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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봉 시인 / 뒤뚱거리는 마을
금강 북쪽, 장남 평야의 끝 산언덕 아래 작은 마을이 있었지 막은골 모듬내 둑방을 막아야 한다며 옛사람들이 입 모아 붙인 이름이지 막은골의 두 다리 그때는 튼튼했지 똑바로 서서 혼자서도 잘 걸었지 지금은 이 마을 뒤뚱거리며 겨우 걷지 공사 중 한쪽 다리 부러져버렸지 다리 부러져 뒤뚱대는 것은 별것 아니지 조만간 이 마을 없어진다지 크고 엄청난 대도시 세워진다지 대도시가 세워지면 무엇이 좋나 좋을 것 없지 왕왕 자동차나 몰려다니겠지 그렇지 대도시에는 고향이 없지 대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 그렇지 그리움도 기다림도 없지.
―시집 『뒤뚱거리는 마을』 서정시학, 2023.
이은봉 시인 / 밤
방아깨비, 풀무치도 잠 깨어 무섭다고 한다 개구리, 두꺼비도 잠들지 못하고 조바심친다 파도소리도 눈 감지 못 하고 두려워 훌쩍인다 강정의 밤, 달빛도 별빛도 가슴 두근거리며 내일이 걱정이다 일본의 핵무기가 노려보고 있기 때문이다 죽국의 핵무기가 째려보고 있기 때문이다 닥나무 잎사귀는 이제 숨도 크게 쉬지 못 한다 벌써 가로등 불빛도 온몸에 돋는 소름으로 떨고 있다 이미 구럼비 바위는 까맣게 자지러진 지 오래다.
-시집 <뒤뚱거리는 마을>에서
이은봉 시인 / 호박넝쿨을 보며
두엄 구뎅이 뚫고 호박넝쿨 몇 순 담벼락 타고 오른다 가쁜 줄타기 한다 오뉴월 마른 가뭄 뚫고 따가운 햇볕 뚫고
소낙비에 흠씬 몸 적시며 마침내 담벼락 꼭대기에 올라 가부좌를 틀고 내려다 보는 호박넝쿨들 장하구나 노랗게 피워 올리는 호박꽃들 뽀얗게 드러내놓는 젖통들 굉장하구나
젖은 몸 털며 발 아래 시원히 굽어보면 호박넝쿨들 시원하구나 와락, 현기증 밀려 오기도 하는구나
하지만 여기 담벼락 아래 두엄더미 아래 땅으로만 손 뻗으며 납작 몸 젖히는 놈들도 있구나 아프게 몸 비트는 놈들도 있구나
놈들이 피워 올리는 꽃들 참하게 꺼내어놓는 젖통들, 이라고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환하게 빛나지 않으랴
-『다층』(2000. 봄)
이은봉 시인 / 산길을 가며
산길을 가며 나무를 만나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며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다
저처럼 많은 나무들 나무들 중에도 좋은 나무가 있다
저처럼 많은 사람들, 사람들 중에도 좋은 사람이 있다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을 만든다 좋은 나무가 좋은 숲을 만드는 것처럼.
- 시집 『걸어 다니는 별』 중에서
이은봉 시인 / 큰아이에게 ― 엄마, 엄니, 어머니로부터 상추쌈, 씻다가 너를 생각한다 된장국, 끓이다가 너를 생각한다 콩나물, 무치다가 너를 생각한다 땡볕, 살 따갑고 매미소리, 귀 따갑고 땅훈기, 숨막히고 ……… 아이야, 서울의 큰아이야 엄마다 엄니다 어머니다 그리움, 상추쌈 냄새로 일렁인다 그리움, 된장국 냄새로 삽짝문 나선다 그리움, 콩나물 냄새로 길 떠난다.
이은봉 시인 / 우실바다
포구 가득 물새들 끼룩거린다 장맛비 잠시 멎는다 하나둘 항구를 떠나는 배들물 안개, 뿌옇게 방파제를 덮는다
우실우실, 슬픔이 밀려온다 삶은 늘 방파제의 끝이다 방파제 끝에서 바라보는 여수 앞바다 금오도 우황리 우실바다
저녁이 오면 아침은 다시 또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 삶은 끝없이 떠나는 것 우실우실, 더 남아 있을 곳이 없다.
-시집 『뒤뚱거리는 마을』 (서정시학) 중에서
이은봉 시인 / 수종사 찻집에 앉아
은행나무도 두 그루다 강물도 두 줄기다 마음도 두 개로 흔들린다 까마귀도 두 마리 까악까악 하늘을 날고 있다 수종사 찻집에 앉아 중늙은이 두 사람, 둘이면서 하나를 생각한다 두 눈 살짝 감은 채 하나이면서 둘인 세상을.
―시집 『뒤뚱거리는 마을』 서정시학,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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