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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현 시인 / 미완의 모래시계
내 책상 위에도 모래시계 파란 모래 노란 모래 물들인 모래
어느 것을 뒤집든 모래가 흘러내리고 뒤집는 손이 시간의 주인이다
동어반복에 빠져 있는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고 문장을 세 줄씩 쓰기로 한다
피라미드와 역피라미드 사이 탈출구가 아래로 뚫려 있다 앞다투어 빠져나가는 모래들 다시 갇힌다
피라미드 위에 역피라미드 아귀의 목구멍처럼 좁고 가파른 통로 세상도 나도 비좁은 지금을 통과한다
피라미드 그리고 역피라미드 텅 빔이 그들을 하나로 이어준다 빈 곳에서 빈 곳으로 텅 빈 것이 몰려간다
분홍은 3분 노랑은 10분 파랑으로는 30분
물들인 모래가 쏟아지는 시간 평온한 마음도 깊이 들어가면 산악 랠리처럼 코스가 험난해진다
시간이 빠져나간 내 눈에도 구멍이 뚫려 있다 역피라미드로 꽂힌 허공이 내 눈에 파랑을 쏟아붓는다 불벼락과 우레가 섞여 있다
사람이 드나든 지 오래된 바닥 내 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다
흘러내린 모래처럼 가만히 쌓여 있는 나는 창을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따라 보이지 않는 구멍으로 새어나간다
-계간 《상징학 연구소》 2022년 여름호-
이순현 시인 / 광장
촛불이 타오른다 내 손바닥 위에서도
바윗돌 위 야단이든 물 위에 뜬 갑판이든 촛불이 타는 곳은 별안간에 성소가 된다
모여든 사람들 하나하나 각자의 극지로 데려다 놓는 날불꽃 한 잎
피 끓는 대지를 향해 돌파한 상부를 짊어지고 내려온다
한 발 한 발 척추를 적출하며 아래로 길을 열며
거대한 인드라 그물 서로 비추는 동공을 엮어나간다
야생의 창세기로 귀환한다
이순현 시인 / 어느 천사의 고백
빛을 한 점으로 끌어 모으며 투명한 천사가 고백을 해왔다
신들도 배역이 바뀌지 않아요 나도 늘 똑같은 심부름을 반복할 뿐이죠 커피를 누르면 커피를 뽑아내는 자판기처럼요
하지만 사람들이 왼발을 들어 왼...발의 하늘에 넣었다 꺼내고 오른발을 오른발의 하늘에서 꺼낼 때마다 발바닥에 새로운 날개가 돋아나는 게 보여요
거리마다 날개 부서지는 소리가 경쾌하고 아름다워요
내 발자국 소리도 들을 수 있을까 돌아다니는 내내 귀 기울여보았어요
물길을 따라 지평선을 돌고 돌아도 붉은 피 한 방울 얻기는 불가능한 지평
발목을 낚아채가는 지뢰가 무한정하게 매복하고 있다 날개 돋을 겨를조차 용납 않는 불한당들이
이순현 시인 / 침입자 새가 소리친다 뜬눈으로 건너온 신새벽 밤을 통과한다는 건 몸을 차지하고 있는 뱀을 뱉어내는 일 비명을 지르는 저 새도 몸의 일은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고 시간을 보려면 빛이 필요하다 창 밑의 금낭화도 검은 덩어리롤 건너왔을 밤의 끝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작은 부리를 벌리고 심장을 털렸을 저 새는
이순현 시인 / 안전벨트 채워지듯 딸깍,
초록 소파와 초록 소파
서로 맞춰지겠지 품목이 확인되겠지
수거 담당 공무원은 창 너머 저 어딘가에 있다
품목: 초록 소파 하나
가구 수거 신청서에 나는 왜 초록까지 써넣었을까
그의 눈에 박혀버린 문자, 초록을 소파수술을 하듯 긁어낼 수는 없겠지
초록은 내 몸을 먹고 광합성을 하지 몸과 몸이 주고받는 말은 언제나 절대 긍정이었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갈라지고 터지는 초록의 안락도 안락사시킬 수밖에 없겠지
창문을 떼어내고 운구하듯 소파를 떠밀어내는
창 너머에는 구청 직원이 있다
기다렸다는 듯 그의 초록 소파, 자모음이 열리고 너덜너덜한 초록 소파가 들어앉겠지
딸깍,
초록 소파, 이름만 가진 나는 몸을 떨 거야 메마른 바람이 불어가는 황무지처럼 초록의 바깥이 되어
이순현 시인 / 테이블 위에
컵 하나가 있다 얼음 녹은 물이 찰랑이는 컵 하나가 있다 컵 가까이 손 하나가 놓여 있다 유리컵 한쪽에 희끄무레하게 입술 자국이 찍혀 있다 차오르는 물의 수위가 조금씩 높아지는 컵 하나가 있다
잠결에 펜 뚜껑을 열고 머리맡의 메모지에 받아 적는다
지평선 위에 컵 하나가 있다 빙하 녹은 물이 찰랑이는 컵 하나가 있다 컵 가까이 손 하나가 놓여 있다 유리컵 한쪽에 희끄무레하게 입술 자국이 찍혀 있다 차오르는 물의 수위가 높아지는 컵 하나가 있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그런 컵 하나가 있었다고
더듬더듬 적고 난 뒤 다시 잠든 사이 열린 펜의 꿈도 울컥울컥 베갯잇을 적셨나 보다 거대한 테이블 위로 폭우가 쏟아지던 밤
이순현 시인 / 금방
먼저 가 있어 금방 갈게
블라인드의 눈금 사이로 금방이 오고 있을 바깥을 내다본다
말들의 덤불 속에 그는 있다
얼음이 수면으로 떠오른다 유리잔에 맺힌 물방울들이 줄줄이 추락한다
금방 갈게
ㅁ이 녹아내리는 듯 금방은 금방금방 뒤로 밀려나고
젖은 샌들에 나비 한 쌍 꿈결인 듯 그늘을 향해 날개를 펼칠 때 빗줄기는 줄기차게 금방의 바닥으로 착지한다
각이 진 얼음은 알고 있다 금방은 그와 동행할 수 없다는 것을
불빛은 행인들에게 이식되며 인간으로 부활하다 금방금방 스러지고
금방, 하나만을 품은 눈이 블라인드를 벌리고 내다본다
우주 미아처럼 막막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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