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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상순 시인 / 운두령에서 짓다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9.
황상순 시인 / 운두령에서 짓다

황상순 시인 / 운두령에서 짓다

 

 

운두령 골짜기에 살고 있는 친구가

저녁나절 불쑥 들른 나를 보고

감자알보다 더 굵은 미소를 지었어요

 

집을 짓는 일

농사를 짓는 일

밥을 짓는 일

詩를 짓는 일

 

집을 짓다가 마는 것

농사를 짓다가 마는 것

밥을 짓다가 마는 것

詩를 짓다가 마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짓다가 만 집 다시 짓고

짓다가 만 농사 다시 짓고

짓다가 만 밥도 다시 짓고

짓다가 만 詩도 다시 지어야 한다고

 

매듭을 풀며 매듭을 지으며

무얼 짓든 쉬운 게 하나 없지만

마무리를 잘 지어야 하는 법이라고

그럴 때 아니냐고

넌지시 한 수 가르쳐 주었는데요,

 

오늘 그만 또 죄를 짓고 말았어요

뒤꿈치를 졸졸 따라다니던 일곱 마리 새끼강아지

이름을 짓다가 잊고서 그냥 돌아왔어요

운두령이 무너져 내릴세라

어미 개가 밤새도록 왈왈 짖어대요

 

 


 

 

황상순 시인 / 권고사직

 

 

태풍 지난 후

그가 떠난 빈자리로 모처럼 햇살이 찾아왔다

응, 어디 갔지? 어디 갔을까?

바람에 흔적 없이 쓸려간 것을 모르는 듯

눈치 둔한 햇살은 종일토록

주인 잃은 책상을 어루만지고 있다

 

 


 

 

황상순 시인 / 학문의 전당

 

 

어둡고 좁은 길

구절양장 기나긴 터널을 지나

출구에 다다르기까지

지구별 누군가의 쓸쓸한 저녁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한 끼 따뜻한 밥이 되고자 했지만

그때까지였다

단단히 마음먹고 문을 나서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눈부신 신세계

 

나는 똥이었다

 

 


 

 

황상순 시인 / 명품

 

 

발길에 채이고

 

찌그러지고 검게 때가 끼어서야 비로소

 

라면 한 그릇 뜨겁게 끓여내는

 

빈티지 냄비가 되었다

 

 


 

 

황상순 시인 / 좋은 이름

 

 

할무이, 진지 잡솼는겨

응, 누고

옆집 상철 아범 아입니꺼

점심때쯤 다시

할무이, 밭에 가시니껴

응, 누고

바로 옆집 상철 아범 아임니꺼

저녁나절 또 누구냐고 묻자

상철 아범 그만 큰일 났다 싶어 얼굴 바짝 들이대며

딱 보이 이제 알겠능겨

할머니 잠시 뜸을 들이다가 설핏 미소 지으며

응, 딱 보이구나!

상철 아범 그 이후로 멀쩡한 제 이름 놔두고

딱보이로 불린다

딱봉이, 쌀 댓 말은 족히 주었어야 할

할무이 치매도 고치는

 

참 좋은 이름이다

 

 


 

 

황상순 시인 / 종합선물세트

 

 

 파리 몽마르뜨 언덕에서의 일이다

 

 뒤처져서 같이 걷던 전남 구례읍 봉서리가 고향인 박삼례 여사가 말하기를, 저 인간과 처음 만나던 날 내게 건네준 무슨 무슨 표 종합선물세트에 씌워 시집을 갔노라고 조곤조곤 얘기했다

 

 핸드백이 아니라 양산이 아니라 원피스가 아니라 반지 목걸이가 아니라 사각의 종이 상자 안을 가득 채운 알록달록한 사탕과 과자며 치약 비누가 오색영롱한 보석으로 반짝거려서 그날로 날을 잡았다나 그 다음날 날을 잡았다나, 어쨌거나,

 

 언덕 위에 올라 파리 시내를 휘 한번 조감한 후 덧붙이기를, 내가 무신 팔자가 요로코롬 좋아 이런 귀경을 다 해본다냐, 지금 가만 생각해보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 손주며 집이며 종합선물세트는 내가 다 만들었지라, 저 인간은 끝까정 손이 안 가는 참말로 맛대가리 없는 과자인데도 빼도 못하게 꼬롬 세트 중간에 징하게 앉아 있구마이,

 

 숙소 가는 길에 들른 쁘렝땅백화점에서 박삼례 여사는 기어이 까아만 거시기똥 가방 하나를 그 인간 머리 위에 얹어 앞세우고 의기양양하게 계산대로 향했다

 

 그러지라, 그러지라 자기 선물세트는 자기가 손수 맹글어부리는것!

 

 


 

 

황상순 시인 / 인연

 

 

세상 더없이 큰 망원경으로

550광년 멀고 먼 거리의 안타레스별 이웃 동네

어느 골목집 창문에 초점을 맞추다가

거기 나랑 똑같이

커다란 망원경으로 지구 곳곳을 살피던 이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만다

그가 배시시 웃는다 나도 얼른 손을 흔든다

 

-「포엠포엠」 2022. 봄호

 

 


 

 

황상순 시인 / 여우, 꼬리에 비밀을 감추다

 

 

 여우를 숭배하는 아프리카 도곤 부족이 최초로 시리우스별을 발견했다고 한다. 태양보다 스무 배나 밝은 별 시리우스, 그곳에서의 시간과 태양계에서의 시간은 같지 않다. 궁금하지만 빛도 8년을 넘게 가야하는 별, 너무 멀다.

 

 평사리 최참판댁 탱자나무 우듬지 가시 끝에 자벌레의 마른 몸이 붙어있다. 그는 어느 별로 우화를 한 것일까. 온 몸으로 일생 동안 나무를 올랐을 텐데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나무를 오른 평생의 시간과 무심히 그 집 뒤란을 걷는 내 소소한 시간의 길이는 같을까, 다를까.

 

 서희도 길상이도 별로 돌아간 오리온좌 삼태성 부근어느 동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이주한 아프리카 도곤부족의 지혜로운 촌장님이 길게 목을 빼고 섬진강 주변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다. 그 밝은 눈 아래잿빛 긴 꼬리에 열쇠를 감춘 여우는 곧 발각이 되고 말 것인가.

 

 비밀의 상자는 이내 열리고 말 것인가? 뒤란을 돌아와 마당을 서성이는 나는 어떤 자벌레로 꼬물꼬물 그의 눈에 비치는지? 궁금하여, 은하수 깊은 밤 하늘을 오르는 종이 등처럼 타오르며 시리우스, 멀고 먼 별을 향해 높이높이 우화등선을 하리라.

 

 


 

황상순 시인

1954년 강원도 평창 출생. 1999년 《시문학》과 《시인정신》으로 등단. 시집 『어름치의 사랑』 『사과벌레의 여행』 『오래된 약속』 등. 2015년 한국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