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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순현 시인 / 미완의 모래시계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30.
이순현 시인 / 미완의 모래시계

이순현 시인 / 미완의 모래시계

 

 

내 책상 위에도 모래시계

파란 모래

노란 모래

물들인 모래

 

어느 것을 뒤집든 모래가 흘러내리고

뒤집는 손이 시간의 주인이다

 

동어반복에 빠져 있는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고

문장을 세 줄씩 쓰기로 한다

 

피라미드와 역피라미드 사이

탈출구가 아래로 뚫려 있다

앞다투어 빠져나가는 모래들 다시 갇힌다

 

피라미드 위에 역피라미드

아귀의 목구멍처럼 좁고 가파른 통로

세상도 나도 비좁은 지금을 통과한다

 

피라미드 그리고 역피라미드

텅 빔이 그들을 하나로 이어준다

빈 곳에서 빈 곳으로 텅 빈 것이 몰려간다

 

분홍은 3분

노랑은 10분

파랑으로는 30분

 

물들인 모래가 쏟아지는 시간

평온한 마음도 깊이 들어가면

산악 랠리처럼 코스가 험난해진다

 

시간이 빠져나간 내 눈에도

구멍이 뚫려 있다

역피라미드로 꽂힌 허공이

내 눈에 파랑을 쏟아붓는다

불벼락과 우레가 섞여 있다

 

사람이 드나든 지 오래된 바닥

내 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다

 

흘러내린 모래처럼

가만히 쌓여 있는 나는

창을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따라

보이지 않는 구멍으로 새어나간다

 

-계간 《상징학 연구소》 2022년 여름호-

 

 


 

 

이순현 시인 / 광장

 

 

촛불이 타오른다

내 손바닥 위에서도

 

바윗돌 위 야단이든

물 위에 뜬 갑판이든

촛불이 타는 곳은 별안간에 성소가 된다

 

모여든 사람들 하나하나

각자의 극지로 데려다 놓는

날불꽃 한 잎

 

피 끓는 대지를 향해

돌파한 상부를 짊어지고 내려온다

 

한 발 한 발 척추를 적출하며

아래로 길을 열며

 

거대한 인드라 그물

서로 비추는 동공을 엮어나간다

 

야생의 창세기로 귀환한다

 

 


 

 

이순현 시인 / 어느 천사의 고백

 

 

빛을 한 점으로 끌어 모으며

투명한 천사가 고백을 해왔다

 

신들도 배역이 바뀌지 않아요

나도 늘 똑같은 심부름을 반복할 뿐이죠

커피를 누르면 커피를 뽑아내는 자판기처럼요

 

하지만 사람들이

왼발을 들어 왼...발의 하늘에 넣었다 꺼내고

오른발을 오른발의 하늘에서 꺼낼 때마다

발바닥에 새로운 날개가 돋아나는 게 보여요

 

거리마다 날개 부서지는 소리가

경쾌하고 아름다워요

 

내 발자국 소리도 들을 수 있을까

돌아다니는 내내 귀 기울여보았어요

 

물길을 따라 지평선을 돌고 돌아도

붉은 피 한 방울 얻기는 불가능한 지평

 

발목을 낚아채가는 지뢰가

무한정하게 매복하고 있다

날개 돋을 겨를조차 용납 않는 불한당들이

 

 


 

 

이순현 시인 / 침입자

새가 소리친다 뜬눈으로 건너온

신새벽

밤을 통과한다는 건

몸을 차지하고 있는 뱀을 뱉어내는 일

비명을 지르는 저 새도

몸의 일은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고

시간을 보려면 빛이 필요하다

창 밑의 금낭화도 검은 덩어리롤 건너왔을

밤의 끝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작은 부리를 벌리고 심장을 털렸을 저 새는

 

 


 

 

이순현 시인 / 안전벨트 채워지듯

딸깍,

 

초록 소파와

초록 소파

 

서로 맞춰지겠지

품목이 확인되겠지

 

수거 담당 공무원은 창 너머

저 어딘가에 있다

 

품목: 초록 소파 하나

 

가구 수거 신청서에

나는 왜 초록까지 써넣었을까

 

그의 눈에 박혀버린

문자, 초록을

소파수술을 하듯

긁어낼 수는 없겠지

 

초록은 내 몸을 먹고

광합성을 하지

몸과 몸이 주고받는 말은

언제나 절대 긍정이었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갈라지고 터지는 초록의 안락도

안락사시킬 수밖에 없겠지

 

창문을 떼어내고

운구하듯

소파를 떠밀어내는

 

창 너머에는 구청 직원이 있다

 

기다렸다는 듯

그의 초록 소파,

자모음이 열리고

너덜너덜한 초록 소파가 들어앉겠지

 

딸깍,

 

초록 소파,

이름만 가진 나는 몸을 떨 거야

메마른 바람이 불어가는 황무지처럼

초록의 바깥이 되어

 

 


 

 

이순현 시인 / 테이블 위에

 

 

컵 하나가 있다

얼음 녹은 물이 찰랑이는 컵 하나가 있다

컵 가까이 손 하나가 놓여 있다

유리컵 한쪽에 희끄무레하게 입술 자국이 찍혀 있다

차오르는 물의 수위가 조금씩 높아지는 컵 하나가 있다

 

잠결에 펜 뚜껑을 열고

머리맡의 메모지에 받아 적는다

 

지평선 위에

컵 하나가 있다

빙하 녹은 물이 찰랑이는 컵 하나가 있다

컵 가까이 손 하나가 놓여 있다

유리컵 한쪽에 희끄무레하게 입술 자국이 찍혀 있다

차오르는 물의 수위가 높아지는 컵 하나가 있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그런 컵 하나가 있었다고

 

더듬더듬 적고 난 뒤 다시 잠든 사이

열린 펜의 꿈도

울컥울컥 베갯잇을 적셨나 보다

거대한 테이블 위로 폭우가 쏟아지던 밤

 

 


 

 

이순현 시인 / 금방

 

 

먼저 가 있어

금방 갈게

 

블라인드의 눈금 사이로

금방이 오고 있을 바깥을 내다본다

 

말들의 덤불 속에

그는 있다

 

얼음이 수면으로 떠오른다

유리잔에 맺힌 물방울들이 줄줄이 추락한다

 

금방 갈게

 

ㅁ이 녹아내리는 듯

금방은 금방금방 뒤로 밀려나고

 

젖은 샌들에 나비 한 쌍

꿈결인 듯 그늘을 향해 날개를 펼칠 때

빗줄기는 줄기차게 금방의 바닥으로 착지한다

 

각이 진 얼음은 알고 있다

금방은 그와 동행할 수 없다는 것을

 

불빛은 행인들에게 이식되며

인간으로 부활하다 금방금방 스러지고

 

금방, 하나만을 품은 눈이

블라인드를 벌리고 내다본다

 

우주 미아처럼 막막하게

 

 


 

이순현 시인

1960년 경북 포항 출생. 동국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수료. 1996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 『내 몸이 유적이다』 『있다는 토끼 흰 토끼』.