젖어든다

생의 한 줄이 끊어진 사람들의

잃어버린 음표가

굵어지는 빗소리에 떠내려간다

부르튼 손가락으로 슬픔을 짚어 가는

얼굴들을 매단 낡은 악상 한 대

신호등에 걸려 주춤거린다

마지막 한 소절을 향해 달려간다

누군가 가슴줄을 뜯고 있을 때

소리를 잃은 관악기들이 목쉰 울음을 꺾어

삼키며 지하에 웅크려 선잠을 잔다

 

-현대시(2001)

 

 


 

이정란 시인

1959년 서울에서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1999년 《심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어둠ㆍ흑맥주가 있는 카페』 『나무의 기억력』 『눈사람 라라』 『이를테면 빗방울』. 계간 『詩로 여는 세상』 편집장으로 활동 中. 2019년 서울문화재단 예술가 지원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